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근원과 순수를 향한 길고 깊은 앓이들
시인은 앞서 출간한 두 시집 『인디오 여인』과 『지도에 없는 집』을 통해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모든 실제적 욕망들을 차근차근 비워내며 처음의 포용력만을 남기는 미학을 추구해왔다.
곽효환은 삶의 신산한 풍경에 가려진 순수에게 손 내밀고 격변의 틈에서 신음하는 근원을 부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이란 구원자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가깝다. 그러므로 무자비한 개발 논리, 갈등만 쌓여가는 사회, 자본에 눈먼 욕망들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인은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한다”고 고백한다. 이번 시집의 예순여섯 시편들은 시인이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며 다가간 고통의 중심에 서 있다.
곽효환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하는 시선과 자주 마주친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포진해 있는 비합리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매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서쪽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물기둥이나 종로 일대의 재개발 풍경 앞에서 시인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짙은 무기력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1억 4천만 년의 미래 / 늙은 느티나무에 들다 / 통영 / 나의 그늘은 깊다 /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 그해 겨울 / 병상일기 / 백석과 용악을 읽는 시간 / 자작나무 숲에 들다 / 한 사람을 보내다 / 수흐바타르광장에서 / 들꽃의 길 / 시베리아 횡단열차 1 / 시베리아 횡단열차 2 / 숲에 드니 숲의 상처가 보인다 / 바이칼 / 바이칼 사람들
2부
그날 / 늦게 핀 꽃들의 그늘 / 도심의 저녁 식사 / 한 소금꽃나무에 관한 연대기 / 희망버스 / 봄날, 장례식장 가는 길을 묻다 / 피맛길을 보내다 / 어떤 시인 / 됐심더 / 이발소 그림 / 출새곡(出塞曲) / 초원의 길 / 여름 초원 / 칸은 어디에 있는가 / 암장(岩葬)
3부
옛길에서 눈을 감다 / 하늘길의 사람들 / 고원의 아침 / 만년설산 / 사라진 마방 / 인상여강(印象麗江) / 소금호수 / 샹그릴라에서 / 다시 붉은 고원에서 / 시닝(西寧) 가는 길 / 하늘길열차 / 고원의 서쪽 / 고원의 여름 강을 건너다 / 오체투지 / 어떤 동거 / 루샨(廬山)에 들다
4부
만춘 / 봄 숲의 비밀 / 노루목 / 꽃무릇 / 푸른 새벽 강에서 / 무량사에서 / 안부 / 웃는 당신 / 마지막 성묘 / 나의 유년, 여인들의 집 / 오수 사람 / 주차장 프로야구 / 오래된 책 / 흘러 마침내 빛나는 강 / 잃어버린 것과 가져온 것 / 코뿔소 리턴즈 / 다시 경계에서 듣는다
해설 | 북방의 길, 회향(回向)의 시간 · 김수이
저자
곽효환
출판사리뷰
먼저 아프고 오래 앓으며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질문
주저되고 망설여지지만 마주해야 하는 고통의 중심
근원과 순수를 향한 길고 깊은 앓이들
곽효환 시인의 새 시집 『슬픔의 뼈대』가 2014년을 여는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441)으로 출간됐다. 시인은 앞서 출간한 두 시집 『인디오 여인』과 『지도에 없는 집』을 통해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모든 실제적 욕망들을 차근차근 비워내며 처음의 포용력만을 남기는 미학을 추구해왔다. 곽효환은 삶의 신산한 풍경에 가려진 순수에게 손 내밀고 격변의 틈에서 신음하는 근원을 부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이란 구원자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가깝다. 그러므로 무자비한 개발 논리, 갈등만 쌓여가는 사회, 자본에 눈먼 욕망들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인은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한다”(표4)고 고백한다. 이번 시집의 예순여섯 시편들은 시인이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며 다가간 고통의 중심에 서 있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곽효환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하는 시선과 자주 마주친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포진해 있는 비합리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매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서쪽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물기둥’(「늦게 핀 꽃들의 저녁」)이나 종로 일대의 재개발 풍경(「피맛길을 보내다」) 앞에서 시인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짙은 무기력이다. 시인의 번뇌는 「도심의 저녁 식사」에서 좀더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대결할 상대는 ‘창밖 하늘 아득한 곳까지 닿아 있는 타워크레인’처럼 위압적이다. 그에 비해 시인은 가장 낮은 곳, 텅 빈 식당에 홀로 앉아 있는 나약한 사무원일 뿐이다. “해고는 살인”과 같은 거친 표어도 “식은 국밥의 굳은 기름”처럼 감동 없이 들린다. 그러나 끝내 시인은 목이 메어 밥알을 삼키지 못한다. ‘시인의 말’에서 적어뒀듯이 “내내 담담하고자 했으나” “더러 울기도” 하는 순간이다. 이미 이곳을 영영 떠났거나 겨우 견디면서 시들어가는 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소리 없이 반복해 외친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윤동주를 떠올린다면 비약일까. 그러나 곽효환이 「병상일기」에서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라고, 윤동주의 「병원」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며 한탄한 것을 그저 가볍게 보아 넘길 독자는 없을 것이다.
