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내면’의 시선으로
근대 일본의 역사, 문학, 종교를 재해석하고
균열과 틈새, 여백으로서의 열린 사유 공간을 모색하다
일본의 소장학자로서 종교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소마에 준이치 교수의 대표작 『상실과 노스탤지어』가 출간되었다. 한국의 탈식민주의 연구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재일 조선인, 소수자, 디아스포라 같은 주제에 천착하고 있는 이소마에의 책이 완역되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의 근대는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과감한 체제 개혁을 단행한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되어, 이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낳고 미합중국의 점령을 받게 되는 등 사회 격동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이러한 근대 일본이 사로잡혀 있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질감 내지는 상실감을 포착해 그것이 어디에서 근원했는지를 살피고 우리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을 성찰한 책이다. 저자는 ‘내면과 여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의 역사, 문학, 종교를 독창적으로 읽어내고, 내셔널리즘과 민족 개념, 천황제와 국가신도 문제 등을 고찰한다. 또한 담론과 지역 연구, 일본인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대문자 역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한 코에 꿰어 분석한다. 나아가 저자는 학문을 하는 연구자는 자신이 현실의 맥락에서 초월해 있다거나 혹은 현실과 타협하는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며,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날선 조언을 하고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 ‘여백’을 생각한다-한국의 독자들에게
프롤로그 | 어디에도 없는 당신께-역사와 종교가 태어나는 곳
1부 가까운 곳으로의 회귀
역사와 종교를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담론, 네이션, 여백
문화의 틈새에서-이문화 연구와 자문화 이해
2부 내면과 여백
일상이라는 리얼리티-이시모다 쇼와 『역사와 민족의 발견』
내면을 둘러싼 항쟁-근대 일본의 역사?문학?종교
3부 죽은 자와 산 자
죽음과 노스탤지어-야나기타 구니오의 『선조 이야기』에 관해
사령 제사의 정치학-위령과 초혼의 야스쿠니
4부 텅 빈 제국
초법적인 것의 그림자-근대 일본의 ‘종교/세속’
에필로그 | 두 척의 배-과거와 마주하기, 그리고 표현이라는 행위
미주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저자
이소마에 준이치
출판사리뷰
우리는 모두 내면에 여백을 품고 있다
―새로운 이해 가능성을 여는 어긋남에 관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지 못하며,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동화되지도 못한다. 우리 개개인은 생각만큼 명확한 존재가 아니며 자기 내부에 어떤 어긋남을 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런 어긋남, 여백을 혼성성이나 어중간한 상태, 혹은 이질성이나 과잉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곧 타인과 관계하려는 의지, 그리고 표현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이처럼 내면의 여백을 긍정하면서, 국민의 사고와 의식을 동질화하는 평등의 허망함을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초법적 존재를 상정하고 균질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내셔널리즘 혹은 국민국가의 환상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쉽사리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민주주의 사회라는 환상 역시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생겨난 부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저자는 근대 일본의 역사를 내면과의 투쟁으로 해석하고 내셔널리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기존의 동질화와는 다른 불균등한 것들의 평등을 논의의 전제로 삼을 때 비로소 새로운 민주주의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한다.
한편 저자는 일찍이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등에서 말한 ‘내면’ 개념은 공동체의 동일성을 상정하고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선을 상정함으로써 내부로부터의 저항 가능성이나 차이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진다면서, 가라타니로 대표되는 근대 일본 담론의 연구 전통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방안을 사카이 나오키나 해리 하루투니언 등의 텍스트 독해를 통해 모색하고 있다.
