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는 게, 재앙 같아”
악몽보다 지독하고 공포영화보다 참혹한
일상의 뚜렷한 균열, 발밑의 지옥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수경 작가의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이 출간되었다. 지난 10년간 SBS라디오 작가로도 꾸준히 활동해온 조수경은 그간 발표한 소설들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력한 서사를 구사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며, 인간 사회의 어둡고 추한 민얼굴에 주목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성인용품 판매점에서 일하는 고독한 장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등단작 「젤리피시」는 “단순한 유행 감각의 소산이 아니다.
이 작가는 인간의 깊은 내부 세계를 들여다보는 안목을 갖추었다. 또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묘사 능력도 탁월했다”(문학평론가 방민호·소설가 성석제)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모두가 조금씩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면면, 그 안에 도사린 등골 서늘한 균열들에 집중한다.
목차
유리
마르첼리노, 마리안느
젤리피시
떨어지다
할로윈-런, 런, 런
사슬
지느러미
오아시스
해설 “앞으로도 네 소설 잘 지켜볼게”_김형중
작가의 말
저자
조수경
출판사리뷰
몸도, 마음도 조금씩 부서진 사람들의 도시
잠결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그것이 그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녀는 내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두 팔을 치켜든 채로. 단단하게 모아 쥔 두 손에는 과도가 들려 있었고 칼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심장에 칼날 대신 눈물이 내리꽂혔다. [……] 오직 나만이 그녀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 그렇게 몇 년을 더 보내고 난 뒤에야 나는 그녀가 불행 안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오아시스」, pp. 216~17)
도시는 말끔하고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찬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지만, 한편으론 그 허상에 의해 자기 삶에서조차 주변화되어버린, 흠 많고 길 잃은 사람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모두가 부서진』의 수록작 여덟 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또한 각자의 부서짐을 치열하게 경험해간다. 이는 하반신 마비(「젤리피시」)처럼 눈에 보이는 장애에서부터, 눈앞에 직면한 이혼(「유리」), 아버지의 외도에서 기인한 강박적 순결 콤플렉스(「마르첼리노, 마리안느」), 부모에게 버려진 뒤 방향을 잃어버린 청춘(「떨어지다」), 거짓으로 유지된 연인 관계의 파경(「할로윈―런, 런, 런」), 임신 문제를 둘러싼 고부 갈등(「지느러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누구나 하나쯤 자기 몫으로 가지고 있을 법한, 누구나 피하려 하지만 아무도 비껴갈 수 없는 각자의 불행을 작가는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악몽과 현실이 혼재된 일상
여느 여고생들처럼 명랑하던 소녀가 침묵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한 여자가 전동차로 뛰어드는 모습을 목격한 뒤부터였다. 그 일은 마리안느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던 여자가 검은 보디백에 담겨 플랫폼으로 옮겨지기까지 마리안느는 의자에 굳은 듯 앉아 있었다. 시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수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걸 보면 여자의 몸은 부서지고, 찢기고, 으깨진 채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분명했다.
(「마르첼리노, 마리안느」, p. 47)
살인마 수한은 꿈속에서의 수한.
현실에서의 수한은 착하고 다정한 사람.
꿈은 가짜. 현실은 진짜.
무엇이 진짜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몇 달간 계속 이어지는 꿈 때문에 이제 나는 정말로 수한이 두려웠다. 처음엔 가짜라는 걸 알고도 무서운 정도였지만, 점차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 요즘에는 이불 속에 망치를 숨겨두고 그것을 한 손에 꼭 쥐어야만 간신히 잠이 들 정도였다. 오랜 불면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할로윈―런, 런, 런」, p. 143)
사소한 균열은 점차 뚜렷한 붕괴가 되고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일상을 망가뜨린다. 결말에 이르러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기괴하고 뒤틀린 면모를 마주하게 한다는 점은 조수경 소설의 특장이다. 특히 작가는 소설 도입부에 종종 꿈을 배치함으로써 이 불쾌한 진실을 고지하곤 하는데, 일반적인 도피처로서의 꿈이 아닌 지독한 악몽을 통해 어떤 각성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할로윈―런, 런, 런」의 거짓으로 유지되었던 기나긴 연인 관계가 이미 끝나버렸음을, 나아가 이들의 관계가 서로 먹고 먹히는 좀비들의 관계만큼이나 적대적임을 보여준다.
한편, 「마르첼리노, 마리안느」의 마르첼리노가 꾸는 꿈은 마르안느와의 사랑이 오로지 쾌락에만 골몰한 불륜일 뿐임을, 그 죄를 알면서도 늘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있음을 스스로 알게 한다. “조수경의 인물들은 꿈들이 고지하는 진실을 부인함으로써 가까스로 현실의 삶을 유지한다. 혹은 불쾌하게도 현실의 삶이 실은 살 만한 것으로 ‘상상’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꾸 알려주려 애쓰는 꿈과 사투를 벌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김형중, 해설 「“앞으로도 네 소설 잘 지켜볼게”).
지옥을 버티는 저마다의 방식
여자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면을 찾아 방바닥 한가운데에 잡지를 펼쳐놓았다. 그 아래에 실리콘 가슴을 가져다 놓았다. 다시 포르노 스타의 토막 난 은밀한 부위, 그리고 여자의 다리를 본뜬 쿠션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나는 내가 창조해낸 여자 옆에 나란히 누웠다.
카리브 해의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여자와 나는 백사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분홍빛 파도가 밀려와 여자와 내 몸을 적신다. 여자의 분절된 몸이 하나로 이어진다. 여자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전라의 아름다운 육신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여자는 춤을 추며 내게 다가온다. (「젤리피시」, p. 94)
조수경이 들여다보는 삶의 진실은 언뜻 망치로 짓이겨진 살점과 찢기고 끊어져버린 신체, 피가 낭자한 지하실에서 개가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마약에 취한 채 에이즈 보균자와 동침하는 죽음충동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혹은 왜곡된 욕망에 이끌려 약한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타인의 불행을 집요하게 캐내며 균열을 은폐해가는 방식으로만 생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악몽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누군가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이미 분절되어버린 몸을 다시 잇는 재생의 꿈을 꾸도록 한다. 모두 쉽게 눈감고 합리화함으로써 왜곡된 진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우리의 오늘에 각성의 안경을 건네줄, 조수경 소설의 첫걸음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