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말’을 가진 모든 인간을 가두는 극단의 체험!
이 비참한 세계에서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을까
2009년 등단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짙은 인상을 남기며 평단의 기대를 받아온 소설가 정용준이 첫번째 소설집 『가나』(2011)에 이어 첫번째 장편소설 『바벨』을 출간하였다. 말이 얼음 결정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는 아름답고 불길한 동화 「얼음의 나라 아이라」로 시작되는 『바벨』은 이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천재 과학자 노아가 말을 결정화하는 실험에 실패한 뒤, 말이 만들어내는 부패하고 냄새나는 펠릿 때문에 사람들이 말문을 닫고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바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과 ‘소통’이라는 언어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런 SF적 상상은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결합해 먹먹하고 절망적인 시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그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바벨』은 (소재적으로는) 종말의 문제를 ‘언어’의 형상화와 소통이라는 문학의 오랜 고민과 더불어 제시하고, (서사적으로는) 종말론적 이야기가 거의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될 선택의 아포리아와 정직하게 대면하며, (주제적으로는) 그 아포리아가 유발할 수 있는 종말론적 염세주의에 손쉽게 투항하지 않은 채 급기야는 어떤 희망이라는 삶의 형식에 도달하고야 만다”(강동호). 말의 무게를 재는 이 한 편의 실험극은 ‘정용준 소설’이라는 거대한 결과와 함께 우리 소설의 새로운 미적 성취를 보여줄 것이다.
사랑에 도달한다는 것은 언어를 나누는 공통 감각의 현장에 두 사람이 함께 입회하여, 근원적인 실존을 나누고 느끼면서, 다시 둘로 나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에 대한 정용준의 끈질긴 천착이야말로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예표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벨』은 여전히 우리가 희망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를 느끼도록 만드는 중이다. 강동호(문학평론가)
목차
프롤로그_ 얼음의 나라 아이라
1부
2부
3부
에필로그
해설_ 희망을 만지는 언어
작가의 말
저자
정용준
출판사리뷰
소설 『바벨』에 대하여 - 소설을 읽기 전에
1. 인물_ “어느 늦겨울 다락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소년의 입술로부터 바벨은 시작된다”
고립과 침묵에 능한 말더듬이 소년 ‘노아’는 어느 추운 겨울날 다락방에서 읽은 동화에서 새로운 언어에 대한 영감을 받는다. 언어생물학자로 성장한 ‘닥터 노아’는 말을 결정화하여 기록하고 전달하는 실험에 매달리지만 실패하여, 모든 사람들이 내뱉은 말의 기운이 가스가 되고 공기 중에서 ‘펠릿’이라는 부패하고 냄새나는 덩어리로 변해 몸에 달라붙는 결과만을 남긴다. 이런 갑작스런 혼돈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노아를 가두고 실험을 종용하지만 노아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기자 ‘요나’ 역시 바벨이라는 시대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비판하지만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어떠한 투쟁도 하지 않는다. 새로운 언어로의 소통을 기대하고 연습하는 모임 레인보에 관여하고 있는 ‘마리’ 역시 바벨의 가능성을 희망한다기보다는 말을 잃고 엄마를 잃은 결핍과 좌절의 또 다른 상징일 뿐이다.
말을 잃었다는 건 언어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절망에 빠져 있다. 이렇게 아무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인물들 사이에서 어떤 사건이 가능할지 소설의 향방은 모호해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무엇보다 명징한 ‘사건’ 펠릿만이 남아 소설을 진행해나간다.
2. 사건_ “펠릿은 정직하고 간결하며 정확합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의미를 전달하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입에서는 아메바 같은 원생동물 모양의 파충류 표피 같은 축축한 물질 ‘펠릿’이 튀어나왔다. 멀쩡한 혀를 가지고도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절망한 채 스스로 혀를 잘라야 했다. 어떤 자제력도 가지지 못한 채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들은(바벨키드) 극단적이고 폭력적이고 자폐적인 성향을 드러냈고 부모들에 의해 혀나 성대에 외과시술을 받거나 말을 하려고 하면 충격이 가해지는 전자 밴드를 목에 걸어야 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어떤 말도 배우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닥터 노아의 처벌을 주장하는 반정부 세력 NOT과 지지 세력 레인보 간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고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이 점차 거친 방식으로 입장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잃은 텅 빈 존재들은 사건 자체로 남지만 이후의 사건을 예견하지는 못한다. NOT이든 레인보든 바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행동 양식일 뿐, 모든 인간은 단지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은, 파국의 시작과 끝은 등장인물의 행위 여부나 그들 간의 분투보다는 ‘바벨’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배경으로 주어진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한다.
3. 배경_ “당신과 저는 그저 바벨을 살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다시 카오스를 맞이한 도시는 치욕을 견디며 침묵한다. 말의 소실로 세상은 진정한 역사의 밤, 세계의 밤을 맞이했다. 언어의 장애는 미래도 현재도 아닌, 서울도 뉴욕도 아닌 ‘이곳’에서 전 인류를 종말의 길로 향하게 한다. 길의 끝에서, 그 벼랑 끝에서 문자 언어만이 간신히 소통의 도구로 기능하는 시대 바벨. 그러나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러한 가상의 상황은 타인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에 무감한 현대인의 모습을 절묘하게 오버랩시킨다. “종말은 미래가 아닌 현재였고 과거였다”라는 소설 속 절규는 선명한 현실 인식으로 남아 이것이 바벨의 결론이고 우리의 결론임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러한 가혹한 상상 속으로 독자를 몰아넣으려는 것일까. 여기서 왜 정용준의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 아니 읽게 하는 추동이 시작된다.
