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 자체로,”
1994년 『작가세계』로 데뷔해 올해로 등단 22년차인 이수명은 첫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1995)에서 가장 최근의 시집인 『마치』(2014)까지 6권의 시집을 상자한 중견 시인이다. “누구보다도 선구적으로, 그리고 누구보다도 오랜 동안 성실하게 시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모색해온 시인”으로서 “이미 완주된 길을 하나 내었고 그 길 위에 많은 후배 시인들이 운동하고 있음을”(조강석, 문학평론가) 부정할 수 없는 위치에 시인 이수명이 있다. “일관되게 관습화된 서정시, 시적 주체의 폭력성을 반성하는 자리에서 출발”(박상수, 시인 문학평론가)한 이수명은 6권의 시집을 통해 “일찍이 본 적 없는” “이 세계에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이 존재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사실-풍경을 꾸준히 독자들에게 타진해왔다.
문지 시인선 R로 다시 만나게 된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1998년 세계사에서 처음 발행됐던 이수명의 두번째 시집으로, 대상의 편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기존 인식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방식으로 언어의 자율성을 탐색해온 이수명 시 세계의 밑그림에 해당한다. 새로운 시 언어를 모색하는 출발선상에서 이수명의 고민과 도전의 흔적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실상 이수명의 첫 시집이라 해도 좋겠다. 17년 만에 새 표지로 갈아입은 시집은 당초 1998년판의 4부 67편에서 정수에 해당하는 50편만을 가려 뽑아 총 3부 구성의 새로운 목차로 꾸려졌다. 수록 시 모두 구두점의 위치와 유무에서부터 시어의 교체와 시행의 배열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많은 변화를 두루 거쳤다.
한 남자가 담벼락을 페인트칠하고 있다. 부을 들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오가며 손을 놀려댄다. 붓이 닿는 순간 담벼락은 무너진다. 푸르게 검게 또 푸르게 무너진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아다닐수록 유폐의 경계는 분명해진다. 새가 하늘을 통과할 때 새는 하늘을 가둔다. 하늘은 새의 날개를 가져간다.
그 남자는 낙담한다. 그가 붓을 떼자마자 페인트칠은 간 곳 없다. 거대한 담벼락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페인트칠」 전문
목차
시인의 말 4
1부
식탁 13
두 시와 정물 14
은사시 나무 15
상상 속의 슬리퍼 16
사과나무 17
걸어 나온 사람과 걸어 들어간 사람 18
유리와 눈동자 19
나는 맨홀에 빠졌다 20
배드민턴 치는 아이들 21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22
코르크 마개가 떠다닌다 24
신문 배달원 26
물고기와 컴퍼스 27
앵무새 28
누군가 30
사과 폭격 32
환멸 33
2부
검은 장갑 37
기하학은 두 번 통과한다 38
철봉 넘는 사람 39
파리 40
양파 43
풀은 무엇으로 태양을 녹이는가 46
채소밭에서 48
유리창 50
물구나무선 카페 52
나에게 알려진 잠 54
녹지 않은 눈 55
도배 56
투명한 홀 58
계단마다 두 발이 60
얼음의 잠 62
푸른 외투 64
벌레의 집 66
페인트칠 67
다리 위에서 만난 사람 68
3부
사라진 공 73
비둘기 떼 74
죽음의 산책 75
나날이 세계가 76
그의 귀가 돌아오듯이 77
사라지는 숲 7 8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을 때 80
나무 타기 82
거울 속에서 84
그의 모자 속으로 우리는 잠수한다 86
검은 연못 87
개미 88
컵에 물을 따를 때 89
가을을 던지는 나무 90
해설 / 대상은 나를 지연시킨다 나는 잘 나타나고 있다 _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91
기획의 말 113
저자
이수명
출판사리뷰
사물의 편에서 미지(未知)와 대면하는
한국 현대시사상 가장 독창적인 전위의 첫걸음
미지(未知), 이 다양한 ‘발생’들이 잠재하는 세계를 보라
