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겨우 다스린 역마
기억과 반성으로 씌어진 우리 곁, 거리의 역사
시인 서효인의 세번째 시집 『여수』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백 년 동안의 세계 대전』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이다. 분노를 비틀어 뿜어내며 오늘의 소년소녀들에게 메시지를 투척하던 첫 시집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정치·경제·사회적 폭력의 지도를 그려내던 두번째 시집이 마그마처럼 들끓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은 상온에 가깝다. 서효인이 그려온 시의 궤적으로 미루어보자면, 이 변화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질 폭력의 세계에 응전하기 위한 대안 모색이자 일종의 시적 성장일 것이다. 끓는점을 높이고 깊이를 더한 『여수』에서 시인은 ‘역사의 공간화’를 시도한다. 하나의 공간을 두고 과거와 현재가, 사적인 기억과 공적인 역사가 겹쳐지면서, 서효인이 스쳐간 어딘가는 객관적 ‘공간’이기를 멈추고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여 유일무이한 ‘장소’가 된다.
목차
여수
불광동
곡성
이태원
이모를 찾아서
강릉
부평
남해
양화진
강화
자유로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송정리역
1990년 1월 1일 3
친구를 찾아서
서울
구로
북항
나주
안양
남자를 찾아서
안성
덕담을 찾아서
신촌
대전
서귀포
구미
분당
파편을 찾아서
파주
익산
마포
취향을 찾아서
마산
장충체육관
효창공원
영광
연희동
학교 연못
고기를 찾아서
압해도
철원
개성
송정리
올림픽고속도로
지축역
한강철교
정체성을 찾아서
진주
압구정
금남로
주차장
기계
진해
바울과 나
화정
경기 북부
귀향
무안
죄인의 사랑
발문 | 역마의 기원?김형중
저자
서효인
출판사리뷰
겨우 다스린 역마
-삶과 죽음의 간격에서
“수평적 공간뿐 아니라 공간의 위아래를 꿰뚫는 수직의 시간, 공간이 품고 있는 분위기와 공기를 예민하게 캐치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씨네21』 No.1062 인터뷰). 서효인의 시에서 공간은 시간의 체취가 담겨 있는 곳이다. 『여수』 속 63편의 시들 가운데 50편의 제목이 공간과 관련된 것인데, 크게는 서울, 목포, 여수처럼 지역의 이름이거나 연희동, 이태원, 금남로 같은 도시 안의 구역, 자유로와 올림픽고속도로처럼 지역들을 잇는 길들, 작게는 학교 연못이나 주차장까지를 포함한다.
이 시집의 발문을 담당한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서효인의 세번째 시집 속에서 만나게 되는 장소들이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고 사적 기억에 공적 역사가 중첩되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곳들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자유로 위 출근길 만원 버스에서의 나와 1968년의 무장공비 김신조가 오버랩되고(「자유로」), 체육관에서는 1970년대의 프로레슬링과 1980년대의 체육관 선거, 최근의 외국 뮤지션 공연이 동시에 펼쳐진다(「장충체육관」). 성장과 가족사, 조문, 짧은 여행, 출퇴근과 일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 여정들이다.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특이한 장소들, 역사가 공간화된 장소들”, 사적 기억과 공적 기억 들이 누적·교차된 서효인의 장소들은 그러므로 여기 아닌 어딘가로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곳을 겹쳐 밟았을 언젠가의 누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치밀한 기록, 지리지로 읽히곤 한다. 시간과 공간이 세로축과 가로축이 되어 만날 때, 장소는 생명을 얻는다. 그 교차 지점에 서효인의 시가 위치한다.
나는 앉는 일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는 대통령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 빠른 속도로 능선을 타고 넘었다. 생각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누군가 어젯밤의 뒤숭숭한 결과를 빈자리에 토해놓았다. 누군가 그를 목격했지만, 그는 겨울 짐승처럼 보였다. 나는 비칠거리는 몸뚱이를 손잡이 하나에 기댄 채, 토사물을 오래 노려보아야 했다. 그는 남쪽과 서쪽의 중간 즈음, 목표지를 정확하게 가늠했다. 예측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버스 기사가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뉴스는 중요한 소식을 아무도 모른다는 듯이 호들갑이다. 그는 주파수를 맞춰 동료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오른편에는 얼어버린 한강이, 왼편에는 지저분한 도로가 누워 있다. 나는 부러웠다. 왼쪽 가슴팍엔 붉은 심장이,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날을 세웠다. 그는 무서웠다. 결과는 중력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서울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가 정체라고 라디오는 전한다. 야전 지도는 서울의 서쪽 어딘가로 그를 이끈다. 우린 늦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다.
