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소설의 경계가 또 한 번 확장되었다.
과연 누가 이 독창적인 수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이래 출간하는 책마다 기이하고 극단적인 상상력과 예리한 유머로 독자를 사로잡아온 소설가 박형서의 네번째 소설집 이다.
『끄라비』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박형서의 놀라운 상상력과 발랄한 문장이 어디까지 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박형서의 소설은 지금까지의 잣대로 측량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기 때문이다. 독자는 다만 그가 안내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이야기를 만끽할 뿐이다.
『핸드메이드 픽션』 출간 직후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형서는 오늘날의 소설이 표현 방식에 집착하느라 이야기가 품고 있던 흡인력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박형서는 현대 소설의 기법을 유지한 채 풍만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했던 신화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목차
끄라비
아르판
무한의 흰 벽
티마이오스
Q. E. D.
맥락의 유령
어떤 고요
발문 농담의 악마―박형서를 위하여_장은수
작가의 말
저자
박형서
출판사리뷰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박형서의 이야기들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이래 출간하는 책마다 기이하고 극단적인 상상력과 예리한 유머로 독자를 사로잡아온 소설가 박형서가 네번째 소설집 『끄라비』(문학과지성사, 2014)를 출간했다. 첫 소설집에서 나타난 문제적 작가 탄생의 징후는 두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 『자정의 픽션』은 일종의 지침서를 닮았거나(「논쟁의 기술」) 논문의 형식을 빌린 작품(「「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등을 통해 소설의 내용 못지않게 형식상의 새로움을 집요하게 탐구한 바 있고 세번째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문학동네, 2011)에서는 국물용 멸치가 냉장고를 탈출하거나(「자정의 픽션」)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신해 주인이 좋아했던 여자를 차지하는 등(「갈라파고스」) 기이한 상상력을 펼쳐 보이며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하는 서사론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획을 시도했다. 태국의 전설적인 사창가를 소설에 끌어들여 매춘부나 마약상 등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생기 넘치는 문체로 그려낸 박형서의 첫 장편소설 『새벽의 나나』(문학과지성사, 2010)는 “넘치는 재능을 감지할 수 있는 서술과 시선을 사로잡는 뛰어난 표현, 새롭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거침없는 모색과 체험적 현장성”을 높이 평가받아 작가에게 〈제18회 대산문학상, 2011년〉을 안겨주었다. 이태 뒤 문화관광부가 수여한 〈제44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문단 안팎에서 박형서에게 기대를 품고 있음을 말해주는 한 사례였다. 이번에 출간된 네번째 소설집 『끄라비』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박형서의 놀라운 상상력과 발랄한 문장이 어디까지 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박형서의 소설은 지금까지의 잣대로 측량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기 때문이다. 독자는 다만 그가 안내하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이야기를 만끽할 뿐이다.
상상력 펼치는 동시에 이야기의 본질에 천착
박형서 뒤에는 항상 “뻔뻔한 허풍” “발칙한 상상” 류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 책에 발문을 실은 장은수(편집인)는 아예 박형서를 “농담의 악마”라고까지 부른다. 박형서를 제외한 어떤 작가가 과연 360억 년을 주기로 붕괴와 대폭발을 반복하고 있는 우주에서 다음 우주의 신을 육성한다는 이야기(「티마이오스」)를 해낼 수 있을까. 상대를 깔아뭉개고 의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일견 무모해 보이는 소설(「무한의 흰 벽」)도 박형서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태국의 휴양지로 잘 알려진 ‘끄라비’가 한 여행객을 사랑하고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한다는 설정도 무척 과감하다. “아마추어 수학자”를 자임하며 썼고 실제 수학과 교수에게 검토까지 받았다는 「Q. E. D.」에서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소재를 끌고 와 현란한 지적 유희를 펼친다. 박형서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기발한 상상력과 예리한 위트 이면에 이야기의 본질에 천착하는 진지함이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표절하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르판」과 같은 작품에서 박형서가 제시하고 있는 ‘표현’과 ‘수용’의 문제는 여간 묵직한 게 아니다. 작품을 훔친 주인공의 논리에 의하면 제3세계의 희귀한 언어로 쓴 소설은 읽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고 이를 가져와 훨씬 많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언어와 문화로 각색한 뒤에야 비로소 소설다운 소설이 된다. 표현된 것과 수용되는 것의 간극이 커다란 낙차를 일으키는 장면이다. 『핸드메이드 픽션』 출간 직후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형서는 오늘날의 소설이 표현 방식에 집착하느라 이야기가 품고 있던 흡인력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박형서는 현대 소설의 기법을 유지한 채 풍만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했던 신화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욕망과 폭력을 이야기하는 특별한 은유
박형서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개 폭력 앞에 놓여 있다. 「무한의 흰 벽」의 이른바 고수들은 상대의 공간을 빼앗기 위해 필사적이고 「어떤 고요」 속 청소년 시절의 ‘박형서’는 늘 쥐어터지거나 두들겨 팬다. 그런가 하면 「아르판」의 소설가는 남의 작품을 훔치고 「티마이오스」의 우주는 손쓸 틈 없이 붕괴해버리며 「맥락의 유령」의 ‘나’는 세계와 운명의 실체 없는 질서에 완전히 수긍할 수도 맞설 수도 없는 상태에서 방황한다. 「끄라비」에서 펼쳐지는 폭력은 놀라운 은유로 특히 눈길을 끈다. 한낱 휴양지에 불과한 ‘끄라비’가 여행객인 주인공에게 ‘정념’을 품게 되고 그가 떠날 때마다 기상을 악화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투정을 부린다. 끄라비의 패악은 급기야 주인공이 애인을 데려왔을 때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박형서는 이 독창적인 사례를 가져와 사랑과 애착을 빙자한 폭력을 소개하며 독자에게 의식을 통째로 뒤흔드는 충격을 안겨준다.
