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생활의 깜냥을 끝없이 복기하는 낮
말과 詩에 대해 끝없이 반성하는 밤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시인 윤병무의 시집 이다. 서정시적 문법을 다양하게 변용하는 시적 개성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5분의 추억』(2000) 이후 13년 만에 묶는 두번째 시집이다.
그의 시에는 일상의 서정이 담겨 있다. 슬픔의 윤리학을 통한 도덕적 지향, 이것이 윤병무 시의 핵심이고 그의 생활이 추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고단하고 때로 비루한 삶의 하중을 두 어깨로 버텨내며, 생활하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삶 자체의 슬픔을 겨냥한 시들은 소박하면서도 통절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다. 바로 그 슬픔을 윤리의식 삼아 인간 삶의 보편성과 마주하려는 한 도덕적 자아가 여기에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낮
예기 11
하얀 돌 12
눈곱 13
예언 14
수박 16
후유증 19
엄마 은행나무 20
나무의 말 21
아버지의 나무 22
장맛비의 운율 24
숲속이용원 27
비타민 C 30
어버이날 31
저작권 32
인스턴트 카페라테 34
독고다이 노숙인 36
유전(遺傳) 38
책의 연혁 40
생신 선물 42
마늘종장아찌 44
외식 46
졸음운전 48
배드민턴장에 가는 진짜 이유 50
시작(詩作) 53
복권방에서 54
개 인형 56
오늘 57
2부 밤
고단(孤單) 61
불의 눈물 62
반달 64
나무목걸이 66
귀갓길 2 68
엄마 69
스타트 전구처럼 70
별리 72
혼자 부르는 노래 74
잠꼬대 76
상처 77
하얀 석상 78
노래방 도우미 79
양파 80
신촌에서 82
귀갓길 3 84
혼자 먹는 밥 86
타석증(唾石症) 88
빙그레투게더 90
유전 욕망 92
통감의 속도 94
명함 96
불고기 전골 98
하늘나라 열매 101
서울 나들이 102
유일한 전화번호 105
반포치킨에서 108
행인 110
양말 111
맥주 112
이빨 114
생활 116
인성의 비교급 118
발문| 슬픔의 윤리학 ?함성호 120
저자
윤병무
출판사리뷰
생활의 깜냥을 끝없이 복기하는 낮
詩의 말을 끝없이 반성하는 밤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시인 윤병무의 시집 『고단』(문학과지성사, 2013)이 출간됐다. “서정시적 문법을 다양하게 변용하는 시적 개성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 첫 시집 『5분의 추억』(2000) 이후 꼬박 13년을 두고 다시 묶은 두번째 시집이다. 등단 20년에 가까워가는 그의 시력에 단 한 권의 시집은 어쩌면 직무유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책의 연혁’에 마음 둘 줄 아는 출판편집인과 살뜰한 네 식구의 가장으로서 그의 삶은 결코 게으르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집 『고단』에는 일상의 서정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슬픔의 윤리학을 통한 도덕적 지향, 이것이 윤병무 시의 핵심이고 그의 생활이 추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고단하고 때로 비루한 삶의 하중을 두 어깨로 버텨내며, 생활하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삶 자체의 슬픔을 겨냥한 시들은 소박하면서도 통절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다. 바로 그 슬픔을 윤리의식 삼아 인간 삶의 보편성을 응시하게 하는 도덕적 자아를 만나보자.
한낮의 시간 ― 바깥의 경험, 삶의 아이러니
어둠에서 일어나 “먼동처럼 천천히 눈을”(「숲속이용원」) 뜬 시인은 간밤에 꾼 꿈을 비릿한 자신의 눈물자국으로 더듬는다. 그의 낮 시간은 지난밤, 지나온 시간과 장소, 마주해온 사람과 사물의 흔적 즉 일상의 공간을 묘사하고 시간의 뿌리가 뻗어 나가는 것을 추적하느라 소리 없이 부산하다.
언젠가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적중했다
이미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버렸다
검은 커튼이 마저 내려지면
어둠 속에서 들리는 아우성
보이지 않는, 맥락 모를 말발굽 소리
귓전 스치는 행방 알 수 없는 화살 소리여
당장은 나의 과녁을 피해다오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만이라도 (「예기」 전문)
한자를 덧입힌 보통명사와 직유로 점철된 일상의 소묘― 상복(喪服) 같은 빨래, 빨랫비누 쪼가리 같은 눈곱, 문신(文身) 같은 상처, 아침 해 같은 옹알이, 바싹 마른 북어 같은 몸, 연(鳶)처럼 사라진 감각, 끝내 벗겨지지 않는 눅눅한 땅콩 같은 인생(人生), 손가락질하는 경적, 아스팔트 뚫고 올라온 죽순 같은 자존심 ―가 화자의 실존을 돋을새김한다.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에 있을 때, 심지어 잠잘 때조차 온전하게 쉬어본 적 없는 시적 화자―어쩌면 현대인 대다수―는 고작 이발소 의자 위에 누워 춘몽(春夢)을 즐길 때라야, 찰나이긴 하나, 비로소 온전한 쉼을 만끽한다. 생활의 서정은 천성이 쓸쓸하고 허전한 것일까. 달리 슬픔으로 바꿔 부를 때 존재는 더욱 핍진(乏盡)해진다.
