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문학과지성 시인선 463번째 시집 서영처의 『말뚝에 묶인 피아노』. . 2003년 계간 「문학/판」을 통해 등단한 서영처 시인은 “빛과 어둠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음악적 관능과 상상”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2006년 첫 시집 『피아노악어』를 선보인 이후 10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펴냈다. 음악적 모티프와 자연 친화적 배경은 여전하지만 “광활한 평원에 방랑을 꿈꾸는 책을 완성한다”는 고백처럼 철학적 사유와 “비가(悲歌)나 애가(哀歌)가 아니라 하나의 경쾌한 목가(牧歌)”로 승화된 형식은 깊어지고 넓어진 시 세계를 확인하게 한다. 말뚝에 묶인 피아노 이미지를 상상해보면 그로테스크하며 작위적인 심상이 느껴지지만 그 이미지 자체에서 피어나는 외로움과 절망, 그러면서도 현실 세계에 발을 붙인 듯한 안온한 느낌은 자아와 세계를 곧바로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뚜렷한 시 의식의 표현임을 짐작하게 한다.
목차
1부
한여름 밤의 꿈|장마전선|디, 디, 디제이 하는 염소들|구름부족들|불면|멀고 먼 추억의 스와니|다시 봄날|옛날의 금잔디|후미진 굴헝|식사|아무렴 아무르|노란 샤쓰의 사나이|포도밭 도서관|f 홀|손수건|줄넘기|마리아 엘레나|오리온자리|경고, 민들레|거울 속 거울|언덕|눈물|폭설|혀|누가 종달새 목에 종을 달았나|쥐|자격루|붉은 천
2부
THE #|헌사|제비꽃|도서관|경건한 숲|경건한 숲 ― 숲새|경건한 숲 ― 악기가 되지 못한|경건한 숲 ― 사월|경건한 숲 ― 단풍|경건한 숲 ― 입추|유월|다시 유월 ― 개망초|또 다시 유월 ― 학교서 조퇴한 나는 약을 먹는다 빨랫줄 위로 출렁거리는 햇살|그리고 유월 ― 본색을 드러내라|그리고 또 유월 ― 나는 어리석고 조급했다|다시 산꼭대기 수선화 중창단|산꼭대기 수선화 중창단|끝없이 음조를 바꾸는|침묵 수도원|붉은 밤|오, 나의 태양|달밤|김환기 풍의 달|솔렘의 종소리|뮤직 콘크리트|밤의 음악|여름 음악 캠프
해설|소리와 빛의 모자이크, 혹은 유목의 노래_김진수(문학평론가)
저자
서영처
출판사리뷰
검게 웅크린 거대 도시를 떠나
유랑하는 삶, 삶이 된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463번째 시집으로 서영처의 『말뚝에 묶인 피아노』가 출간되었다. 2003년 계간 「문학/판」을 통해 등단한 서영처 시인은 “빛과 어둠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음악적 관능과 상상”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으며 2006년 첫 시집 『피아노악어』를 선보인 이후 10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펴냈다. 음악적 모티프와 자연 친화적 배경은 여전하지만 “광활한 평원에 방랑을 꿈꾸는 책을 완성한다”는 고백처럼 철학적 사유와 “비가(悲歌)나 애가(哀歌)가 아니라 하나의 경쾌한 목가(牧歌)”로 승화된 형식은 깊어지고 넓어진 시 세계를 확인하게 한다. 말뚝에 묶인 피아노 이미지를 상상해보면 그로테스크하며 작위적인 심상이 느껴지지만 그 이미지 자체에서 피어나는 외로움과 절망, 그러면서도 현실 세계에 발을 붙인 듯한 안온한 느낌은 자아와 세계를 곧바로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뚜렷한 시 의식의 표현임을 짐작하게 한다.
