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어둠을 불러들인 빛, 봄밤을 헤매던 장전된 어둠
못다 이룬 쉰여섯 명의 우주(宇宙)들을 위한 이야기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승옥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해온 김경욱의 일곱번째 장편소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출간되었다. 1982년 4월에 일어난 ‘우순경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이 소설은, 참사가 일어난 하룻밤 사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피해자 한 명 한 명의 삶에 집중하고 있다. 마치 장기 미제 사건에 덤벼든 프로파일러처럼, 김경욱은 사실성의 씨줄에 개연성의 날줄을 엮어가며 비극의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해나가지만, 결국 작가의 시선이 멈추는 곳은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스러져간 사람들 개개인의 소중한 삶이다. 또한 김경욱은 이 비극적 사건 이면에 존재했던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작가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들춰내 보인다. 이 소설은 끝내 말하지 못한 쉰여섯 명의 이야기를 찬찬히 풀어가며 이 사건의, 이 세계의 ‘진짜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목차
0. 동쪽에서 온 귀인이 부귀를 가져다주리라
1. 타인의 고통
2. 아이오와에서 온 편지
3. 정직·질서·창조·책임·본분·분수·주인의식·가정교육·국민화합
4.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5. 정의란 무엇인가
6.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7. 불 꺼, 씨발 불 꺼
8. 지옥으로부터 7미터
9. 흑과 백
10. 수리수리 마하수리
11. 거인의 옳은 팔
12. 고동배 외 55명
작가의 말
저자
김경욱
출판사리뷰
피해자들의 못다 맺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프로파일러, 김경욱
이 사건을 탐색하는 김경욱의 시선은 지극히 피해자 중심적이다. 충분히 잔혹하고 자극적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작가는 오로지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생각했고,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에 집중한다. 타인의 아픔에 민감한 공감 능력을 가졌던 박만길, 어린 나이에 백부에게 맡겨져 평생 사랑만을 바라온 손미자, 모든 것이 무협의 세계로 보이는 철없고 꿈 많던 소년 손영기 등, 어느 날 갑자기 미완으로 남게 된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손미자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두려워할 새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손미자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악몽 때문이 아니었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혼자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버림받는 것. 악몽이라면 차라리 깨지 말기를. 악몽에서는 혼자가 아니니까.
명치에 총을 맞는 순간 손미자는 달걀을 움켜쥐었다. 돌아선 사랑의 팔을 붙들듯. 깨진 달걀이 흘러내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껍질을 잃은 생명의 엑기스는 무섭도록 차가웠다. 스물네 해, 손미자의 온 생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갔다.
전보처럼 찾아오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었다. 죽음 또한 그러했다.(pp. 139~40)
작가는 피해자 56명이 단지 숫자로만 환원될 수 없음을, 이 사건은 한 명 한 명의 이 꿈꿨던 우주가 사라진 비극이었음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이날 미친 호랑이처럼 사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황 순경만이 유일한 도살자이자 가해자였을까. 살인자가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도 마을방송은커녕 변소로 숨어버린 면장, 온천 접대를 받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뒤 마을 앞에 참호를 파 들어앉은 궁지지서장, 결재 라인만 따지며 나서길 주저했던 군청 직원들 등 오늘의 우리의 상황과도 오버랩되는 한국 사회 곳곳의 병폐가 이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날 가장 잔인했던 것은 구조를 요청한 이들을 외면한 시스템―타성에 젖은 관료제, 권위주의 문화, 억압적 이데올로기, 무사안일주의―은 아니었는가에 대해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안과 바깥을 연결하는 인과의 거미줄
『개와 늑대의 시간』의 특징 중 하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기원을 세계사적 인과망 속에서 추적해간다는 점이다. 사건의 개요, 살인자의 이동 경로, 피해자들의 피격 장소나 이력 등을 바탕으로 씌어졌지만, 이 소설은 르포문학이나 추리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는 이 사건들이 얽혀 있는 다층적 인과에 주목해 비극의 기원을 폭넓은 역사적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추적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미 2007년 김경욱은 『천년의 왕국』에서 역사적 기록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변주해 380여 년 전 조선에 표류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네덜란드인의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써낸 바 있다. 『하멜표류기』의 단 한 줄에 착안해 긴 소설을 창작했듯, 이번에도 작가는 이 사건의 주요 살상 무기인 카빈총에서부터 각 인물들의 삶에 얽힌 역사적 맥락을 짚어낸다.
낯선 공간과 낯선 시간 속에서 나는 우리 ‘안’의 문제가 짐작보다 더 많은 ‘바깥’과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설명해줄 시선을,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안과 바깥을 연결하는 인과의 거미줄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_김경욱, 「연재를 시작하며」, 『문학과사회』 2014년 봄호
카빈이 발명된 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한국전쟁 발발, 보도연맹 사건, 베트남전쟁 파병,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까지 이 역사적 흐름과 다변해온 국제 관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작가는 놀랍도록 치밀하게 짜인 인과를 통해 보여준다.
비극을 대하는 가장 윤리적인 태도
유난히 고즈넉했던 봄밤, 무참히 스러진 우주 하나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나는 자판 위의 손길을 자주 멈춰야 했다. 그러다 가까스로 붙든 백색왜성의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프로파일러가 아니라 아마추어 천문가였다._「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김경욱 작가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유머러스한 문체가 여전히 돋보이면서 한편으론 피해자들을 향한 그의 조심스럽고도 애정 어린 태도가 깊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유머와 애도가 양립할 수 있는, 김경욱만이 구사할 수 있는 이 접근법은 작가가 비극이라는 소재를 대하는 데 있어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작법일 것이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일을 잊지 않고,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찾는 것, 『개와 늑대의 시간』의 윤리는 여기에 있다.
■ 작가의 말
어둠이 깊어져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서야 나는 그 기이한 감정이 실은 서글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불빛은 너무나 취약했다. 들에 핀 꽃처럼 무심한 한 줄기 바람에도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해한 어떤 악의(惡意)에 의해서도. 30여 년 전 ‘남한’의 벽촌에서 하룻밤새 동네 사람 쉰여섯을 총으로 쏴 죽인 순경은 불 켜진 집만 노렸다고 했다.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새까만 지평선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전된 총을 들고 빛을 찾아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자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두려움 속에 자문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실은 ‘에필로그’로 작가의 말을 대신할 셈이었다. 작중인물들이 그 후 어찌 되었다는 식의 글을 덧붙일까 했다. “끝이 뭐 이리 허무해”라는 독자들의 푸념이 무섭기도 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어울리는 마무리 같기도 해서였다.
“박만길과 손영희는 양가 유족의 뜻에 따라 영혼 결혼식으로 맺어져 나란히 묻혔다. 수잔 여사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묘비에는 ‘일흔아홉 번의 가을을 즐겼다’는 글이 새겨졌다. 손백기는 궁지면 발전위원회장으로서 이듬해 초에는 아스팔트 진입로 완공식에서, 여름에는 상곡 유원지 개장식에서 테이프를 끊었다. 정부의 전격적이고 파격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철호는……”
마음을 바꾼 것은 희생자가 너무 많아서였다. 그들의 빛이 꺼졌다는 사실을 굳이 재차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11장의 주인공을 위해서는 한마디 남기고 싶다.
“고동배는 2년 뒤 롯데 자이언츠가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커브로 타자들을 압도한 에이스를 앞세워 우승하던 순간, 하늘나라에서 뛸 듯이 기뻐했다.”
2016년 4월
김경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