1975년 문학과지성사 창립과 함께 시작하여 지난 40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과 문인들의 아낌 속에 한국 문학사상 가장 강력한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2012년 겨울부터 그 안에 방 하나를 새로 내어 〈시인선 R〉을 펴내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기에 출간되었다가 여러 사정으로 절판된 시집들 가운데,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시의 미적 갱신과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하는 시들을 찾아 소개하는 시리즈이다. 이성복, 황지우 들의 시적 요체를 가장 그들다운 시적 틀에 담고 있는 시집들부터 황병승, 김경주, 이민하, 신영배 들의 신선하고 독특한 매력을 아낌없이 담고 있는 첫 시집들까지 〈시인선 R〉의 목록은 한 권 한 권이 쌓일 때마다, 단순한 ‘복간’이나 ‘반복’에 그치지 않고 중요하고 개성 넘치는 또 하나의 현대 시사로 거듭나고 있다. 이 시리즈의 열번째 시집으로 이수명의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문학과지성 시인선 R 10, 2015)를 소개한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 자체로,”
1994년 『작가세계』로 데뷔해 올해로 등단 22년차인 이수명은 첫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1995)에서 가장 최근의 시집인 『마치』(2014)까지 6권의 시집을 상자한 중견 시인이다. “누구보다도 선구적으로, 그리고 누구보다도 오랜 동안 성실하게 시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모색해온 시인”으로서 “이미 완주된 길을 하나 내었고 그 길 위에 많은 후배 시인들이 운동하고 있음을”(조강석, 문학평론가) 부정할 수 없는 위치에 시인 이수명이 있다. “일관되게 관습화된 서정시, 시적 주체의 폭력성을 반성하는 자리에서 출발”(박상수, 시인 문학평론가)한 이수명은 6권의 시집을 통해 “일찍이 본 적 없는” “이 세계에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이 존재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사실-풍경을 꾸준히 독자들에게 타진해왔다.
문지 시인선 R로 다시 만나게 된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1998년 세계사에서 처음 발행됐던 이수명의 두번째 시집으로, 대상의 편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기존 인식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방식으로 언어의 자율성을 탐색해온 이수명 시 세계의 밑그림에 해당한다. 새로운 시 언어를 모색하는 출발선상에서 이수명의 고민과 도전의 흔적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실상 이수명의 첫 시집이라 해도 좋겠다. 17년 만에 새 표지로 갈아입은 시집은 당초 1998년판의 4부 67편에서 정수에 해당하는 50편만을 가려 뽑아 총 3부 구성의 새로운 목차로 꾸려졌다. 수록 시 모두 구두점의 위치와 유무에서부터 시어의 교체와 시행의 배열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많은 변화를 두루 거쳤다.
한 남자가 담벼락을 페인트칠하고 있다. 부을 들고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오가며 손을 놀려댄다. 붓이 닿는 순간 담벼락은 무너진다. 푸르게 검게 또 푸르게 무너진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닌다. 날아다닐수록 유폐의 경계는 분명해진다. 새가 하늘을 통과할 때 새는 하늘을 가둔다. 하늘은 새의 날개를 가져간다.
그 남자는 낙담한다. 그가 붓을 떼자마자 페인트칠은 간 곳 없다. 거대한 담벼락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페인트칠」 전문
무조와 불협화음 속 낯선 대상이 조성하는
미로와 기하학의 세계 그리고 무한한 자유의 세계
시집의 해설을 쓴 박상수는 “이수명은 인간의 손이 닿자 오히려 대상이 무너져버리는 순간에 대해” 집중하면서 “사물의 의미를 손쉽게, 인간적으로 규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두고 보는 방식’으로 일단 사물을 ‘존재’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거두고 추상적인 기호로서 사물의 존재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하려는 시인의 탐구가 이어진다.
나는 누군가의 손에 박힌 못, 소음의 한 형식이다. 나는 오르간의 뚜껑이고 내 부모의 뚜껑이고 내게 꽂힌 나보다 큰 주삿바늘이다. […]
누군가 눈을 뜬다 내 눈으로. 나는 웃으며 줄넘기를 한다. 나를 붙잡는 팔도 나를 놓아버린 팔도 함께 데리고 줄넘기를 한다. ―「누군가」 부분
사과는 밖이다. 사과가 사과를 나열하고 사과는 사과를 방류한다. 사과가 내미는 동그란 혀는 이미 목구멍이 부서진 세계의 상형문자가 아니다.