상승과 확장이라는 평행하는 두 계열체의 대위법적 이미지들로 구성된 서영처의 시 세계는 어둠이나 죽음 같은 부정적 이미지들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오직 경쾌하고도 활력적인, 동시에 거칠고도 야생적인 생명과 삶의 에너지들만이 똬리 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 시의 노래는 ‘살아 있는 형식’으로서의 음악이 된 야생적 삶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서영처의 시 세계에서 시는 그 자체로 삶이 된 노래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김진수(문학평론가)
실낙원(失樂園)에서 복낙원(復樂園)을 기도하는 마술의 노래
시인은 권두에 “오래전 그 빛이/다시 비치는 언덕//나무 그늘 아래서/초원을 내려다본다”고 적었다. 오래전 그 빛이 다시 비치는 언덕은 그 옛날 선과 악의 구분을 모르는 아담과 이브가 살던 곳은 아닐까. “먼 호수의 비린내를 되새김질”하는 악어의 이미지나 “전봇대 근처 사글세 동굴” 같은 은유는 마치 현실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직유와도 같이 적나라하지만 그것이 설화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방식은 이 시집의 핵심적인 수사가 아닐 수 없다. 설화나 신화적인 공간은 그것이 품고 있는 풍경 자체를 영속화시키는 권능을 갖고 있으며 변함없는 고향, 즉 자연과 원초적인 삶의 의미를 축양하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들의 저장소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이번 시집에 엮인 시들을 편편 읽어내며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가 음악의 여신Muse의 어미임을 상기시킨다. “음악과 노래는 더 나아가 그것들로 축조되는 시와 예술은 결국 저 상실된 고향의 기억이며, 또한 그것의 보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저 실낙원을 회복하기 위해 노래한다. “두근거리는 몇 개의 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아 “자신을 지워”내며 “대리석 기둥에 기대” “지난여름을 흐느끼”는 시간을 사는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그리고 음악과 노래는 바로 이러한 원초적인 자연의 삶과 고향의 생명력을 환기해내는 마술”의 노래가 아닐 수 없다.
갈라져 타오르는 강바닥, 악어는 상류를 향해 비칠비칠 기어오른다 습한 동굴을 찾아 긴 꼬리 끌고 간다 전봇대 근처 사글세 동굴을 발견하고 기어든다 온몸이 식용이던 놈 우기의 추억을 쩌업 다시며 진흙에 턱을 묻는다 얕은 잠이 들었다 깼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묵묵부답 버티는 동굴엔 전단지 같은 햇살만 덕지덕지 붙었다 떨어진다 시간이 증발해버린 강가 악어는 먼 호수의 비린내를 되새김질한다 ? 「눈물」 부분
금요일 밤 f 홀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두근거리는 몇 개의 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f 홀에서는 깜깜, 자신을 지워야 한다 출몰하는 백상아리 추격하는 피아니스트 아우성치는 바다가 작살을 받는다 피로 흥건해지는 홀, 대리석 기둥에 기대 누가 지난여름을 흐느끼고 있다
-- 「f 홀」 부분
소리와 빛으로 모자이크된 공감각적 신의 이미지
음악적이며 유목적 이미지들로 축조된 시의 세계는 아폴론적 충동의 세계, 즉 꿈의 세계를 드러낸다. “화음으로 가득 차는 둥근 하늘”과 “평화를 사랑하는 태양과 장기 계약을 맺고/황금빛 시간의 부스러기들을 나눠 먹는” 시적 상상은 슬픔이나 우울, 절망, 한 같은 부정적 감각을 꿈의 세계로 환원해 끈덕진 처연함으로 추락하지 않게 한다. 활력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 『말뚝에 묶인 피아노』의 시들이 삶의 원초적 자리를 기억하고 환기시킬 때, 시는 햇살 가득한 오후의 한낮 같은 동화적-설화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설화적 풍경 속의 삶이 빛과 소리로 모자이크 된 유목적 삶과 생명의 활력으로 들끓는 것은 애이불상(哀以不傷, 슬퍼하되 정도를 넘지 아니함)의 경지에 이른 시 세계를 보여준다. “어쩌면 시인에게 있어서 시의 노래는 ‘살아 있는 형식’으로서의 음악이 된 야생적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땅 깊숙이 뿌리를 내려
오르간 소리처럼 피어오르는 숲
어디선가 비명 찢어진다
푸드덕거리는 산비둘기, 피 묻은 깃털 흩어지고
살쾡이 한 마리 사냥감을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비탈에 서서 송영을 쏟아내는 소나무 성가대
순례를 허락받은 자
천천히 산을 거느리고 내려온다 ? 「경건한 숲」 부분
세월의 둘레를 흐르는 강, 매기가 살았지
봄 가뭄 든 강처럼 잠은 얕고
슬픔은 늙은이의 등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지
너는 매기의 딸, 풍금을 쳐보렴
페달이 일으키는 바람 속으로 매기를 불러보렴
큰 바다 어디쯤 해바라기하며 빛을 모으는
어미의 시퍼런 운명을 너끈히 받아내렴 ? 「옛날의 금잔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