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끔 세상이 기우뚱했지만
그럴 때면 몸을 반대로 약간 기울여서 중심을 잡았다”
뼈아픈 자기 성찰로 발견하는 진짜 삶의 진실들
기만적인 세계 앞에 들이대는 거울 같은 여덟 편의 이야기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단이 사랑하는 소설가로 손꼽히며 한국 작가 가운데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작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작가 이승우의 아홉번째 소설집 『신중한 사람』이 출간되었다. 『오래된 일기』(2008) 이후로 6년 만에 펴내는 신작 소설집이다. 제10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칼」을 비롯한 총 여덟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81년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승우는 지난 23년간의 저작을 통해 폭넓은 소설적 영역을 구축해왔다. 작가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사하는 초월적 주제에서부터 신화적 세계를 경유한 다양한 물음들로 한국 소설의 형이상학적 폭과 깊이를 넓히고 심화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죄의식에 대한 깊은 탐구와 더불어 인간 심리의 미로, 욕망의 어두운 지대를 겨냥하고 있다. 물론 그 미로의 맞은편에 자리한 편집증적 망상과 자기기만을 강요하는 막무가내의 부조리한 현실도 지적한다. 이는 『생의 이면』(1993)에서 보여주었던 인류의 원죄 의식이나 『에리직톤의 초상』(1981)이 제기하는 ‘현실 사회에서의 죄의 실체’에 대한 문제적 의문, 「일식에 대하여」에서 인식하는 ‘고귀한 삶이 불가능한 곳’으로서의 현대 사회에 대한 인식 등과도 맞닿는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간 작가가 보여준 문제의식과 세계관이 결집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목차
리모컨이 필요해
신중한 사람
오래된 편지
이미, 어디
딥 오리진
칼
어디에도 없는
하지 않은 일
해설 확실성의 붕괴, ‘놀라운 회의론자들’의 세상 정홍수
작가의 말
저자
이승우
출판사리뷰
삶에 불합리를 더하는 신중해서 안타까운 사람들
표제작 「신중한 사람」은 ‘신중함’ 때문에 계속 곤경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 Y의 이야기다. 그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로 들끓는 도시를 떠나 은퇴 후의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교외에 집을 완성했으나 아내와 딸의 압력에 못 이겨 해외 파견 근무를 거절하지 못해 이웃에게 집 관리를 맡기고 떠나게 된다. 3년간의 타국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가꾼 정원이 엉망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세입자라고 주장하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Y. 하지만 사내는 집을 관리해주겠다던 이웃(장팔식)이 임의로 작성해준 임대 계약서를 내밀며 ‘장팔식에게 따지라’고 막무가내로 버틴다. 이러한 순간 Y는, ‘신중한 사람’이므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심지어 하루에 만 원씩 쳐서 월세를 내고 퀴퀴한 다락방에 기거하며 하루하루 집의 정원을 가꾸고 연못을 고치기에 열심이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한 채 이전의 외형만을 복원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 스스로 편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그럴 때 먹은 것이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서 가끔 쿵쿵 소리 나게 가슴을 때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신중한 사람」)
Y의 신중한 성격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시끄러움과 번잡함을 피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후의 귀촌 생활을 꿈꾸던 소위 ‘합리적이고 평범한’ 회사원인 그의 모습은 우리 시대 현대인의 희비극적 초상이기도 하다. Y뿐만 아니라 「리모컨이 필요해」의 ‘나’도 또 다른 모습의 신중한 사람이다. 떠돌이 시간 강사인 그는 선배의 부담스런 호의를 참아가며 지방의 글쓰기 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한 낡은 여관에 묵게 되는데, 새벽마다 켜지는 텔레비전 알람 때문에 리모컨이 필요한 데도 이를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여관주인에게 항의하지 못한다. “이미 이불 속으로 들어가버린 남자를 귀찮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언가 억울했지만 무엇이 억울한지는 선명하지 않았다”는 ‘나’는 결국 이러한 삶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세상의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못 견뎌하는 그들이 결국 세상의 부조리를 유지시키고 보태는 사람이 되는 아이러니를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부재와 무의미를 일깨우는 과잉진술
이번 소설집에서 인물들이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특징을 보인다면 한편 서술기법 또한 신중함에 신중함을 더하는 과잉기술로 편집증적 재현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서로의 말과 말이 어긋나는 의사소통의 불능 상태를 드러낸다. 특히 「이미, 어디」나 「어디에도 없는」은 진술에 대한 강박적 의심과 의사소통에 대한 완전한 불신이 녹아 있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인가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미, 어디」)
“그는 대부분의 딱히 하는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작가는 화자 ‘나’를 통해 부연하고 첨언하며 길게 늘인다. 이는 ‘아무 일도 안 한다’는 말의 부정확성으로 언어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동시에 ‘무의미’를 증폭시키는 과잉기술로,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 의미적 부재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대상이 뚜렷하지 않은 분노와 억울한 생각과 심한 무기력 가운데서 그는 소리 질렀다. “난 벌써부터 여기 없다고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난 여기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런데 왜 이래. 있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이래.” 비자센터의 직원은 끄떡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흔들릴 만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 기다려보세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어디에도 없는」)
이 소설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의 극단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비자센터에서도 묵고 있는 여관의 주인에게도 “설령 자기에게 불리한 말이라도 해주는 것이 침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호소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묵묵부답이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화자들이 하나같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며 “여기서 ‘불안’은 의사소통의 실패를 예감한 불안이다. 그들은 그 실패의 예감 때문에 필사적으로 말하려고 한다. 어떤 말도 다 말할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속 더 말해야 한다”고 과잉진술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승우의 이번 소설집은 삼엄한 윤리적 자기 성찰을 통해 일상적인 ‘신중함’ 속에 숨겨진 부조리를 들추는 동시에, 주저하고 우회하고 되돌아가는 사유와 논리의 집요한 문장을 통해 생의 한복판에 감추어진 일면의 진실을 끊임없이 일깨우려 하는 수작이다.
작가의 말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사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맷집이 약하고 체력 역시 부실한 편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느라 행동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내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 그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서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는 않았다,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내가 내 인물들을 향해 굳이 사랑을 고백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2014년 여름
이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