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권. 의미를 유보하는 과정 자체로 자기 시를 만드는 시인, 이제니의 두번째 시집. 반복을 통해 생생한 리듬감을 획득하여 사물과 의미 사이 공간을 확장하였다는 평을 받은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이후 4년 만이다. 두번째 시집답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 실린 60편의 시에서 이제니 특유의 리듬감은 더욱 조밀해졌다.
그는 사물의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쓰고, 다시 쓰고, 덧붙이고 지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의미라는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에 리듬을 흘러넘치게 한다. 지금까지 이제니의 리듬을 수식했던 발랄은 이번 시집에서 의연(毅然)이라는 좀더 절실한 표현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기린이 그린
가지와 앵무
달과 부엉이
꽃과 재
나무의 나무
나선의 감각 - 검은 양이 있다
나선의 감각 - 잿빛에서 잿빛까지
나선의 감각 - 물의 호흡을 향해
나선의 감각 - 빛이 이동한다
수요일의 속도
달과 돌
구름과 개
차와 공
사과와 감
너울과 노을
나선의 감각 - 목소리의 여행
너의 이마 위로 흐르는 빛이
가지 사이
그을음 위로 그 울음이
두루미자리에서 마차부자리까지
기적의 모나카
음지와 양지의 판다
개미의 심장
분실된 기록
수풀로 이파리로
거실의 모든 것
검은 개
삶은 달걀 곁에
계피의 맛
착한 개는 돌아본다
잔디는 유일해진다
중국 새
고양이는 고양이를 따른다
작고 검은 상자
그곳에서 그곳으로
구름 없는 구름 속으로
비산의 바람
태양에 가까이
먼 곳으로부터 바람
초다면체의 시간
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모르는 사람 모르게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몸소 아름다운 층위로
빛으로 걸어가 빛이 되었다
어둠과 구름
유령의 몫
가장 큰 정사각형이 될 때까지
마지막은 왼손으로
얼굴은 보는 것
하루에 한 가지씩
나무는 기울어진다
파노라마 무한하게
나선의 감각 - 공작의 빛
나선의 감각 - 역양
나선의 감각 - 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밤이 흐를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해설 | 리듬의 프락시스, 목소리의 여행. 조재룡
저자
이제니 (지은이)
출판사리뷰
“이 세계에서 분명한 것은 오직 기미와 전조뿐”
벌써 달아난 의미
감각이 우리의 것이 될 때
들려오는 이것은 목소리의 시
“의미를 유보하는 과정 자체로 자기 시를 만드는 시인”(조재룡) 이제니의 두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가 출간되었다. 반복을 통해 생생한 리듬감을 획득하여 사물과 의미 사이 공간을 확장하였다는 평을 받은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이후 4년 만이다. 두번째 시집답게,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 실린 60편의 시에서 이제니 특유의 리듬감은 더욱 조밀해졌다. 그는 사물의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쓰고, 다시 쓰고, 덧붙이고 지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의미라는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나선의 감각―역양」)에 리듬을 흘러넘치게 한다. 지금까지 이제니의 리듬을 수식했던 ‘발랄’은 이번 시집에서 ‘의연(毅然)’이라는 좀더 절실한 표현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이제니의 시가 지극한 모험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은 의미에 붙들리는 대신, 낱말과 낱말, 구문과 구문이 관계를 맺어 생성된 특수한 시적 언어로, 제 고유한 호흡을 길어 올릴 순간까지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삶의 수많은 결들을 문장으로 포섭해내고, 지금-여기로 끌고 와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는 낱말이 항시 다르게 쓰인다고 생각하는 시인, 언어로 명명될 때 사물과 우주의 실존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 시인, 그렇게 해서 슬픔과 죽음, 사라짐과 울음, 덧없음과 고독의 출렁거리는 한 자락을 자신의 언어로 붙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움직이는 말이 모든 것을 삼킨, 아직 경험하지 못한 저 고독하고 외로운 바다 한가운데를 떠다니게 될 것이다. 그는 시의 최전선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리듬의 화신이다. _조재룡(문학평론가)
리듬과 감각―“문장들이 흘러간다. 찰랑인다. 출렁인다. 넘실거린다.”
한 낱말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의미를 밀어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사물의 본질이자 정수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제니의 ‘리듬’은, 각각의 낱말에 꼭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 묻는 데서 시작한다. 이제니의 시에서 “말은 항상 속이 빈 채로 맞물려 있”(「초다면체의 시간」)다. 의미를 벗은 낱말, 무효한 문장들이 서로를 붙들어 비늘 혹은 섬유같이 촘촘한 짜임을 만들 때 생겨나는 것이 리듬이다.
이제니는 그렇게 반복으로 리듬을 자아낸다. 문장들은 접속사 없이 병렬식으로 나열되다 “돌연, 어느 지점에 이르러, 의미의 연쇄를 끊어”낸다. 이때 노래 속 음의 높낮이처럼 시에 리듬이 생긴다. 이번 시집에서는 또한 구두점을 활용하여 색을 입히고 여백을 만들고 공간을 구성하는데,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분실된 기록」)에서 슬픔이 두께를,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마침표가 만드는 여백 때문이다. 이제니의 시는 시인 자신의 호흡에 충실하지만 구두점 하나 허투루 들어가지 않는다. 비슷한 연쇄와 단절이 계속 반복되면서, 하나의 시는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단단히 맞물린다. 이제니의 시가 소리 내어 읽을 때 더 좋은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두 손을 맞잡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당신 자신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한 낱말 위에 한 낱말이 겹치면서. 한 목소리 위에 한 목소리가 흐르면서. 달아나는 말 위로 스며드는 물. 스며드는 물 위로 내려앉는 말. 얼음과 구름. 죽음과 묵음. 결국 헤매다가 죽게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 모르게 살아가듯이. 모르는 사람 모르게 죽어가듯이. 커튼은 잿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탁자는 흑백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을 빛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어둠이야말로 내 마음이다.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내 눈 속의 어둠과 함께. 너의 어둠과 함께.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
―「모르는 사람 모르게」 부분
이해와 오해―“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니는 “우리와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거리와 거리 사이에는 오해가 있”(「검은 것 속의 검은 것」)음을 이미 인정하였다. 말 그대로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제니의 호흡과 리듬을 완벽히 따라가거나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호흡과 리듬을 이해하는 건 어쩌면 감각을 공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호흡이란, 리듬이란 “저마다의 속도로 각자 유일하게” “하나하나 고유하게”(「잔디는 유일해진다」)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이제니는 영영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외로움을 무릅쓰고, 또한 독자는 밑줄 그은 문장을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시집 안에서 마주한다. 그러나 잠시나마 호흡이 겹치는 지점에 도달한다면 소리와 색깔과 공간으로 채워진 페이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니의 시에서는 줄곧 ‘우리’를 상정한다. 그의 시는 ‘어차피’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라며 포기하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그러니까…… 로 이어져 말줄임표 안에 수없이 시도들을 담는다. 이해는 의미의 해석이 아니라 감각의 공유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속 이제니가 꺼내놓은 무수한 진심을 따라 읽으며, ‘우리’가 오해보다 더 많은 이해에 가닿을 수 있기를. “믿을 수 없게도 모두 함께 시를 쓰고 있었다/저마다의 낱말 속에서 저마다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몸소 아름다운 층위로」).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녹색의 빈 가지가.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