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변함없는 한국시의 전위, 오규원의 첫 시집, 46년 만에 복간!
한국 현대 시사에서 시적 방법론에 대한 가장 첨예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시의 언어와 구조’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탐구했던 시인 오규원(1941~2007). 10권의 시집과 4권의 시론집 ? 시 창작이론서를 비롯한 30여 권의 저서를 통해 언어로써 세계의 구조를 갱신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마와 싸우는 내내 시적 언어가 가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투명성을 보여주었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나 강화도 전등사 소나무 아래에 잠든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오규원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 속 시와 언어의 존재론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누구보다 앞서 던지며, ‘이념’과 ‘관념’, ‘주관’과 ‘감상’에 경사되어온 한국 현대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본격적으로 진행시킨 장본인이다. 전통적인 시의 문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적 경향을 모색하는 데 전념했던 그의 첨예한 시론은 ‘관념의 구상화’-‘관념의 해체/해방’-‘현상 읽기’-‘날이미지’라는 미학적 입장으로 나아가며 그를 한결같은 한국 현대시의 전위로 있게 했다. 그의 ‘시론’으로서의 이론적 가치뿐만 아니라 시 창작 교육의 교본으로 익숙한 『현대시작법』(1990)은 실제 습작에 대한 사례 분석과 시적 언술에 대한 실질적인 분석으로 개념적인 시론의 한계를 돌파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20여 년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몸담으며 유수의 많은 제자 작가, 시인들을 길러낸 훌륭한 선생이기도 했던 그의 10주기를 맞아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을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의 열한번째 시집으로 다시 펴낸다. 초판이 발행된 지 46년 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은 『분명한 사건』 읽기는 오규원의 시적 존재가 여전한 현재형으로 살아 숨 쉬는 기억과 호명의 자리에서, 평생에 걸쳐 언어를 대상이나 수단이 아닌 실존의 문제로 여겼던 시인의 언어 탐구의 발원지로 되짚어가는 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서쪽 숲의 나무들
길
분명한 사건
정든 땅 언덕 위
현상실험(別章)
무서운 사건
현황 B
그 마을의 주소
그 이튿날
꽃이 웃는 집
무서운 계절
들판
맹물과 김씨
육체의 마을
사내와 사과
2부
삼월
현상실험
밝은 밤
서쪽 마을
아침
대낮
사랑 이야기
포도 덩굴
인식의 마을
루빈스타인의 초상화
주인의 얼굴
즉흥곡
몇 개의 현상
雨季의 시
겨울 나그네
발문|
오규원에게 보내는 뒤늦은 감사와 송구_김병익
저자
오규원
출판사리뷰
‘분명한 사건’, 오규원의 시의 시원(始原)에 닿는 시간
오규원은 1965년 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로 1회 추천을 받고, 1967년 「우계(雨季)의 시」로 2회 추천을 거쳐, 1968년 10월에 「몇 개의 현상」으로 3회 완료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분명한 사건』(초판 1971, 한림출판사)은 등단한 해를 전후로 7년간(1964~1971) 쓴 시들에서 30편을 추려 묶은 그의 첫 시집이다. 첫 시집이 나온 그해는 시인의 연대기에서 전기로 기록될 만한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다. “불화와 궁핍의 근원”이었던 부친의 죽음과 마주해야 했고, 법대 졸업 후 다니던 출판사 편집부를 떠나 노골적인 자본주의의 대표적 현장이랄 수 있는 대기업 홍보실로 근무처를 옮겼다. 1970~71년에 걸쳐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작품을 재수록하면서 김현 ? 김병익 등 문지 그룹과 교우를 맺기 시작했고, 쌍문동에서 개봉동 근처로 거주지를 옮기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에 앞서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한 직후 부산 사상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듬해 동아대 법학과 전공을 시작한 행보는(1961~1968) 그에게 “말의 효용성, 추상성, 구속력 등등”을 체험하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삶의 터전과 내면의 변전이 한데 일어나던 무렵에 나온 『분명한 사건』은 이후 장시 「김씨의 마을」이나 「순례」 연작을 완성하기 이전, 등단 초기부터 계속된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시인의 고민을 오롯이 담고 있다. 시인 스스로, 1968년 가을에 시작해 이듬해 봄에 완성한 시 「현상실험」을 예로 들며 언어 또는 표현의 불명확성과 애매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고백하고 있다.