저물녘 텅 빈 식당 한켠에 구겨져 앉은 그림자 하나
삼켜지지 않는 입안 가득한 밥을 씹는다
홀로 마주한 밥상의 서걱거리는 밥알들
씹다 만 깍두기처럼 겉도는 말들
떠도는 말들과 부유하는 진실을 삼키는
여름날, 목메는 도심의 저녁 식사
「도심의 저녁 식사」 부분
무수한 날들과 계절을 품고 마침내 숲이 되다
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아픈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낙관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낙관의 근거는 시인이 자주 호출하는 북방의 곳곳에 새겨져 있다. 자연 지리상의 북방은 사시사철 폭설과 한파를 견뎌야 하는 땅인가 하면 한없이 메마르고 거친 고통의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은 척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삶의 터전이며 고달프고 벅찬 이야기가 두텁게 쌓여온 곳, 세상살이의 따스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땅, 사랑의 궁극이 숨 쉬는 장소이며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시원이다.
가지가 꺾이고 몸통이 휘고 부러지고
끝내는 쓰러진
상처투성이의 북방 침엽수림에서 나를 본다
혹독한 겨울의 잔해를 떠안은 설해목들
숲은 서늘한 사랑으로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숲에 드니 상처가 보인다」 부분
곽효환의 북방은 자연의 엄혹함에 맞서 생사를 걸어야 하는 치열한 전장임과 동시에 낭만적 유토피아다. 그런데 그 북방이 지금 이곳, 즉 대한민국 서울의 모습과 자주 겹쳐진다. 서울의 피맛골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피맛길을 보내다」) 차마고도에서는 소금과 차를 싣고 노새를 끌던 마방이 사라지(「사라진 마방」)고 있다. 그러므로 곽효환의 북방을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곳의 거울이자 이데아의 확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에게는 북방이든 어디든 현재란 늘 고통의 연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잃는 시간의 장소다. 하지만 그 마지막 어딘가에는 숲이 있을 거라고 시인은 웅변한다. 그리고 시인의 마음은 이미 숲의 일원이 되어 “서늘한 사랑으로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다시 한 번 처음의 포용력을 되찾는 순간이다.
시인의 말
길의 끝
북방의 시원
그리고 사랑의 궁극에는
무엇이 있을까.
백석과 용악과 신문,
내 글쓰기의 스승들과 동행하며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멀고 긴 여정 속에서
내내 담담하고자 했으나
그늘 깊은 곳에서는
더러 울기도 했다.
시인의 산문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첫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월레 소잉카는 “내 소설은 병에 대한 치료약이 아니라 두통거리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참이 더 지난 오늘에도 나는 여전히 시의 길을 묻는다. 시인은 아니 나는 소심한 겁쟁이다.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하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한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느냐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그리고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냐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용기 있게 먼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망설이고 주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골똘히 사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며 사유한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불화의 지점에서 먼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혹은 대신 아파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나는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