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예수의 몸을 만지려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것을 금지시키는 예수의 말씀 “나를 만지지 마라”
접촉의 욕망과 금지에 대한 낭시의 매혹적 사유
몸, 공동체,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대해 독창적인 연구를 전개해온 프랑스의 철학자 장-뤽 낭시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상징적 장면을 분석한 에세이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가 출간되었다. 부활 첫날,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가 그를 알아보고 몸을 잡으려 하자 이렇게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낭시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장면, 특히 마리아의 접촉을 금지시킨 예수의 말에 각별히 주목한다. 그는 이 말이 발성되는 방식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모습과 동작, 그리고 이 장면을 그린 숱한 성상화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대조해가면서 그 한마디 말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탐색한다.
목차
프롤로그
떠남
메 무 합투-놀리 메 탄게레
정원지기
손들
막달라 마리아
나를 만지지 마라
에필로그
해설
옮긴이 후기
저자
장 뤽 낭시
출판사리뷰
나를 만지지 마라: 놀리 메 탄게레
예수는 왜 마리아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요한복음」을 따라 간단히 정리하면, 부활의 첫 장면(제20장 1~18절)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나서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알고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말하자 제자들이 와서 확인하고 돌아갔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다가 뒤에 서 있던 정원지기에게 예수의 몸을 어디다 두었는지 물었는데, 그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다. 마리아가 그가 예수임을 알아보고 “라뿌니”(스승님)라고 답하면서 예수의 몸을 잡으려 하자,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였고, 이를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했다.
예수는 왜 마리아의 접촉을 금지시킨 것일까? 본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몸 자체가 먹고 마실 것으로 주어진 이래 만질 수 없는 것이란 없다. 예수는 어떤 순간에도 사람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을 들고 제자들에게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했고, 부활을 의심한 도마에게는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허락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나를 만지지 마라’ 장면은 일종의 예외, 신학적 유일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활과 함께 “주님의 오른편에 앉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 예수를 만진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암시, 혹은 신성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간의 오만이 야기할 수 있는 재앙에 대한 경고인가?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이 말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민주주의로부터 신정사회로의 퇴행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낭시의 분석을 따라가려면, 예수가 구사했던 ‘비유parabole’의 기능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낭시는 예수의 ‘비유’가 통상적인 비유들과 달리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능력의 진화를 ‘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예수가 “귀 있는 자 들어라”라는 말을 통해 귀를 갖추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비유는 의미가 아니라 계시가 되고, 형상은 재현이 아니라 실천이 된다.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말 역시, 이 말을 듣는 자는 그 직접적인 의미의 이행뿐만이 아니라 그 말이 속에 부화시키고 있는 가외의 의미를 찾아 그것을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다가감이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비유가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라는 것은 그것이 “과잉-의미”로 넘실댄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넘어, 현존 너머, “주어진 것,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 여기에 놓인 것을 넘쳐나는 어떤 과잉의 광채” 속에서 열린다. 따라서 예수의 말은 이중적으로 읽혀야 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는 접촉을 금지하는 바로 그 작용으로 동시에 접촉에 대한 욕망을 유지시키는데, 여기서 만지면 안 되는 것은 ‘부활한 몸’이다.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의 몸이 되어서 만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를 만지지 않으면서 그에게 다가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접촉이 실질적으로 유발하는 만짐의 동작과 만져서는 안 되는 실체 사이의 분리를 둘러싼 끝없는 밀고 당김. 낭시는 예수의 말을 이렇게 변주한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
부활한 예수를 만지는 일이 진리에 다가감을 뜻한다면,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다가감’이다. 끝없이 다가가되 미치지 못하는 삶, 끝없이 감행하되 항상 반성하는 삶의 일상적 실행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의 장면에서 예수를 건너 두 사람(정원지기와 마리아)에게로 의미를 이월시킨다. 예수가 정원지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낭시는 이렇게 말한다. 부활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성시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깨닫는 것은 죽음으로부터의 돌이킴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의 생명의 일어남이다. 다시 말해, 유한자로 하여금 그의 유한성을 수락하는 자세로 무한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마리아가 그를 잡으려는 걸 물리치는 동시에 마리아에게 가서 자신의 부활의 소식을 알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손은 빈번히 두 개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표시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여인을 멈춰 세워 그녀를 저의 소명 쪽으로 돌려놓는다.” 해선 안 될 일을 통해서 부활의 진실은 확정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통해서 그것은 어떤 고정된 의미에 머무르는 대신 앞으로 나아간다. 그 사정을 기술하는 낭시의 문장은 아름답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 혹은 낭시의 예술론
이 책의 번역은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초역을 하고, 목회 활동을 하는 이만형이 영어 번역본을 참조하여 종교적인 부분을 유의하며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책 말미에는 옮긴이들이 각각 쓴 해설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정과리는 “현대 사회의 개인의 윤리학” 혹은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며, 이만형은 복음주의가 지배적인 우리나라(‘만지지 마라’보다는 ‘만져라, 거침없이 만져라’가 그 슬로건이라 할 수 있고, 신성에 접하고 신성을 소유하고 스스로 신성화하려는 대중적 열망이 들끓는)에서 이 책이 어떤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인가에 주목해보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사랑 혹은 진리(에 다가감)에 대한 이야기로도, 혹은 낭시의 문학론, 예술론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자에게 직접 그를 대행하게 하는 것은 “[부활은] 그[예수]의 내부에서 일어난 타자의 들림”이라는 이 책의 궁극적인 전언과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옮긴이들이 강조했듯, 낭시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이야기의 뿌리를 이루는 생각을 더듬어 다시 보면, 발견과 경이의 폭죽이 사방에서 터지며 이야기가 열려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 “나를 만지지 마라” 혹은 “붙들지 마라”는 그리스어로는 “Me mou haptou”, 라틴어로는 “Noli me tangere”이다. 그리스어에서는 ‘만지다’와 ‘붙들다’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었는데 라틴어에서는 ‘만지다’라는 뜻으로만 축소되었다. 그래서 불어로는 “Ne me touche pas”로 번역되었고, 영어 킹 제임스 판에서는 “Touch me not”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영어 표준번역에서는 “Do not hold on me”로 번역되었고, 그 영향인지 한국어 성경에서는 “붙들지 마라”로 번역되었다(“붙잡지 마라” “만지지 마라”로 번역한 한국어 성경도 간혹 있다). 이 책에서는 ‘만지는 감각’을 이 말의 핵심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낭시는 이 점을 특별히 고려해 라틴어 번역 문장 Noli me tangere를 제목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