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유한한 존재들의 ‘홀로운’ 삶,
그 사소하고 보편적인 생의 감각
“맨삶을 노래하자!”
황동규 시인의 열여섯번째 시집 『연옥의 봄』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지난 58년간 존재와 예술, 세계를 향해 질문하는 절실하고 독한 시 창작 여정을 계속해왔다. 미당문학상·대산문학상·호암상 등 국내 굴지의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인 사랑 노래”로 꼽히는 「즐거운 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 등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한국 현대 대표 시인 중 한 명이 황동규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연옥의 봄」 연작 네 편을 포함한 총 77편의 시가 묶였다. 직전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꺼져가는 삶도 생명의 진행 과정에 있음을, 살아 있는 한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아픔의 환한 맛”을 달게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삶의 숭고를 표현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일상적인 부재와 소멸의 ‘사소함’을 생의 일부로 수용하고,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기다림의 자세에 대한 생각’을 심화해간다. 미완을 스스럼없이 긍정하며, 시 안에 살아 숨 쉬는 인간과 삶의 미묘한 섬광을 담아내고자 꾸준히 들여다보고 사유해나가는 시인 황동규의 열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천남성 열매
그믐밤
시계청소(視界淸掃)
앤절라 휴잇의 파르티타
이 환한 저녁
살 것 같다
열대야 백리향
천남성 열매
안 보이던 바닥
외등(外燈) 불빛 속 석류나무
몸이 말한다
참아야 살 수 있는 곳
햇빛에 놀란 무지개 춤
간월암 가는 길
명품 테킬라 한잔
파계사 대비암(大悲庵)
팔공산 황태
새처럼 노래하자
세상의 끝
오체투지(五體投地)
제2부 발
저 꽃
발
아픔의 부케
서교동에서
춤추는 은하
마지막 날 1
마지막 날 2
견딜 만해?
아랫동네 산책
봄은 역시 봄
젊은 시인에게
살다가 어쩌다
그때 그 고민
겨울날 오후 4시, 뻥 뚫린
꿈
마음보다 눈을
사는 노릇?
달 없는 달밤
잔물결들
섬쥐똥나무들의 혼
제3부 나폴리 민요
쌍(雙)별
나폴리 민요
풍경의 풍경
폴 루이스의 슈베르트를 들으며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미래 더듬기
일 없는 날
함백산
나의 동사(動詞)들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
반짝이고 만 시간 조각들
귀가(歸家)
강원랜드 버스 터미널에서
삶의 본때
무릎
성자(聖者)의 설교
이즘 새들
양평에 가서
옛 안경 끼고 운전하기
정화(淨化)된 탑
제4부 연옥의 봄
북촌
바가텔(Bagatelle)
미소
초행길 빈을 뜨며
마지막 시신경
꽃 피는 사막
봄비
초원이 초원을 떠나네
이 세상에서
황사(黃砂) 속에서
들리지 않는 신음 소리
지금 이 가을, 고맙다
늦가을에
별사(別辭)
연옥의 봄 1
연옥의 봄 2
연옥의 봄 3
연옥의 봄 4
해설 - 연옥의 봄에는 눈이 내린다 / 김수이
저자
황동규
출판사리뷰
유한한 존재들의 ‘홀로운’ 삶,
그 사소하고 보편적인 생의 감각
“맨삶을 노래하자!”
상처 많은 삶이라도
애써 별일 아닌 듯 상처들을 살다 가게 했다.
이젠 내보일 만한 상처 하나 흠집 하나 남아 있지 않다고?
두 손으로 무릎을 탁 치게.
-「무릎」 부분
황동규 시인의 열여섯번째 시집 『연옥의 봄』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지난 58년간 존재와 예술, 세계를 향해 질문하는 절실하고 독한 시 창작 여정을 계속해왔다. 미당문학상·대산문학상·호암상 등 국내 굴지의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인 사랑 노래”로 꼽히는 「즐거운 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 등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한국 현대 대표 시인 중 한 명이 황동규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연옥의 봄」 연작 네 편을 포함한 총 77편의 시가 묶였다. 직전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꺼져가는 삶도 생명의 진행 과정에 있음을, 살아 있는 한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아픔의 환한 맛”을 달게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삶의 숭고를 표현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일상적인 부재와 소멸의 ‘사소함’을 생의 일부로 수용하고,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기다림의 자세에 대한 생각’을 심화해간다. 미완을 스스럼없이 긍정하며, 시 안에 살아 숨 쉬는 인간과 삶의 미묘한 섬광을 담아내고자 꾸준히 들여다보고 사유해나가는 시인 황동규의 열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짜릿함”에 이르는 경지, 텅 빈 감각의 카타르시스
잔눈 맞고 밟으며 왔다.
어느 결에 눈이 그치고
달도 별도 없는 바닷가
파도도 물소리도 없다.
먼 데서 울던 밤새 소리도 없다.
어둠 속에서 혼자 불빛 비추고 있는 등대
나무 몇만 사는 조그만 섬도 길 잃은 배도 없는
수평선마저 없는 바다를 천천히 훑고 있다.
더 없는 것은 없냐? 반복해 훑고 있다.
가만, 마음에 모여 있던 생각들 다 어디 갔지,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순간 가슴 한끝이 짜릿해진다.
이 짜릿함 마음의 어느 함에 넣을까?
