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슬픔은 언제나 가지런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
무한히 떠도는 정겨운 우울들
자취들로 치러내는 질서와의 싸움
등단 이후 12년간 무수한 찬사와 수식에 둘러싸여온 시인이 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을 지닌 “문단의 괴물”이라는 극찬은 ‘시작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 수상과 대중적 인기로까지 이어졌다. 그 시인, 김경주의 네번째 시집 『고래와 수증기』가 출간되었다. 5년 만의 시집이다.
김경주는 언어적 의미 확장이라는 대과제 아래 시집마다 어떤 ‘시도’를 해왔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논리를 무너뜨리고 의미의 틈을 비집든(『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시와 외부 장르를 통합한 형태의 언어 재창조로 두드러지든(『기담』), 언어와 삶 사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의 시차를 이야기하든(『시차의 눈을 달랜다』),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표현되지 않는 ‘불가능한 말들’을 시로써 드러내기 위해 분투해온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다르게’ 떠돌고자 하는 예술적 의지와 욕망”(김행숙)은 여전하지만, 여태의 그가 시적 발명가나 실험가에 가까웠다면, 이번 시집 『고래와 수증기』는 김경주가 지닌 기질에 구도자적 특성을 몇 스푼 더 끼얹은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초기의 산문시에 비해 형식적으로 간결해진 51편의 시들에서, 내놓인 언어만큼이나 표현되지 않은 여백과 행간 역시 읽어내길 유도한다. 연쇄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멈추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유동적이며, 시인이 포착한 ‘순간’에는 ‘순환’이 잠재되어 있다.
지난 세 권의 시집이 시인이 몸을 움직여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여정이었다면, 『고래와 수증기』는 좀더 가까이에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눈 비비고 다시 바라본 작업의 기록이다. 마치 일기(日氣)를 탐구함으로써 더 멀리 헤아리는 천문학자처럼, 김경주는 곁을 살피며 긴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목차
1부 시인의 피
새 떼를 쓸다
Let me in
설맹(雪盲)
백치
햇볕에 살이 지나가네
기척도 없이
머그컵
내 입술 위 순록들
오로라
시인의 피
천둥
13월의 월령체
너무 오래된 이별
정겨운 우울들
그냥 눈물이 나
현대문학
고적운(高積雲)
2부 타다 남은 발
물속에 내리는 눈
타다 남은 발
피아노가 된 나무 4
수형전(手形轉)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걷는 것은
사시(斜視)
시인의 피 4
간절기(間節期)
詩作
비어들
국도
내겐 이름이 없는 만큼 그만큼의 마음도 있어서……
내의(內衣)
명창
진술의 힘
3부 알아
시인의 피 5
아무도 모른다
굴 story
이토록 사소한 글썽거림
한밤의 형광펜
軸
0시의 활주로
백 에이커의 농장, 백 에이커의 숲
4부 늘 발이 차가운 당신처럼
책을 뒤적거리는 삶
알아
자백을 사랑해
본적(本籍)
미운 오리 새끼 말고, 오리털
네 살을 만지러 갈 때
배 짓는 사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해변의 스쿨버스
물이 새듯이
파란 피
해설 | 잠재성의 주재자?조재룡
저자
김경주
출판사리뷰
무한히 순환하는 순간들―“매일 그는 자신이 지은 입김 속에서 증발한다”
김경주의 이번 시집에서는 있지만 없는 것들, 잠시만 있는 것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제목의 “수증기”나 첫 시의 “구름”(「새 떼를 쓸다」)에서부터 마지막 시의 “물거품”(「파란 피」)에까지 다다르는 동안, “입김”은 “문장을 짓”고(「시인의 피」) “물”은 “누구의 일부라도”(「아무도 모른다」)가 되며 “눈”은 “조용한 단어들을 기침”(「이토록 사소한 글썽거림」)하게 한다. 무색무취하고 투명한 액체의 일시적 상태를 이르는 대상들은, 대단한 진리를 포괄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떠한 형태를 띠었다 곧 변해버리고야 말 불안정한 유동성을 나타내기 위해 시인이 도입한 정서의 ‘결’이다. 눈과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물이 증발하여 입김이나 구름 혹은 안개가 되듯이, 질서의 획일성, 진리의 상투성에 반하여 설명할 수 없고 포착할 수 없으며 표현되지 않는 것을 언어에 기대어 시로써 말해내기 위한 선택인 것이다.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 “새 떼”(「새 떼를 쓸다」)나 “순록들”(「내 입술 위 순록들」), 잃어버린 “양 떼”(「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역시 시인의 몸을 통과하여 입가에 문장으로 맺힐 ‘유동성’, 능동적인 ‘잠재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입김이다
그는 모든 장소에 흘러 다닌다
그는 어떤 배역 속에서건 자주 사라진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했지만