사과는 자신의 색으로만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온다. ―「사과 폭격」 부분
때로 다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먹은 사과들이 내게서 탈주하는 것이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향기 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사과나무」 부분
“이수명에게 직선 혹은 곡선과 같은 ‘기하학’은 해석이 불가능한, 의미 부여가 불가능한 하나의 순수 기호, 혹은 존재 그 자체”일 수 있으며,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한 시적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그 과잉과 불안의 심리적 긴장을 균형감을 잃지 않은 시의 제련으로 끌어당긴다.
내가 앉은 테이블의 세계도 앉는다. 그는 나를 소개한다. 비가 내리고 있고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가 무어라고 손짓하면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말한다. “화살표를 따라 가시오.”
그가 머리 위로 손뼉을 친다. 팔을 열었다 닫으면서. 그는 두 팔의 대칭에 빠진다. 그와 나의 대칭에 빠진다. 나는 물에 잠긴 잠수교를 그린다. 나는 세계를 전염시킨다. ―「기하학은 두 번 통과한다」 전문
의식적이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인 ‘회전’ 운동
시적 주체와 대상이 마주한 상황에서 이수명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사물과 세계에게 되돌려준다. 이 시집 이후, 사물들은 보다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땅 위로 내려와 낯선 길을 개척하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금지가 없어서 자유롭지만 금지가 없기에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온갖 행동을 다 시도해본다. (박상수)
벨을 누른다. 깊이 잠들었던 집이 일어나 계단을 내려온다. 문이 모두 열려 있다. 집 안에는 철봉 하나가 놓여 있고 누군가 매달려 그 철봉을 넘고 있다. “기다리고 있었소, 우리의 탈출 계획은 완전하지요.” 철봉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우리는 모두 점화되었고, 나는 지체할 수가 없어요,” 내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철봉에 부딪쳤다. 그는 점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철봉을 잡고 몸을 돌리고 있었다. “당신은 내 발등에 돋은 불이오. 먼저 당신이 나를 돌리는 것을 멈추어야만 하오.” ―「철봉 넘는 사람」 전문
“이질적인 것들을 한데 모으는 지성의 작용과, 그것을 이미지를 통해 벼려내는 감수성의 마감이 이제는 별일 없이 예사롭게 발휘되고 있을뿐더러 더욱 풍부하게 펼쳐지고 있으니 그의 앞에 놓인 어떤 미지도 이제는 한국 시의 축복이 되리라 확신한다.” (조강석)
나의 격자창을 새들의 뼈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멜로디를 반복한다. 그것은 어떤 얼굴을 반복한다. 창살마다 똑같은 얼굴이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지금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의 잠을 자고 있나 보다. ―「나에게 알려진 잠」 부분
“시를 쓴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질문은 행위를 묶게 마련인 까닭이다. 생각하지 않을 때 시는 움직인다. 동시에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에 시에 이를 길이 없어 보인다. 시는 시적 공허에 대한 직면으로 자주 대체된다.
시가 시 아닌 것과 언제나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태연하게 하찮음과 결탁한다. 정체 모를 껍질, 부유물이 그러한 것처럼 시를 들여다볼 수도 없다. 때때로 시는 텅 빈 전지(電池)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새것으로 갈아 끼운다고 해서 전류가 흐르는 것도 아니라면, 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의 모든 가능성에 자신을 개방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의 불가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는 시대를 불문하고 비결정적인 것이며, 언제나 처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인자(因子)가 되기를 요청받은 자리에서 언제나 명료한 태도를 취해온 곳이 아니다. 시는 늘 뭔가 다른 말을 하는 목소리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다름’이 껍질이고, 운동이고, 어려움이고, 시이면서 또한 비시일 것이다. 시가 복잡해지는 것은 사유의 결과도 아니고, 시대의 탓만도 아니다. 사실 시는 언제나 난해한 것이다. 바로 이 ‘다름’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요컨대 시의 어려움과 현대시의 문제성은 교차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 교차 지점을 현대적 아이템으로 덮어버리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수명 시론집 ,『횡단』(문예중앙, 2011)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