“언어는 추억에/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망명 정부의 청사처럼/텅 빈/상상”이며 “가끔 울리는/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이라고 작품에서 말하고 있듯, 여기에서의 언어들은 낡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움과 나름대로의 권위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저는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을 믿으면서도 현실의 언어 또는 ‘나’의 언어는 낡았음을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실하게 읽힙니다. 언어의 힘과 아름다움을 믿고 있었다는 흔적은 ‘모자’라든가 ‘정부’라든가 ‘외교관’이라든가 하는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장시 「김씨의 마을」이 씌어졌으며,”―「대담|언어 탐구의 궤적: 오규원/이광호」(『오규원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2002)
「몇 개의 현상」, 「정든 땅 언덕 위」, 「분명한 사건」, 「현황 B」 등 시집 『분명한 사건』에 수록된 시들과 장시 「김씨의 마을」을 쓰던 이 무렵의 시 쓰기를 그는 이상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스스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가 『분명한 사건』을 쓸 무렵에는 그의 의식은 비교적 순수했어요. 언어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고나 할까, 혹은 시에 대한 인식이 그랬다고나 할까요. 하나 대상을 명확히 묘사하려고 할 때 언어는 항상 대상의 편이 되어 그로부터 멀어져갔지요. 결국 그는 자신이 틈입할 수 있는 글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분명한 사건』의 언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한해서는 그의 편이었지만, 그 자신의 삶을 표백시키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를 배반하고 있었지요.” (『길 밖의 세상』, 나남, 1987, p.288; 『오규원 깊이 읽기』 p.50 재인용)
이러한 반성은 이후의 시들에 삶의 현장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단서로 읽힌다. 1970년대 관념성이 짙던 그의 시세계는 점차 관념이 구체적인 사회적 내용을 갖추면서 시의 산문화 경향으로 이어지는 등 새로운 한국 시의 해체를 맞게 된다. 작품에 거주지가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 한 요인이다. “투명한 심상의 세계를 다룬 시들은 세계는 분명해지는데 개인(시인)의 삶이 표백된다”는 오규원의 저 반성은 이후 「순례」 연작시들로 나아가고, 현실과 사물의 현상을 주목하는 시학적 탐구를 거치며(『사랑의 감옥』), 오랜 관념과의 싸움 끝에 ‘날이미지시’라는 극점에 다다른다(『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두두』).
이번 복간 시집에는 35년간 그와 문우로 지낸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발문 「오규원에게 보내는 뒤늦은 감사와 송구」가 함께한다. 군사정권의 개발 독재와 유사 자본주의가 개인과 사회 모두를 강압하던 40년 전으로 기억을 되감는 이 글에서 김병익은, 잡지 간행이 녹록지 않던 시절, 당시 태평양화학 홍보실에서 일하던 오규원이 경제적으로 문지에 도움을 준 사연을 비롯해, 40여 년을 이어 오는 문지시인선의 디자인 장정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6),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8) 등의 표지를 오규원이 직접 맡게 된 일화와 추억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그의 극도의 정밀성을 근접촬영 수법으로 획득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개념화한 ‘날이미지’의 시들”에는, “오직 투명한 시선과 거기에 포착된 사물의 순수한 형상과의 직절한 교호만이 존재했다. 그 극도의 객관성을 통해 역으로 그는 이 세상의 유정(有情)한 공감을 감염시키고 있는 것이었다”는 비평적 시선으로 옮겨간다. 생명의 소진에 다가선 오규원과의 영원한 작별을 돌아보는 자리를 “말 없는 우정”으로, 다시 “분명한 사건”으로 복원해내는 글 말미의 소회는 깊은 감동을 전한다.
1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 많은 말발굽쇠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가
망명정부의 청사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이다.
2
빈 하늘에 걸려
클래식하게 서걱서걱하는 겨울.
음과 절이 뚝뚝 끊어진
시간을
아이들은
공처럼 굴린다.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추상의
위험한 가지에서
흔들리는, 흔들리는 사랑의
방울 소리다.
3
언어는, 의식의
먼 강변에서
출렁이는 물결 소리로
차츰 확대되는
공간이다.
출렁이는 만큼 설레는,
설레는 강물이다.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광장에는 나무들이
외롭기 알맞게 떨어져
서 있다.
-「현상실험」 전문
인식의 마을은 회리바람이더라 흔들리는 언어들이더라
무장한 나무들이더라
공장에선 석탄들이 결사적이더라
인식의 마을은 겨울이더라 강설이더라
바람이 동상에 걸린 가지를 자르더라
싸늘한 싸늘한 적설기더라 밤이더라
-「인식의 마을」 전문
1
그 마을의 주소는 햇빛 속이다
바람뿐인 빈 들을 부둥켜안고
허우적거리다가
사지가 비틀린 햇빛의 통증이
길마다 널려 있는
논밭 사이다
반쯤 타다가 남은 옷을 걸치고
나무들이 멍청히 서서
눈만 떴다 감았다 하는
언덕에서
뜨거운 이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소름 끼치는, 소름 끼치는 울음을 우는
햇빛 속이다
2
행정구역이 개편된
그 마을의 주소는 허공중이다
목마른 잎사귀들의 잔기침 사이로
종일 어수선한 하늘 속이다
갈 곳 없는 목소리들은 나뭇가지에
모여 앉아
편애의 그물을 짜고 그 위에서 나른한 잠을 즐기던 유령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죽는
편입된 하늘의 일대다
-「그 마을의 주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