전후 일본 사회의 담론과 역사 인식에 관한 전면적 비판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왜 반대에 부딪치는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곤 하는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논쟁들과 그에 관한 저자의 견해도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종교학자 무라카미 시게요시는 야스쿠니의 제사가 근대에 새로이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자기편의 병사만을 제사 지내는 것은 일본 고유의 원천평등 사상과도 반목한다는 점 등을 맹렬히 비판한다. 이에 대해 이소마에는 역사적 작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역사적 본래성을 띠고 있든 아니든 간에 근대 일본이라는 공간 속에서 제사가 어떤 형태로 상기되었으며 사회와는 어떻게 결부되어 있었는가의 문제를 그 관계성과 함께 동시대의 지평 안에서 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A급 전범의 합사나 ‘국가’에 의한 제사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쟁점 이외에도 야스쿠니에서의 제사 행위를 빚어내는 논리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논의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제사 행위는 결국 산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목적에 복무할 뿐이다. 저자는 이처럼 제사 자체의 불가능성을 상기시키면서, 거기에서 생겨나는 균열로부터 후방의 전쟁 피해자와 타국의 피해자를 생각할 틈새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족이 느끼는 사자의 원통함이나 사자에 대한 책무의 감정은 야스쿠니가 제공하는 전쟁 긍정의 서술에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전사로 내몰았던 국가에 책임을 추궁하는 반反전쟁의 이야기와 결부될 수도 있는 양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비타협적 태도를 권하는 이소마에의 날카로운 역작
저자는 문학, 역사학, 종교학, 민속학, 그리고 자문화와 타문화, 과거와 현재, 윤리와 정치, 수필과 논문의 형식을 넘나들고자 분주히 노력한다. 학술제도와 그 훈육을 통한 기법의 경계들을 무화시키면서 내면의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다. 역사학적 분석이 이루어지는 한가운데에 문학작품이 인용되고, 여기에 다시 마르크스주의적 초월성의 경향이 천황제와 함께 겹쳐진다. 미시마 유키오, 야나기타 구니오, 이시모다 쇼, 에토 준, 가라타니 고진, 무라카미 하루키, 나쓰메 소세키 등 각자의 분야에서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다양한 지적 고투와 좌절,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와 특공대, 사소설, 마르크스주의, 담론 비판, 외국 생활, 미국의 일본 점령, 네이션, 종교 개념, 조상숭배, 정교분리, 천황제 등의 사태가 이를 위한 각각의 알레고리로서 작용한다.
한편 저자는 문체에 관해서도 깊이 사유하고 있다. 학술적 담론과 훈련을 통한 문체로 이루어진 글은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가 새겨졌다고 보기 힘들며, 그렇다고 마음 가는 대로 단어들을 쏟아내는 것도 타자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자기 위안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 속에 행해진 저자의 첫번째 실험이다. 이 책 곳곳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이는 독자를 텍스트의 피동적 존재가 아닌 능동적 존재로 소환하고자 한 의도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학문 연구의 자세에 대해서도 뼈아픈 반성과 조언을 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에 대해서는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자신의 인식이 기존 담론의 틀에 제약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몹시 둔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단자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전체와의 ‘협조성’을 지키는 가운데 스스로 앙상해져가는 학계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동질화된 사고와 정체성에 여백을 삽입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비평이 오늘날 완전히 퇴색하고 만 것 역시 이러한 지식 사회의 황폐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과 학계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이 책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의 구성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모두 4부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간체로 쓰인 감각적인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1부 「가까운 곳으로의 회귀」에서는 내면과 여백이 무엇인지 밝히고 일본의 담론 비판과 이문화 이해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2부 「내면과 여백」에서는 이를 확장해 근대 일본 사상의 전개를 문학, 역사 등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분석한다. 3부 「죽은 자와 산 자」에서는 국가 내셔널리즘의 문제를 죽음과 제사, 상실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4부 「텅 빈 제국」에서는 전후에 초법적인 천황제가 어떻게 불려나오게 됐는지 그 사회적 맥락을 종교학자이자 역사학자의 눈으로 분석한 뒤, 역시 수려한 문장으로 쓰인 에필로그로 글을 맺고 있다.
당연히 너, 나, 우리는 동일한 존재일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서도 간극을 지닌다. 학문 제도나 국민국가와 같은 기존의 경계를 횡단하고 그 내부와 외부에서 여백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지식이 태어날 토양의 네트워크 또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을 통해 우리 각자는 이 내면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유하고 적용해나갈지 고민하고, 우리의 주체성과 윤리적 연대를 정초할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