눈곱은 지난밤 꿈의 장르만 가늠케 해줍니다
세숫물로 눈곱을 닦아내며 알 수 있는 것은
슬픔은 비누와 닮았다는 겁니다
슬픔에 물 마르면
담장 아래 버려진 빨랫비누 쪼가리처럼 눈곱이 되고
슬픔에 물 닿으면
미끌미끌 닳아집니다 (「눈곱」 부분)
나는 왜 이렇게 사는지
오래전 통근열차 탈 때도
쇠바퀴 굴러가기 직전에서야 겨우 승차한 적 한두 번이었던가 (「인스턴트 카페라테」 부분)
그렇게 불행(不幸)과 다행(多幸) 사이를 진종일 오가는 시인의 시선이 동네 산책길의 느티나무 한 그루에 멈춰 선다. 정확하게는 베어지고 밑동만 간신히 남은 나무다. 줄기며 가지, 이파리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도 여전히 맑고 끈끈한 진액이 올라오고 있는 그루터기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속에 ‘헛짓’이 화살처럼 와 박힌다. 마치 “머뭇거리다가 한순간 간명해지는”(「배드민턴장에 가는 진짜 이유」) 작심의 운명이 그러하듯, “헛짓이기에.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이미 사라지거나 여전히 생성되지 않는 것들을 향해 무모하게도 이를 곳 없는 진액을 뽑아 올리”(뒤표지 산문)듯 시를 쓰겠노라고.
이만한 일로 갑자기
설사처럼 시가 마구 써지다니
변비 같던 실어증은 느닷없이 치유되는가
빈손을 사이에 두고
입은 쓰고 항문은 맵다 (「시작(詩作)」 전문)
뭐든 설렘에서 활시위를 당기지만
자칫 과녁에 적중하는 순간
주삿바늘의 통증도 좋은 아편쟁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다면
그 맛을 몰랐을 거고 이후 내내
살맛이 안 났을 것을 (「배드민턴장에 가는 진짜 이유」 부분)
“유용한 것들은 하나같이 자연(自然)의 시간을 다 채우지”(「엄마 은행나무」) 못하지만, 누구나 한 번뿐인 오늘의 삶은 핍진(逼眞)하다. 그의 몸은 소시민의 외투에 감싸여 있지만 그의 미망(未忘/迷妄)은 시(/시작)에 불들려 “그 바람처럼 나도 이 세상 잠시 빌려/가끔 종잇장 구기고”(「저작권」) 있다. 그리하여 “그칠 줄 모르는 폭설을 견디고 있는 소나무처럼” 꺾이기 전까지 시인은 “겨울 가고 부러진 가지에 돋는 송진처럼 진물 맺히면/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문신(文身) 같은/상처가 손바닥을”예언과 마주”하고 “제 차례가 올 때까지/혼자 준비”(「예언」)하겠노라 다짐한다.
한밤의 꿈―외발자전거 위의 삶, 혼자 부르는 노래
윤병무의 시에서 밤은 일과와 책임에 붙들린 한낮의 시간에 비하면 자기 내면의 소통과 어둠 속 혼자 부르는 노래로 수런거린다. 그리고 이런 그의 자기반성은 타인에 대한 미련과 이해로 한발 더 들어간다. 집밖에 그리고 거리에 나뒹구는 타인들의 풍경(‘불 꺼진 집 차양 아래 캐시밀론 담요 뒤집어쓴 나이 든 여인’ ‘늘 겨울옷 차림의 노숙인’ ‘한밤 현관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정신 나간 소녀’ ‘죽은 엄마 곁에서 일주일 뒤 발견된 어린아이’ ‘낮밤 가릴 것 없이 쉼 없이 탬버린을 쳐대는 노래방 도우미’ ‘태극기를 팔고 있는 신촌 노점상 할아버지’)에서 그는 이렇게 읽어내고 있다.