미적 체험으로서의 정용준 소설 읽기
1_가혹하고 가학적인 ‘상상력’
정용준 소설에는 유독 언어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말에 대한 욕망에도 억압과 폭력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인물이 그려진 「굿나잇, 오블로」나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차라리 벙어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말더듬이의 이야기 「떠떠떠, 떠」 등.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말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심이 언어 장애를 겪는 전 인류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말이라는 인간의 욕망과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포획해버리는 가혹한 실험을 한다.
‘단 하나의 욕망’인 ‘말’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이 우울한 공상은 그 정황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공포와 혐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우리를 슬픔 안에 가둔다. ‘말’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소설적 분투가 감정적 격정을 일으키고 얼룩처럼 남아 무게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먹먹해지는 가슴은 물리적 상처처럼, 흉터처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누구도 쉽게 어떤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말’을 가진 인간 모두에게 이 소설은 극단의 체험이다.
2_소설의 몸, ‘문체’와 ‘문장’
종말의 시대를 보여주는 문장들은 계시의 순간처럼 잠언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시적 문체가 한 시대를 말하는 이 소설에서 얼마나 절묘한 문장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말에 대한 오만이 말로써 끔찍한 형벌을 받는 상황은 “역사는 영원한 밤을 맞이했다” “오래전에 시작된 현재”, 그리하여 “종말은 미래가 아닌 현재였고 과거였다”는 문장을 입으며 언어라는 관념적 대상은 물리적 속성을 갖고 살아나게 된다. “역사적 진보의 확신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의 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정확한 문장인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요나와 마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가리켜 “두 사람의 언어가 서로의 언어를 만지는 행위”와 같다는 강동호의 지적은 좀더 효과적으로 정용준의 문장을 대변한다. “『바벨』에서 보여주는 이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는 결정적이다. 종종 우리는 문체를 이야기와 구별되는 어떤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해버릴 때가 있는데, 최소한 정용준의 소설에서 문체는 그야말로 소설의 몸과 같아서 그것만으로 소설의 주제를 체현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배려하면서, 한편으로는 끈질기게 만지려고 접근해가는 작가의 노력이 이렇게 표현되는 중이다.”
3_어떤 한 부분도 지나쳐 읽을 수 없는 내밀한 ‘밀도’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릴 때부터 말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게 말을 할 수 없었고,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장용학과 박상륭은 사변화하고, 편혜영과 백가흠은 사회화하고, 백민석은 탈승화한 그 데스트루도를 정용준은 서정화”(김형중)한다는 지적을 다시 상기해보면, 정용준의 소설이 서정화되는 지점은 소설과 작가의 내밀한 밀착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전에서 나오는 평면적, 서사적 친화가 아닌 자신의 모티프를 꿰뚫고 들어가 앓는 밀착이다. ‘사후의 세계’ ‘SF-우화’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 작가만의 이 방식은 불가능해 보이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만들고야 마는 능력이다. “깊게 파고든 밀도 높은 어둠”으로 작품 읽기는 괴롭지만 끝내 작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힘, 그것은 진실한 한 작가와 나누게 되는 ‘공통 감각’ 때문일 것이다.
『바벨』을 읽고 난 뒤 - 우리에게 남은 문제들
『바벨』로 인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조건 ‘펠릿’이 생겼다. 소설을 통해 말이 화살이 되고, 징그러운 덩어리가 되고, 화려한 무지갯빛을 띠거나 시취보다 무서운 냄새로 변화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소설 속 말더듬이 과학자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예민한 신경을 총동원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억제하기 위해 마음과 혀와 이빨로 싸”워야 할는지 모른다. “인간에게 말은 욕망이고 천성이다” ‘자연적 조건’이다,라고 믿던 우리가 감각을 가진 단어, 육체의 언어, 표정의 언어 펠릿으로 말하게 된다면, 색깔과 냄새, 크기와 형체를 가진 이 정확한 언어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기호적 도구가 아닌 속성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런 언어의 유토피아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실의에 빠진 전 인류에게 날아온 편지와 같은 이 소설은 소통이 부재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을 바라고 기대하기보다 다 읽고 난 뒤 ‘사랑’을 남기는 이 소설은 절망의 시대에도 살아 꿈틀대는 사랑의 현상학, “단조가 없고 슬픈 단어가 없는 노래”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하나. 정용준의 소설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심장의 온기는 다를 것이다.
작가의 말
말이 튀어나오는 이미지는 유년기에 갖고 있던 일종의 망상이었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이 허공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다 갑자기 힘을 잃고 둥둥 떠 있는 것이지요. (민물고기는 바다에 들어가면 숨을 쉬지 못하고 몸을 뒤채며 몸부림치다 죽고 맙니다. 그것과 흡사 합니다.) 형상도, 형체도 없는 것이 마치 살았다가 죽은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도처에 널려 있는 이미지는 어린 시절의 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말할 때마다 뭔가를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아왔습니다. 그 문제를 언젠가는 해결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소설로 쓰게 됐습니다.
소설을 쓰면 해결이 되나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언어가 있어 다행입니다. 언어는 많은 이미지들과 생각들을, 어떤 순간과 긴 이야기를 마치 얼음처럼 얼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하게 얼릴 순 없지요. 밤새 이야기를 만들고 아침마다 깨진 언어가 녹으며 내는 이상하고 괴이한 노래는 슬프고 참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며 사는 게 좋습니다. 그 무엇도 그 기쁨을 앗아갈 순 없습니다. 이 책은 나보다 오래 살게 되겠죠.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내게 삶을 준 부모님과 사랑을 알려준 가족들, 기억과 감각을 전해준 이들 그리고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쓴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