끄라비는 나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끄라비는 나를 사랑한 것이었다. 놀란 마음으로 차창에 손바닥을 댔다. 그게 작별의 인사처럼 보였던지, 끄라비가 정념을 거두더니 끄덕끄덕 눈물을 닦았다. 다시 오겠다고 말했으나 좀처럼 믿지 않는 눈치였다. (「끄라비」, p. 24)
무모하고 과감한 시도들의 의미
「Q. E. D.」의 제목 ‘Q. E. D.’는 ‘quod erat demonstrandum’, 즉 ‘이상이 내가 증명하려는 내용이었다’라는 의미로 수학자들이 증명을 마칠 때 찍는 약호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 작품에는 어떤 증명에 일생을 바치는 한 수학자가 등장한다. 파이(π)값은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무한히 늘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지점을 향해 수렴되고 있음을 증명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수학자의 작업은 진척이 보이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제자리다. 포기할 법도 하건만 생활이 파탄 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는데도 막무가내다. 쉽게 짐작하듯 이 수학자, 영원히 ‘Q. E. D.’를 찍지 못한다. 시선을 문학 판으로 돌리면 수학자의 대척점에 박형서가 보인다. 그는 지금 ‘소설’을 파헤치고 있다. 무엇이 소설을 소설이게 하고 또 무엇이 소설 아닌 것을 소설 아니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대의 수많은 성과를 검산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방정식을 개발하는 중이다. 수학자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을 일이란 걸 작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작가의 목적은 시도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그는 우주의 조화를 한눈에 바라보겠다는 인류 시원의 열망을 품고 있다. 그것만으로 박형서의 시도들은 아름답다.
무한수열의 진위는 보다 간단히 검증되어야 하고, 파이와 같은 무리수는 끝없이 변주되는 패턴이 아니라 특이점으로 회귀하는 명확한 공식에 포섭되어야 한다. 천사처럼 순결한 그 값을 얻어냄으로써 〈골드바흐의 추측〉 같은 오랜 골칫거리들이 녹아내릴 것이다. 수의 세계는 한결 아름다워질 것이다. 우주의 조화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Q. E. D.」, p. 182)
자전소설 「어떤 고요」로 담담하게 고백하는 청력 상실의 아픔
박형서는 자전소설 「어떤 고요」를 이번 소설집 맨 마지막에 실었다. 소설은 유아기 때 열병을 앓고 일시적으로 청력을 상실한 사건부터 시작한다. 다행히도 치료가 되지만 이 사건은 그의 성장기를 암울하게 지배한다. 그렇다고 「어떤 고요」가 무척 어둡고 우울한 소설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잠시 학업에 힘쓰느라 무예에 소홀히 했더니 도처에서 주먹이 날아왔다”와 같은 문장을 읽을 때는 일종의 농담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청력 상실이나 청소년기의 방황은 작가 본인에게 분명히 아픈 기억일 텐데도 시종일관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고 등단한 과정은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믿기 어려울 만큼 코믹하다. 그런데 이 농담이 좀 슬프다. 삼십대 초반에 갑자기 다시 찾아온 일시적 청력 상실과 “향후 수 년 이내에”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될 거라는 전문의의 진단 앞에서 마냥 희희덕댈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덤덤하더라도 보는 이는 그 덤덤함에 먹먹해진다.
태생적인 청각기관을 통해서나 알아챌 수 있는 몇몇 특별한 종류의 영감이 아쉽긴 하지만, 나는 배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고요」, p.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