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오로지 나와 언어만이 존재하는 세계
말의 몸, 몸의 말을 향한 깊고 짙은 꿈
‘몸’의 시인이자 ‘수련’의 시인,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뜨거운 상징’을 빚어내온 시인 채호기의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문학과지성사, 2014)이 출간되었다. 198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로 시단에 나와 올해로 등단 26년을 맞은 채호기는 삶의 복판에서 발견한 실체로서의 몸과 그 신체 일부로서의 언어에 천착해왔다. 그는 네번째 시집 『수련』을 분기점으로 말에 대한 탐구를 더욱 본격화했고, 이전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를 통해 독특하고 신비로운 ‘언어’의 이미지를 돌출시키며 이러한 형이상학적 탐색을 심화했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은 언어를 둘러싼 채호기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이 전면화된다. 말에 물질성을 부여하여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이고, 언어를 자기 육체에 안아 밀도 높은 은유를 구사한다. 채호기는 마치 한 명의 구도자처럼 침묵 속에서 정진하며, 언어와 현실이라는 분리되지 않는 두 세계를 함께 살아낸다.
목차
시인의 말
피부가 찢어져 노출되는 글자
창문/눈꺼풀/한밤의 침입/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중얼거림/항구의 목소리/팽창/눈은 생각한다/휴식/타임머신/모자/고통의 또 다른 여정/어서, 어서 해야만 하는데/trumpeter/사막을 걷는다/울 엄마/이별할 수 없는 단어/세상보다 어미가 필요했던/개머리초원/나무/외로운 여우/나비/글자들이 깨무는 너의 살/만년필/의자/잉크병/손가락/다도해/돌/손가락/파르르 떠는 언어들/음악/어떤 페이지/햇, 빛-볕/?/화가와 모델과 그/유리-글자/신경의 통로/물-가시들/검은 물의 운동/검은 돌/애무의 행로/종이에
종이에 박힌 침묵
얼음
해설 | 물질적 언어와 신비 - 박상수 137
저자
채호기
출판사리뷰
말의 몸_물질화된 언어의 세계
시집을 열면 오로지 ‘나-언어’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한없이 펼쳐진다. 시인은 자신과 언어를 제외한 세속의 나머지 것들은 환영으로 분리시켜버리고, “창 없는 흰 벽의 독방”(「팽창」)처럼 내면을 향해 있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구축한다.
흔적일 뿐인 글자에서 그는 흘러나온다.
사실, 그가 흘러나온 게 아니라, 처음에
얼룩이 번진다, 심장 덩어리의 붉은 얼룩?
노란 알전구와 빛의 원추형 입방체? 그 이전의
무엇, 알 수 없는, 그녀를 붙잡는 번짐, 얼룩,
흔들림, 진동…… 이게 다 우연일까? [……]
아무래도 우연이다. 그가 그녀 생각 속의 그와
너무나 달라 그를 알아볼 수 없었고 오물거리는
글자들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그것들―찢어질
듯 팽팽히 잡아당긴 살빛 껍질, 팔 다리 머리
몸통을 마구 구긴 살덩이, [……]
그녀가 치르는 악몽은 그녀가 질 수밖에 없는
그와의 레슬링, 빠져나갈 수 없는 링 안에서
그녀는 붉은 살덩이에 짓눌리고, 일그러진
불안에 사지가 졸린다.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 부분
화자 ‘그녀’는 글자에서 흘러나온 ‘그’와 매일 밤 질 수밖에 없는 레슬링을 벌인다. ‘그’는 글자에서 흘러나온 언어이자 의미 그 자체다. “팔 다리 머리/몸통을 마구 구긴 살덩이”처럼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그’와 화자는 숙명적으로 사투를 계속한다. 그녀(라는 주체)는 영원히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채호기에게 시를 쓰고 언어를 다루는 일 자체가 언어와의 영원한 씨름인 것이다.
몸의 말_ 내 안에서 끌어 올리는 언어와의 조우
당연하게도 ‘나-언어’의 세계에서 언어는 외부자일 수 없다. 이제껏 ‘몸’에 주목해온 시인답게 채호기는 신체의 일부로서 언어를 발견하고 그것이 입술이 열려 말이 태어날 때까지의 과정에 주목한다.
책을 읽다가 밤이라는 단어에 딱 걸린다. 밤이 그 어둠 속으로 시선을 몽땅 빨아들였다. 소리 내어 읽지도 않았는데 입천장에 이빨에 혀에 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 얼얼하다. [……] 살다 보면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 가득 찬 말을 꿀꺽 삼켜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말은 몸 안에서 떠덜다 몸속 어둠보다 더 어둡고 깊은 밤이 된다. [……] 길을 걷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면 주저앉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밤이란 단어를 어루만지며 그 촉감과 소리와 그 양파 같은 의미의 껍질들 앞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나는 지금 그 돌의 살갗을 만지고, 표면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들으며, 내 안의 밤과 마주한 듯하다. 밤비가 내리는 지금 돌은 빗방울을 튕겨내면서 반짝거리지만, 비에 젖고 마침내 얼마간 비를 빨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처럼 나도 얼마간 내 안의 밤과 친숙해지면서 그 밤과 섞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부터 이제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닐지도 모른다. 밤에 돌이 참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 「돌」 부분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 언어의 몸으로서의 돌”을 이야기했던 이전 시집의 연장선에서 이 시는 이해될 수 있다. 책에서 발견한 ‘밤’이라는 단어가 의미에 가 닿기까지, 그 기표와 기의라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몸 안에서 만나 돌로 반짝이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은, 오랜 시간 동안 말에 대해 되묻고 따져 읽으며, 모든 언어활동을 의심하고 전복시켜본 채호기 시인의 오랜 탐구로 가능했던 것이다.
은유의 축제_빙하와 얼음의 말
말의 몸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운 이미지를 시로 빚어내는 긴 여정은, 현실과 분간할 수 없는 깊은 꿈속 단면과 같다. 이렇게 강한 몰입은 시인이 구사하는 독특하지만 친숙한 은유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시인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을 통과한 은유의 장이 시 내부의 오묘한 세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눌러도 눌러도 가라앉지 않고
입안을 미끄러지는 말은 얼음이다.
거대한 유빙이 몸속을 떠다닌다.
-「얼음」 부분
손에 쥐려고 하면 이내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 실체면서 비실체인, 없지만 있는 거대한 것. 그것은 얼음이고, 곧 말이다. 인간은 제 안에 모두 다 거대한 빙산을 친숙한 영혼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노련한 은유의 기법을 통해 오로지 그만이 만들어 보일 수 있는 빙하의 말을 들려준다. 이로써 자기 스스로의 영혼과 마주할 수 있는 자리를 독자들에게 마련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