책소개
“그 울음은 목숨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역사의 악몽을 되짚어 살아내는 생생한 기억 체험
더 이상 해원도 위안도 없을 고통의 연대기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개도둑」으로 등단한 이래 지난 36년간 이상문학상, 단재상, 요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활발하게 활동해온 작가 임철우의 다섯번째 소설집 『연대기, 괴물』이 출간되었다. “사건들의 기록자” “기억의 발굴자”(문학평론가 김형중)이자 “탁월한 서정시인”(문학평론가 김현)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그의 소설 이력은 역사의 환부를 집요하게 추적해가면서도 절제된 정서와 문학적 깊이를 유지해온 그의 오랜 작풍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 또한 비극을 응시하고 그 연원을 좇아 기어코 악몽 같은 심연을 마주하고야 마는 일곱 편의 소설이 묶였다. 하지만 전작들인 『백년여관』 『이별하는 골짜기』 『황천기담』 등에서 임철우가 마련했던 마술적이고 신화적인 공간, 환상과 위로의 여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작가는 반성하고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지 못한 채 격변해온 사회,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조그만 숨구멍조차 마련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더 밀도 있게 채워 넣는다. 제목처럼 연속된 수난의 역사를 생의 연대기로 기입해나가며, 그 고비마다 들끓었던 폭력들을 포착해낸다. 대체적으로 요즈음 단편들보다 좀더 긴 호흡으로 씌어진 이 소설들은 일견 쓸쓸하고 어두운 이야기들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임철우가 오래 천착해온 ‘기억과 죽음에 관한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 언어를 넘어서는 공감의 장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목차
흔적
연대기, 괴물
세상의 모든 저녁
간이역
이야기 집
남생이
물 위의 생
해설 임철우, 사도 바울_ 김형중
작가의 말
저자
임철우
출판사리뷰
괴물의 시대, 너와 나의 고통을 잇는 연대기
괴물과 처음 맞닥뜨렸던 날을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아니 여덟 살이었던가. 아마 여름방학이었을 것이다. 머리 위로 땡볕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한낮. 외가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뒤란의 작은 대숲을 그는 멍하니 건너다보고 있었다. 집 안은 물밑처럼 조용했다. 여느 때처럼 그는 혼자였다. 얼음 조각을 어금니에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지독한 외로움에 그는 이미 익숙했다. 그에겐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무했다. 세 살 때 헤어졌다는 생모는 얼굴 윤곽조차 지워진 채 아슴푸레한 체취로만 남았고, 생부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비밀에 묻혀 있었다. 덥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다. 뒤란 대나무 숲은 미동도 없이 정적에 싸여 있었다. 피 묻은 쇠갈고리를 쥔 사내.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많은 시체들. 수면 위에 해파리처럼 풀어져 너울거리는 여자들의 치렁한 머리채…… (「연대기, 괴물」, pp. 53~54)
어느 한 순간 한 걸음만 돌아서면 커다란 구멍이랄까 함정이 발밑에 무수히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정말이지 어느 사이에 괴물로 변해버린 이 끔찍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괴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이런 일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사회든 개인이든 너나없이 진지한 반성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임철우· 류보선 대담, 「기담이라는 장르의 발명과 모계사회라는 역성혁명」, 『문학동네』 2014년 여름호)
그간 임철우 소설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비롯된 양민 학살, 독재 군부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계엄군의 폭력 진압 등 한국 역사의 가장 처참한 사건들을 소설화해왔다.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임철우 이전 세대에서 이러한 비극을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별안간 들이닥친 일’, 혹은 ‘화해하고 극복할 상처’로 종종 상정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임철우는 광기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의 면면, 그리고 이들로 인해 그 고통스런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애에 집요하게 파고들어왔다. 표제작 「연대기, 괴물」은 보도연맹 사건부터 베트남 전쟁, 세월호 사건을 잇는 비극의 연대기, 이 연속된 고통을 괴물의 환상으로 겪어내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긴 세월 무연고자로 살아온, 고엽제 후유증으로 물집에 뒤덮인 채 끝내 환각을 쫓아 지하철로 돌진해 생을 마감해버리는 그는 한 세대의 상징적 초상처럼 읽히기도 한다. 제정신으로 버텨내기 어려운 시대, 너나없이 함정으로 빠져들고 광기에 몸을 맡기게 되는 순간, 가해와 피해, 죽음과 살인이 혼재된 긴 흐름을 작가는 서늘하리만치 정직하게 재현해낸다.
죽음이란 벽 앞에서 절실하게 살려내는, 당신이라는 기억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 누추한 자루 속에 담긴 한 생애의 모든 시간, 추억, 풍경 들 그리고 이야기 들도 함께 지워지고 있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작고 이름 없는 세계 하나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저녁」, p. 152)
그런데, 막상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이 넓은 세상에 내겐 아무도 없는 거예요. 부모, 형제, 친구조차도요. 아무도 나를 모른다면, 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이 지상에 잠시 왔다 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도록 외롭고 무서웠어요……(「간이역」, p. 202)
이 소설집을 관류하는 주제는 무엇보다도 기억과 죽음이다. “당신이 말하는 해묵은 역사니 지나간 사건 따위를 나는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난 단지 사람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죽은 자와 아직 살아 있는자. 그들의 이름 없는 숱한 시간들을, 사랑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나는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작가 후기」, 『백년여관』, 한겨레출판, 2004)라고 말한 바 있듯 임철우의 소설에서 죽은 자의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현재형이 된다. 지상에 홀로 방치될 육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질 운명들의 애처로움에 주목하는 그의 안타까운 시선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다. 이번 「작가의 말」에서 인용된 “기억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이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라는 수전 손택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듯 임철우에게 기억은, 멀리서 불타고 있는 존재들에게 손 내밀고 함께 통증을 살아내는, 그럼으로써 안타깝게 죽어간 존재들을 살려내고 위로하는 그의 치열한 윤리적 작업 그 자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