맥줏집 얼음 속에 꽂힌 맥주병들 아래서
간간히 녹아 무너져 내리는 얼음들처럼
나는 왜 항상 뒤늦게 생각하는가
상황은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
나의 뇌파는 수명 다된 스타트 전구처럼
보랏빛으로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스타트 전구처럼」 부분)
주위 사람들 내 맘 같지 않다고
비탄해할 것 없네
외로운 길 가다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 닮은 이는 곳곳에 있고 (「행인」 부분)
멀리 있는 시간(/기억)을 가까운 곁으로 끌어와 앉히는 윤병무의 시어와 시구가 그 평이함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파장은 오래 지속된다. 텅 빈 밤, 누구나 혼자일 수 있고, 그래서 고독할 수 있고, 그래서 착하건 악해지건 딱히 간섭받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다.
가장 믿을 만한 하얀 돌을 골라
속내를 털어놓고 저도 돌이 되겠습니다 (「하얀 돌」 부분)
돌 속에 속내를 털어놓은 그이는 춥습니다
겨울바람에 잎 없는 나무들 흔들리고
맨발에 콘크리트 기온 잠겨 있습니다
밤새 그이는 밖에 서 있습니다 (「하얀 석상」 부분)
생활의 서정, 슬픔의 윤리학
보편적인 삶에서 찰나의 사건을 포착하고, 말(시어)을 길어내며 기어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약점을 굳이 밝히자면 윤리적 책임에서 한순간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 단적으로 그의 시적화자는 착하다. 약삭빠르게 일처리하고 자기 잇속 챙기는 사람이 ‘난놈’이라는 세상인심에서 그는 한참 비껴서 있다. 구어체에 담긴 부부의 한밤 풍경은 또 얼마나 적요(寂寥)하고 다정한지.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손 놓겠지만
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
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고단(孤單)」 부분)
어쩌면 그의 두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고단함은 생의 진짜와 가짜를 관통해본 자에게 유독 혹독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영리한 것보다는 정의로운 게/정의로운 것보다는 착한 게 낫다”(「인성의 비교급」)고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보는 것이 진실이다”고 믿는 사람이므로. 그 와중에 어둠이 짙은 적막한 밤길에 달랑 ‘반달’ 하나만 청하는 ‘나’의 생(生)과 시(詩)를 향한 다짐은 어느 때보다 결연하고 그래서 소중하게 다가온다.
우두커니 저는
오래된 갈림길에 서 있어요
다시 명백하게 말하자면
생(生)은 진짜이고
활(活)은 가짜예요
생은 가라 하고
활은 보라 해요
아, 피에로처럼 울면서 웃어요 (「생활」 부분)
외발자전거 위에서조차 홀로가 아닌 생(生)이여
부단히 페달 굴려야 하는 피에로처럼
나는 이참에 이 목걸이를 부적으로 삼겠다
팔은 허공에, 몸통은 바퀴 위에, 눈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직시하리라 그러고는
불 붙여놓은 둥근 터널을 통과하리라 (「나무목걸이」 부분)
낮과 밤의 거리 재 화음(和音) 넣어보지만/자꾸 클라이맥스에서 놓쳐요/목이 메어와 따라 부를 수 없어요/그래도 생활처럼 노래는 계속되고/작별하고 울지 않고 헌화하고 비밀을 속삭여요/그래요 생(生)은 단지 몇 소절만 남는 거예요 (「혼자 부르는 노래」 부분)
[시인의 말]
다 말하지 않는 것
하지만 멈칫하지 않는 것
그래서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
그러므로 식감이 낯선 말이 되는 것
이라고 썼다.
책임져야 하는데 깜냥보다 말이 세다.
2013년 초겨울
윤병무
[시인 산문]
우리 동네 산책길에 큰 느티나무 한 그루. 어느 날 그루터기만 남았다. 병들어 베어냈는지 밑동만 남은 나무는 사라진 줄기며 가지며 푸른 이파리가 아직도 함께인 것으로 여기는지 여러 날이 지나도 나이테 빼곡한 그루터기에 맑고 끈끈한 나뭇진을 짜 올리고 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끝내 부화하지 못한 알을 계속 다리 사이에 품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아비 펭귄처럼 자꾸만 헛짓을 하는 것이다.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들 중 가만히 앉아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은 드물다, 헛짓이기에.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이미 사라지거나 여전히 생성되지 않는 것들을 향해 무모하게도 이를 곳 없는 진액을 뽑아 올리고 있는, 꼼짝 않고 다리 사이에서 얼어버린 알을 품고 있는 헛짓들로 문신을 새기리라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헛짓에 일가견 있는 선배 시인을 기쁘게 만나고 한밤중 귀가하다가 혼자 보도블록에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내 왼쪽 눈썹에는 초승달 모양의 제법 큰 문신이 저절로 생겼다. 다행(多幸)이다. 비로소 해의 빛으로 밝은 달빛 아래 등걸의 둥근 물기를, 사라진 나무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