-「바가텔(Bagatelle)」 전문
눈이 그친 밤 바닷가, 달도 별도, 물소리도 새소리도 없는 이곳은 “없는 것”들의 세상이다. 수평선마저 없는 바다 멀리 어둠 속에서 혼자 빛나고 있는 등대만 오롯하다. “더 없는 것은 없냐?”는 시인의 물음은 현재의 ‘나’의 실존이 “없는 것들”(부재)에 의해 지탱되는 역설을 피력하며, 문득 심중의 생각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마음에 모여 있던 생각들”이 사라졌음을 깨닫는 순간의 “짜릿함”, 이 ‘텅 빈 감각의 카타르시스’는 존재를 유지하고 운동하게 하는 부재라는 근본 조건에 대한 이해를 관통한다. 여기서, 이 시의 제목 “바가텔bagatelle”이 ‘하찮은 것, 사소한 일’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이 ‘사소함’의 기표를 이렇게 분석한다.
황동규는 없음과 사라짐 앞에서 안타까움과 슬픔 등의 감정적 반응에 충실하지도, 의미 부여의 가공 작업에 매진하지도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감정과 물음들을 보존하면서도, 없음과 사라짐 자체를 향유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에 몰두한다. 그가 부재와 소멸을 존재가 수시로 겪는 바가텔로 명명한 것은 그것이 정말 사소해서가 아니라, 사소함의 빈도로 부재와 소멸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유한한 존재의 필연적이며 불가역적인 삶의 원리이기 때문이다.(해설 「연옥의 봄에 눈이 내린다」, pp. 164)
꿈이 멈추는 곳을 대하는 여유, 여전한 유머감각
지평선인가 수평선인가 그냥 가로금인가
위아래 검붉은 색채 속으로 번져 지워지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언젠가 나와 친구들이 가로금처럼 걷다가
하나가 된 검붉은 땅 검붉은 하늘로 스며들어가
하나가 되리라는 이 느낌!
흉치만은 않으이.
-「서교동에서」 부분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은 채 갈 거다.
마음 데리고 다닌 세상 곳곳에 널어뒀던 추억들
생각나는 대로 거둬 들고 갈 거다.
개펄에서 결사적으로 손가락에 매달렸던 게,
그 조그맣고 예리했던 아픔 되살려 갖고 갈 거다.
[……]
피곤한 아스팔트 같은 삶의 피부에 비천상(飛天像) 하나 새기다
퍼뜩 정신 들어 손 털고 일어나 갈 거다.
-「연옥의 봄 4」 부분
이제 무거운 추 떨어졌으니 홀가분해진 서부영화의 늙은 악한처럼
총알구멍 뚫린 맥주통 문 앞에 세워논 살롱 앞에서 얼씬대다
엉뚱한 총탄에 맞더라도
회한 같은 것 없이 환히 비틀거리거나
맥주통에 두 손 얹은 채 생뚱맞게 서 있을 거다.
-「살 것 같다」 부분
뒤표지 글에서 죽음을 “꿈이 없는 곳”으로 선언하며 끝마치듯, 『연옥의 봄』의 시편들은 하나하나 황동규가 삶과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생각들은 초월적인 지향이 아닌 소박하고 천진무구한 인간적 감각과 행위의 산물이다. 시인은 짧은 실존과 덧없는 소멸에 연연하지 않고 절대 고요의 순간에 도달하며, 이를 ‘황혼의 지평선’이나 ‘게가 물었던 조그맣고 예리했던 아픔’ 같은 평소 일상 감각으로 구체화한다. 또한 “엉뚱한 총탄에 맞”은 “늙은 악한”이나 “휴대폰을 넣은 채 갈 거다”라는 다소 위트 있는 표현들은 언젠가 꿈이 멈추는 곳에 가닿을 운명을 생의 의미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인의 여유를 보여준다.
사라진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무엇이 건드려졌지? 창밖에 달려 있는 잎새들의 낌새에
간신히 귀 붙이고 있던 마음의 밑동이 빠지고
등뼈 느낌으로 마음에 박혀 있던 삶의 본때가
몸 숨기다 들킨 짐승 소리를 낸다.
한창 때 원고와 편지를 몽땅 난로에 집어넣고 태운
외로움과 구별 안 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렸을 때 나온 소리,
‘구별 안 될 땐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친다!’
몸에 불이 댕겨진 글씨들이 난로 속을 뛰어다니다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
-「삶의 본때」 부분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가 모든 존재가 공들여 이룩한 삶의 결실이라는 것. 이번 시집에서 황동규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의 평생의 시 작업을 일목요연하게 압축한다. 황동규의 고유어 “홀로움”이 단독자로서의 능동적인 향유, 즉 홀로의 존재를 황홀하고도 적막하게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뜻하듯, 탄생과 소멸의 공통 운명을 지닌 존재들 각각은 빛나는 개별자의 가치로 빛나고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 그칠” 눈 내리는 밤이더라도, 시인은 언제까지나 시를 써갈 것이다.
시인의 말
호기심처럼 삶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없다.
살아 있다는 표지다.
앞으로도 마른 데 진 데 가리지 않고 두근거리겠다.
2016년 가을
황동규
시집 소개
“내 사랑이 그칠 것”을 두려워하지도 막으려 하지도 않았던 1958년의 황동규는 이제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기다림의 자세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각자 흩날리는 눈송이이면서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두고 함께 내리고 그치는 눈인 우리는 이제 사랑이 그친 것이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안다. 부재하는 사랑도, 조금씩 소멸하는 삶도 날마다 그 없음과 사라짐을 통해 아프고도 “흥”겹게 지속되는 것임을, 수많은 부재와 소멸의 바가텔이 쌓여 이룩하는 ‘텅 빔’과 ‘텅 빔’에 대한 감각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누려야 할 ‘사는 기쁨’임을 비로소 이해한다. (문학평론가 김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