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장,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쉼보르스카 시의 정수를 담은 『끝과 시작』 개정판
폴란드 현대시는 “단절되고 오염된 언어의 정화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범하면서도 순수한 시의 세계로 잘 알려져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폴란드 현대시인에게 두 번이나(체스와프 미워시, 1980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1996) 노벨문학상을 선사함으로써 이에 대한 경의를 표한 바 있다.
그중 2007년에 한국에서 출간되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온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이 번역을 다듬어 다시 출간되었다. 옮긴이는 2016년, 쉼보르스카의 마지막 정규 시집 『여기』(2009)와 유고시집 『충분하다』(2012)를 엮어 한국어판을 출간하며 『끝과 시작』을 다시 검토하였고,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숙성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장을 매만져 개정판을 내놓았다.
쉼보르스카는 1945년 데뷔 이래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실존 철학과 접목한 시를 꾸준히 발표하면서 대시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1996년 여성으로서는 아홉번째, 여성 시인으로서는 세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쉼보르스카의 시에는 서양의 전통적인 사조나 미학 담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우주적 상상력이 투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성 중심적 논리와 인과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양 철학의 패러다임으로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관계론적 · 상생적 사유가 엿보인다. ‘혼돈’과 ‘해체’ 속에서 사유의 조화로운 동참을 권유하는 미의식은 쉼보르스카의 시학이 이룩한 가장 뛰어난 성과 중의 하나이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서구의 비평가들은 쉼보르스카의 시를 낯설고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새롭고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흔히 쉼보르스카의 시를 논할 때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연설문이 인용되곤 한다. 그만큼 쉼보르스카는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표현, 정곡을 찌르는 명징한 언어, 풍부한 상징과 은유, 적절한 우화와 패러독스 등을 동원하여 독자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완성도 높은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 역사와 문학에 대한 고찰이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철학적 명상을 담은,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쉼보르스카의 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 총 28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시선집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자선(自選) 시집Wiersze wybrane』(2000)과 『순간Chwila』(2002), 『콜론Dwukropek』(2005)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옮긴이가 엄선한 주요 시 170편을 수록하고 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자선 시집』은 시인의 첫 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1952)에서부터 『끝과 시작』(1993)에 이르기까지 총 9권의 시집과 기타 미공개 작품들 가운데서 시인이 직접 선별한 184편의 주옥같은 시들이 수록된 책이다. 평생을 시 창작에만 바쳐온 시인이 자신의 외길 인생을 정리하듯 손수 작품을 고르고 다듬어 집대성한 자선 시집을 토대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출간한 『순간』과 『콜론』의 시들을 함께 엮은 시선집 『끝과 시작』은 1945년 등단작부터 2005년까지 60여 년에 걸친 시인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쉼보르스카 문학의 정수(精髓)라고 말할 수 있다.
목차
출판되지 않은 시들 가운데서(1945)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 단어를 찾아서 | 극장 문을 나서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Dlatego ?yjemy(1952)
진부한 운율 속에서 | 서커스의 동물들
나에게 던진 질문Pytania zadawane sobie(1954)
나에게 던진 질문 23 | 열쇠 25
예티를 향한 부름Wołanie do Yeti(1957)
밤 | 두 번은 없다 | 공개 | 어릿광대 | 사소한 공지 사항 | 루드비카 바브쥔스카 부인을 애도하는 일 분간의 묵념 | 명예 회복 | 친구들에게 | ***꾸물대며 흐르는 역사는 | 아직은 |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 성공하지 못한 히말라야 원정에 대한 기록 | 시도 | 새벽 네 시 | 아틀란티스
소금S?l(1962)
원숭이 | 박물관 | 트로이에서의 한순간 | 그림자 | 외국어 낱말 | 방랑의 엘레지 | 무제 | 뜻밖의 만남 | 금혼식 |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 | 우화 | 발라드 | 포도주를 마시며 | 루벤스의 여인들 | 미남 선발 대회 | ***난 너무 가까이 있다 | 바벨탑에서 | 꿈 | 물 | 개요 |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 찬양의 노래 | 메모 | 돌과의 대화
