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벤야민이 재개하려고 했던 종말론 사무소란 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종말론 사무소를 긴급히 작동시켜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간주하는 ‘통치’만이 남은 시대,
다시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생각하다!
『말하는 입과 먹는 입』『제국일본의 사상』의 저자이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 카를 슈미트의 『정치신학』 등 다양한 책들을 번역?소개해온 연세대 국학연구원 김항 교수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조르조 아감벤, 발터 벤야민, 미셸 푸코, 카를 슈미트, 위르겐 하버마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 응답하거나 대립했던 위대한 사상가들 간의 논쟁을 교차시키며 분석한다. 그를 통해 근대 통치질서의 실체를 밝히고, 인간의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치환하여 통치의 대상으로 삼는 ‘오이코노미아-생명정치’의 패러다임에 맞서 인간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정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김항은 이러한 ‘정치’에 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할 장소로서, 아감벤이 『왕국과 영광』에서 “벤야민이 주저 없이 재개하려 했”다고 말한 ‘종말론 사무소eschatological bereau’에 주목한다. 종말론 사무소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일을 처리하는 곳인가? 그곳이 말 그대로 이 세계를 끝장내는 종말이란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종말을 반겨야 할까 막아야 할까? 김항이 지금 여기서, 오래전 벤야민이 재개했던 종말론 사무소를 긴급히 작동시키려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목차
프롤로그 밥풀때기와 개흘레꾼을 위한 레퀴엠
제1부 20세기 정치사상의 임계
1장 20세기의 보편주의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 ‘적’을 둘러싼 정치사상의 계보학
2장 전쟁의 정치, 비판의 공공성: 슈미트와 하버마스 사이에서
제2부 정치신학의 쟁점들
3장 ‘적의 소멸’과 정치신학: 칼 슈미트의 카데콘과 메시아
4장 신의 폭력과 지상의 행복: 발터 벤야민과 탈정치신학
제3부 파국 너머의 메시아니즘
5장 종말론 사무소의 일상 업무: 조르조 아감벤의 메시아니즘
6장 절대적 계몽, 혹은 무위의 인간: 아감벤 정치철학의 현재성
제4부 언어의 운명과 문학의 자리
7장 자연, 법, 그리고 문학: 발터 벤야민과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
8장 신화를 거스르는 문학의 언어: 발터 벤야민의 비평에 관하여
에필로그 종말론 사무소는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
참고문헌
색인
저자
김항
출판사리뷰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세계 정치의 과제”가 되었다_발터 벤야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유가 탄생한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와 교회는 왜 세계가 ‘창조’되어 ‘유지’되면서도 ‘파멸’되어 ‘구원’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사악한 ‘창조의 신’과 그의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구원의 신’을 대치시켜 현세를 부정하고 구세주의 새로운 세기를 갈망하게끔 한 그노시스의 사상에 맞서기에, 교회의 논리는 빈약했다. 따라서 교회는 창조신과 구세주가 동일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위격임을 설파하는 삼위일체설과 같은 다양한 논리를 구축하여 신의 지상 통치를 이론화하고 정당화해나갔다. 그에 따라 지상의 삶은 구원을 기다리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의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유의미한 시간으로 탈바꿈되고, 그러면서 종말과 구원의 ‘구체적’ 형상은 기독교 교리에서 말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낡은 신학과 형이상학이 과거의 유물로 치부되자, 종말의 임박이나 구원자의 임재 같은 상상력은 더욱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일변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초래한 파국 속에서 모종의 종말을 감지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슈미트는 종말에 즈음하여 가짜 구원을 설파하는 ‘적그리스도(마르크스주의, 진보를 약속하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등)’를 억제하는 자인 카테콘에 의존해서 이 종말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카테콘의 자리를 넓은 의미에서의 ‘법학’에 마련한다. 이는 기독교의 종말론 신앙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존하는 국가와 교회의 통치와 존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종말과 구원을 통해 끝이 나야 할 오이코노미아(아감벤은 근대 정치의 주요 범주들이 신학이 세속화된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가 출발부터 인간을 관리하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하는 오이코노미아 패러다임에 기반한 사유체계라는 것을 논증했다)는 영원히 지속된다.
“메시아적 종말이란 연대기적 시간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지상에서의 삶을 매 순간의 행위로 파악하고,
그 행위의 종말 혹은 완성과 관계시키는 실천과 사유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편에서, 창조주가 만든 세계를 파멸시키고 구세주의 새로운 세기를 갈망하는 마르키온(2세기의 급진적 그노시스주의자)적 사유가 부활한다. 벤야민을 필두로 하는 이 마르키온의 후예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파국을 개혁이나 개선으로 회복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무언가에 대한 기대 속에서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세계 정치의 과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왜 아감벤이 긴 시간을 가로질러 벤야민의 사유를 소환해왔는지 밝힌다. 벤야민의 재개하려 했던 ‘종말론 사무소’란 오이코노미아가 은폐되어,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에 대한 개입이다. 그것은 오이코노미아 통치 장치로부터의 탈피를 구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상 유래 없는 촘촘함과 광범위함으로 인간 삶을 관리-감시하는 기술관리 체계의 통치 패러다임에 맞서기 위해서는, “근대의 정치 이념으로 가려져 있던 서양 정치의 ‘은폐된 장치’를 드러내고,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메시아니즘을 대치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의 메시아니즘은 “구원을 기다리며 비교?敎적 앎을 공유하는 신비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위약한 공생을 유적 본질로 하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향유하는 가능성에 대한 타진”이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정치’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서 구상되어야 한다.” 국가 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전적 혁명론이나 현존하는 정치 체제의 개혁을 말하는 복지국가론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전면화한 생명정치-오이코노미아 통치 패러다임에 적합한 비판 프로젝트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사유와 글은 정치를 조직할 수도 이끌어낼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정치가 있던 자리를 인간에게 환기시켜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지시와 환기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언어의 역할”일 것이며, “정치라 명명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치란 통치가 지워버린 과거의 흔적으로서만 현재 속에 실존하며, 통치가 뿌리내리고 있는 서사와 대항함으로써만 미래를 꿈꾸는 실천일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 책은 ‘종말론 사무소’ 이외에도, 벤야민과 슈미트 사이의 숨겨진 논쟁을 논제로 삼아 예외상태를 둘러싼 서구 정치사상의 근원적 대립을 분석하기도 하고, ‘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칼 슈미트, 레오 스트라우스, 프로이트의 논의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을 향한 20세기적 상상력의 전용 방향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층위에서 ‘정치’의 문제에 접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