한 발이 없는 고양이의 비밀처럼
그는 어디로 나와
어디로 사라지는지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
입김은 수없이 태어나지만
무대에 한 번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
매일 그는 자신이 지은 입김 속에서 증발한다
종일 그는 자신의 입김을 가지고
놀이터를 짓는 사람이다
입김만으로 행렬을 만들고자
그는 일생을 다 낭비한다
한 발을 숨기고 웃는 고양이처럼
남몰래 출생해버릴래
입김을 찾기 위해
가끔 사이렌이 곳곳에 울린다
입김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리 속에서 헤매다가
아무로 모르게 실종되곤 했다
사람들은 생몰을 지우면
쉽게 평등해진다고 믿는다
입김은 문장을 짓고
그곳을 조용히 흘러나왔다
―「시인의 피」 전문
화가가 수몰 지구 앞에서 화폭을 폈다
오래전 물에 잠긴 마을을 그림으로 복원하는 중이다
세필로 댐을 부순다
어떻게 그림 속으로 수몰된 마을을
다시 데려올 것인가
고민 끝에 먼저
그는 물에 잠긴 마을을 그린 후
그림 속에서 물을 점점 비워보기로 했다
[……]
그는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일단 자신의 그림 속으로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몰래 밤을 하나 그려 넣어두었다
물속으로 밤이 천천히 흘러 내려갔다
그 밤을 그린 탓에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어두워진 탓에
그는 다시는 그곳을 찾아가지 못했다
―「굴 story」 부분
정겨운 우울들―“혼자 외로워지기에는 너무도 붐비기 좋은 세계다”
김경주는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등 텍스트를 넘어선 전방위 문화 활동이 시의 외연을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여러 장르에 ‘시적 질감’을 확산시키는 작업을 하면 거기서 시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이 시를 찾아 올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늘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만/우리의 시선은 한 번도 같은 장소에 모여본 적이 없”(「사시(斜視)」)으니, 우리의 시간 또한 정확히 같은 지점에 가닿는 것이 불가능함을 시인은 이미 절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경주의 정서는 그 시차[時/視差]에도 불구하고 멀리 있지 않다. “슬픔은 언제나 가지런한 비밀을 가지고 있”(「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길을 걷는 것은」)고, 우리는 슬픔의 비밀을 조금쯤 공유한다. 겪은 적 없는 고독과 우울에 공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일상적인 언어들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오독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 생각하는 예술이 “타자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가려진, 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다른 진실, 혹은 다른 차원을 만들어가는 것”(〈엔터미디어〉 인터뷰 중)이라면, 이때의 공감은 단순히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창조적 오독이 된다. 김경주는 자신이 던지는 물음에 또 다른 물음을 이어주기를, 나름의 답변들을 계속 던져주기를, 그래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당신 집에는 없고
내 집에 있는 냄비들
당신이 모으는 그릇들
내가 나르는 식기들
당신은 부드러운 베개를 모으고
나는 좁은 소매를 모으지
당신에겐 우람한 오토바이가 있고
나에겐 상냥한 모서리가 있지
당신에게는 없고
나에게 있는 냄새
국자를 까맣게 태우면
나는 눈물이 나지만
당신은 맛있는 밥을 짓지
지금은 장롱 속에 앉아 자는
엄마를 깨울 수 없다
장롱을 골목에 내다 버려도
엄마는 그 속에 앉아 있다
우린 모두 그 집에서
과도처럼 말라갔지
당신 집에는 없고
내 집엔 있는 증오들
나에겐 일요일이 너무 많았고
나에겐 아버지가 너무 많아
당신이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여인들을
모두 아프게 하고 싶었어
당신에게는 없고
나에겐 있는 단추들의 이름
나처럼 웅크린 고양이는
검고 따뜻한 귀마개라 불러줘
내가 꼭 쥐고 자는 열쇠들은
파란 열대어 같아서
불을 끄면
속이불 속에서
귀를 막는 나의 자매들
―「정겨운 우울들」 전문
언제부턴가 신문지는 꽃잎이나
말리는 것으로 사용했는데
오래된 신문을 모아 햇볕에 놓아두면
습기도 날려버리고 소란도 옮겨 놓고
활자들도 구절초나 산국이나 쑥부쟁이처럼
향기도 기슭도 버리고
사나운 시절을 견딜 것 같아 모아두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기사는
시집은 쌉니다
그냥 눈물이 나
나, 그냥
―「그냥 눈물이 나」 부분
세상의 기사(記事)들은 모두 여행기다 내일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특종들,
사건 뒤에 잊힌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다
[……]
우리는
침묵 속에서 자주 만난다 삶은 미묘한 차이를 견디는 일이다 수치심도 없이
―「간절기(間節期)」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