애물단지Sto pociech(1967)
쓰는 즐거움 | 풍경 | 사진첩 | 웃음 | 기차역 | 살아 있는 자 | 태어난 자 | 인구 조사 | 참수(斬首) | 피에타 | 결백 | 베트남 | 호텔에서 끼적인 구절들 | 1960년대 영화 | 병원에서 작성한 보고서 | 철새들의 귀환 | 안경원숭이 | 일요일에 심장에게 | 곡예사 | 다산을 기원하는 구석기 시대의 페티시즘 상징물 | 동굴 | 애물단지
만일의 경우Wszelki wypadek(1972)
만일의 경우 |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 실수 | 연극에서 받은 감상 | 양로원에서 | 광고 | 귀환 | 발견 | 공룡의 뼈 | 추적 |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 경이로움 | 생일 |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빠르게 그러나 적당히 | 자기 절단 | 부동자세 | 꿈에 대한 찬사 | 행복한 사랑 | ***‘무(無)’의 의미는…… | 한 개의 작은 별 아래서
거대한 숫자Wielka liczba(1976)
거대한 숫자 | 감사 | 시편(詩篇) | 롯의 부인 |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 실험 | 미소 | 테러리스트, 그가 주시하고 있다 | 중세 시대 세밀화 |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 여인의 초상 | 쓰지 않은 시에 대한 검열 | 경고 | 양파 | 자살한 사람의 방 | 자아비판에 대한 찬사 | 인생이란…… 기다림 | 스틱스 강변에서 | 유토피아
다리 위의 사람들Ludzie na mo?cie(1986)
무대 공포증 | 과잉 | 고고학 |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 과장 없이 죽음에 관하여 | 우리 조상들의 짧은 생애 | 히틀러의 첫번째 사진 |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 시대의 아이들 | 고문 | 죽은 자들과의 모의 | 이력서 쓰기 | 장례식 | 포르노 문제에 관한 발언 | 노아의 방주 속으로 | 선택의 가능성 | 기적을 파는 시장 | 다리 위의 사람들
끝과 시작Koniec i pocz?tek(1993)
하늘 | 제목이 없을 수도 |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 끝과 시작 | 증오 | 현실이 요구한다 | 현실 | 빈 아파트의 고양이 | 풍경과의 이별 | 강신술 | 첫눈에 반한 사랑 | 1973년 5월 16일 |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 슬랩스틱 코미디 | 공짜는 없다 | 사건들에 관한 해석 제1안 | 이것은 커다란 행운
순간Chwila(2002)
순간 | 무리 속에서 | 구름 | 부정 | 수화기 | 가장 이상한 세 단어 | 식물들의 침묵 | 어린 여자아이가 식탁보를 잡아당긴다 | 추억 한 토막 | 웅덩이 | 첫사랑 | 영혼에 관한 몇 마디 | 이른 시간 | 통계에 관한 기고문 | 9월 11일 자 사진 | 되돌아온 수하물 | 목록 | 모든 것
콜론Dwukropek(2005)
부재 | ABC |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노교수 | 관망(觀望) | 맹인들의 호의 | 사건에 휘말린 어느 개의 독백 | 시인의 끔찍한 악몽 | 그리스 조각상 | 사실상 모든 시에는
옮긴이 주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_ 시인과 세계
옮긴이 해설 _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心眼)을 가진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생애와 시 세계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저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은이), 최성은 (옮긴이)
출판사리뷰
쉼보르스카의 시 세계
쉼보르스카는 과작(寡作)의 작가로 유명하다. 등단 후 세상을 뜨기까지 약 70년간 정규 시집 12권과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남겼을 뿐이다. “한 편의 시를 봄에 쓰기 시작해서 가을에 가서야 완성하는 경우도 많다”는 고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한 편 한 편 심혈을 기울여 탁월한 문학성이 돋보이는 시를 완성했다. 특히 명징한 시어의 선택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쉽고 단순한 시어로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언어 감각은 정평이 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시인의 대표작 「두 번은 없다」에서 잘 드러난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두 번은 없다」 부분
폴란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폴란드 전 국민이 애송하는 이 작품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시인의 명쾌한 자각을 드러내는 시다. 우리(인간)를,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꼭 닮았지만 알고 보면 분명히 다른 존재임이 분명한 두 개의 물방울에 비교하여 개개인이 고유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타인으로 대치될 수 없는 독자적인 개인의 실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렇듯 독자적이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개인의 실존을 강조하던 시인은 점차 개체로서의 고립된 실존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계로 사유의 범위를 확대한다. 그중에서도 복잡한 현대 문명사회 속에서 익명의 개인으로 버림받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생명체의 존재론적 위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쉼보르스카의 시에 등장하는 익명의 개인은 호명되어 의미 있는 하나의 실존적 개체로 살아난다.