자유로는 광명과 자유를 주고, 자유로는 출근과 퇴근을 주며……
-「자유로」 부분
사람이 죽는 일은 거대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잠자코 앉거나 서서, 각자의 도착지를 생각할 것이다. [……] 사방이 어두운 역, 전철은 대체 여기서 왜 멈추는 것일까. 지축역 지난다. 상주의 표정은 전철에서 빈자리를 찾는 것처럼 조급하면서 평온했다. 사람이 죽었지만 거대한 일은 아니다. 지축역을 묵묵히 지나는 우리에게는 다발로 묶인 시신도 그다지 큰일은 아닐 것이다. [……] 지축역에서 모두가 작은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각자의 휴대폰을 본다. 날마다 죽는 사람은 분명히 있고, 이유를 물을 경황 없이 다음 역이 온다. [……] 슬픔을 자랑하지 않으려 흔들리는 지축을 붙잡은 노인과 내가 노약자석 앞에서 잠시 겹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제 갈 길을 간다. 지축역 지난다. 별일 없었다.
-「지축역」 부분
“문학은 반성을 토대로 지속될 것이다”
-반성과 망각의 틈에서
서효인은 몇 년 전 출간한 에세이의 프로필을 이렇게 꾸렸다. 시와 문학, “세상을 구원할 힘이 그들에게는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세상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어쩌면 구원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간격에서, 반성과 망각의 틈에서”(뒤표지 글), 서효인은 싸움꾼이 아닌 관찰자로서 오늘의 시를 쓴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배는 세상에 두들겨 맞아 푸르다”(「친구를 찾아서」). “세상은 원래부터 숨을 곳이 없게끔 만들어졌고, 우리는 설계자를 궁금해할 권리가 없다”(「안성」). “거대함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거대하다고 하니 우리는 두려워하기로 결정했다”(「북항」). 언제인지 모를 처음, “그때부터 우리는 최대한의 보폭으로 살아왔고 여기에 이르렀다”(「이태원」). 변함없이 “사나운 시절”은 이어진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끝난 적이 없다”(「송정리역」). “끝나지 않을 훈련의 나날”(「파편을 찾아서」), “죽기 직전의 상태로 오래 살 것 같다는 예감”(「강화」) 속에서 오늘도 “눈을 뜬다. 눈을 감으면 죽을 것 같아 부릅뜨고 지켜온 시간이 있다”(「익산」).
시절은 쉽게 호전되지 않을 것이다. 단기전에서 장기전으로 돌입한 지금, 솟구치는 분노를 대체한 생활인의 우울은 반성을 만나 특별해진다. ‘심상지리지’ 『여수』를 닫는 시는 「죄인의 사랑」이다. 장소를 제목으로 삼지 않았고, 사적 기억과 공적 역사의 교차에서 슬쩍 비껴나 있는 이 시에서 ‘반성’이란 시어는 여러 차례 반복된다. “죄인은 반성한다/반성을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하”다.
서효인에게 반성은 방패가 아닌 창이다.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던 김수영의 시 제목이 「절망」이었다면 서효인은 반성으로써 어렵게 희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굴뚝을 지나쳐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길이 나타나”(「여수」)듯이, 한때 “반성을 모르는 굴뚝”이었던 그의 문학은 “반성을 토대로 지속될 것이다”(뒤표지 글).
시인의 글
여수는 처가가 있는 도시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밤의 바다보다는 낮의 굴뚝이 더 인상적인 도시였다. 화학 공장의 성기들은 반성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회백색 매연이 쉬지 않고 도시의 하늘을 덮어 가렸다.
나는 반성을 모르는 굴뚝이었다. 솟구치다 사라질 연기를 위해 반성을 모르고 살았다. 나는 남성 시인이고 이성애자며 판정받은 장애가 없다. 돈 안 되는 시를 쓴다며 이른바 예술 한답시고 인중에 힘깨나 주고 지냈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사회적 오른손잡이로서 불편함과 마주해 악수하지 않았다. 내가 겪지 못한 불편은 누군가에게 불쾌와 상처, 고통과 폭력이었다. 문단이라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그런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문학은 반성을 토대로 지속될 것이다. 수년간 발표한 시를 모으니 그때는 몰랐던 여성혐오가 지금은 보여 빼거나 고친 시가 몇 있다.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부분이다.
여수의 굴뚝을 얼마간 지나치면 장인의 묘가 나타난다. 꽤 높은 둔덕이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공장들 너머 드디어 바다가 보인다. 두 번 절을 하는 동안 딸아이가 묘와 묘 사이를 뛰어다닌다. 삶과 죽음의 간격에서, 반성과 망각의 틈에서 감히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는다.
문학의 이름을 빌려 자행되는 모든 위계와 차별 그리고 폭력에 반대합니다.
시인의 말
끝이라 생각한
거리에서
2017년 2월
서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