그들은 불타는 계단에서 아래를 항해 뛰어내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몇 명에서
조금 더 많거나 아니면 적거나.
사진은 그들을 어떤 생에서 멈춰 세웠다.
대지를 향하고 있는 미지의 상공에서
그들의 현재를 온전히 포착했다.
[……]
내가 지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뿐.
그들의 수직 비행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거나,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보태지 않고 과감히 끝을 맺는 것.
-「9월 11일 자 사진」 부분
이 밖에도 쉼보르스카는 일상의 단면에 내재된 그로테스크한 순간을 포착해내고,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이율배반적인 욕망과 잔인한 본성을 비판했다.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향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체제와 문명의 폭력, 그리고 그 속에서 개체가 겪는 소통의 부재와 소외 현상 또한 쉼보르스카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끝과 시작」 부분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공손하게 대하며,
오랜만에 만나서 매우 기쁘다고 말한다.
[……]
문장을 잇다 말고 우리는 자꾸만 침묵에 빠진다.
무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인간들은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뜻밖의 만남」 부분
이와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쉼보르스카의 시가 많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현학적인 시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진솔한 언어로 삶의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인 특유의 전복적인 시선은 쉼보르스카 시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쉼보르스카는 이러한 시선을 바탕으로 시란 장르에서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고정관념들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 애절한 사랑도 결국엔 언젠가는 소멸되거나 변질되고 마는 순간적인 열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시 「사진첩」은 이에 대한 적절한 예이다.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로미오들은 결핵으로? 어쩌면 줄리엣들은 디프테리아로?
[……]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사진첩」 부분
또한 쉼보르스카의 시는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나 뛰어난 묘사력을 지닌 사진, 심지어 한 편의 짧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미지적이라는 점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큰 이유다.
혼자 남은 고양이가 이 텅 빈 아파트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으리.
벽을 타고 기어오르기.
가구들 사이에서 몸을 문지르기.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하지만
틀림없이 뭔가가 달라졌다.
아무것도 이동한 게 없는 듯하지만
틀림없이 뭔가가 움직였다.
어둠이 찾아와도 이제는 아무도 불을 밝히지 않는다.
-「빈 아파트의 고양이」 부분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천 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한 요즘이지만 쉼보르스카는 시인으로서 강한 자의식을 갖고 7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시를 썼다. 쉼보르스카는 「쓰는 즐거움」이란 시에서, 시의 세계 안에서는 자신의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할 수 있고, 자신의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한다며, “쓰는 즐거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쉼보르스카가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시를 좋아하는 그 “어떤 사람들” 모두에게 시를 ‘읽는 즐거움’을 주는 행운임에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
그러니까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 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좋아한다-
하지만 치킨 수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듯한 칭찬의 말이나 파란색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낡은 목도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좋아하거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시를 좋아한다는 것-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
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붙들고 있을 뿐.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전문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 중에서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마디의 말을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말에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 날개는 우리의 삶 자체를,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만들어줍니다. 만약 아이작 뉴턴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과가 그의 눈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그저 몸을 굽혀 열심히 주워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 스쿼도프스카 퀴리가 자신에게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월급을 받고 양갓집 규수들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했고, 결국 이 말이 그녀를 두 번씩이나 이 곳, 영혼의 안식을 거부한 채 영원히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노벨상’이라는 선물로 보답해주는 스톡홀름으로 인도했습니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이 작품 또한 일시적인 답변에 불과하며,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통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번 더,’ 또다시 ‘한 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고, 훗날 문학사가들은 어떤 시인이 남긴 계속되는 불만족의 징표들을 모두 모아 커다란 클립으로 철하고는 그것들을 가리켜 ‘시인이 일생 동안 쓴 작품’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