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불가능한 슬픔을 쥐고 아낌없는 혼자가 되는 시간,
세상의 나머지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순간
1995년 등단 이후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선보여 온 특유의 바닥없는 ‘슬픔’과 깊고 조용한 ‘응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생의 안팎에 새겨져 있는 특유의 ‘절박함’이 여전한 이번 시집에서 이병률은 이러한 감정과 정서보다 더 근원적인 지점을 찾아 나선다.
자신, 어쩌면 당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어떤 ‘현’ 하나를 슬쩍 건드리고 그 진동을 통해 돌연 드러나는 ‘존재’를 고찰하는 일, 그 ‘존재’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처연(悽然)을 묻고 또 묻는 일로 시인의 행보는 정처가 없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일은 자신을 확인하고 동시에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이란 지독한 그리움이고 슬픔이지만, 슬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일이 곧 사람의 마음을 키우는 내면의 힘이 된다. 그러니까 이병률의 슬픔은, 힘이다.
불가능성 앞에서 그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을 쥐고, 그 힘으로 서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가 잠시 머무르는 곳 ‘눈사람 여관’은 모두가 객체가 되는 공간이자 타인의 삶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처소이며 스스로 “세상의 나머지”가 되는 그곳이다.
목차
1부
사람
혼자
진동하는 사람
시는
사랑
침묵여관
면면
불가능한 것들
저녁의 운명
어떤 궁리
내 손목이 슬프다고 말한다
그자
새
가늠
알겠지만
저녁을 단련함
꽃제비
금과 소금
여진(餘震)
눈치의 온도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2부
북강변
전부
시월의 장소
몸살
물의 박물관
음력 삼월의 눈
시의 지도
여름 감기
맨발의 여관
아파도 가까이
마음의 기차역
애별(愛別)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
낙화
고름
찬 불꽃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표정
이사
함박눈
3부
그 사람은
비정한 산책
출렁
그런 봄
천사의 얼룩
눈사람 여관
붉고 찬란한 당신을
다섯 손가락
비행기의 실종
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백 년
내심
세상의 나머지
저녁 길
여행의 역사
설국
흰
겨울
벽
여지(餘地)
끝 맛
발문 | 조용한 거리(距離)?유희경(시인)
저자
이병률 (지은이)
출판사리뷰
불가능한 슬픔을 쥐고 아낌없는 혼자가 되는 시간,
세상의 나머지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순간
찰나에서 찬란을 발견해내는 시인 이병률의 새 시집 『눈사람 여관』(시인선 434, 문학과지성사 2013)이 출간되었다. 1995년 등단 이후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선보여 온 특유의 바닥없는 ‘슬픔’과 깊고 조용한 ‘응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생의 안팎에 새겨져 있는 특유의 ‘절박함’이 여전한 이번 시집에서 이병률은 이러한 감정과 정서보다 더 근원적인 지점을 찾아 나선다. 자신, 어쩌면 당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어떤 ‘현’ 하나를 슬쩍 건드리고 그 진동을 통해 돌연 드러나는 ‘존재’를 고찰하는 일, 그 ‘존재’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처연(悽然)을 묻고 또 묻는 일로 시인의 행보는 정처가 없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에게로 향한다. 혼자됨을 주저하지 않는 그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일은 자신을 확인하고 동시에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기에.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이란 지독한 그리움이고 슬픔이지만, 슬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일이 곧 사람의 마음을 키우는 내면의 힘이 된다. 그러니까 이병률의 슬픔은, 힘이다. 불가능성 앞에서 그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을 쥐고, 그 힘으로 서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그러니 마음의 마음이여/모든 세계는 열리는 쪽/그러나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모든 세계는 당신을 생각하는 쪽/모든 열쇠의 쓰임은 당신 허망한 손에 쥐여지는 쪽”―「불가능한 것들」). 그가 잠시 머무르는 곳 ‘눈사람 여관’은 모두가 객체가 되는 공간이자 타인의 삶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처소이며 스스로 “세상의 나머지”가 되는 그곳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 돌입하여 다다른 이병률의 시 세계는 격렬한 감정의 파고 없이도, 무표정한 은유와 담담한 서사만으로도 가닿는 곳, 그에게도 혹은 우리에게도 익숙하고도 낯선 마음의 풍경이다.
가늠
종이를 깔고 잤다
누우면 얼마나 뒤척이는지 알기 위하여
나는 처음의 맨 처음인 적 있었나
그 오래전 옛날인 적도 없었다 ― 「가늠」 부분
가늠은 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려보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늠은 오롯하게 혼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절차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가늠해본다. 자신과 자신의 시가 어디쯤 있는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진행되고 있는 방향이 같은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지 알고 싶어 한다(“말할 수 없는 저녁에/ 가만가만 목메는 저녁 한가운데다/ 나비가 두 장으로 펄럭거리며 날다가/ 삶에 문득 관여하여서/ 담벼락의 장미향들을 물러나게 하면/ 그것으로도 시는 아닌가/ 그렇다면 시는 또 미안해서 오는 것인가”―「시는」). 그렇기에 어떤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쓴다(“저녁의 바닥을 향해 서 있는 것 모두를/ 진창이라 여기지 않아도 되겠다// 서서히 가려우므로 괜찮아진다/ 하물며 최선도 지나간다// 피하느니/ 제법 지나갈 것이다”―「저녁을 단련함」). 시인은 자기 자신을 조용히 성찰하면서 자주 망연해지기도 한다(“깊숙이 나를 넣고 나를 열망했지요/ 불경의 좌우는 나를 붙잡기도/ 자르고 붙이기도 했어요// 지금으로도 그다음으로도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내가 한 생을 살면서 읽고 사용하였던 세계는/ 어둠 속 구석지에서 길을 잃어/ 더듬더듬 기어오르려 했던/ 엎어놓은 계란의 반쪽 껍데기 속”―「알겠지만」).
한편 가늠은 문득 뒤를 돌아보는 사람에게 허락된 행위이기도 하다(“뒤늦게 더듬어서라도 다 볼 수 있다면/ 아무것 없이도 아름다우리라고/ 대륙의 끝으로 자신을 끌고 가/ 한없이 데리고 울다 지친 이// 그가 들썩일 때마다 뒷문이 울린다”―「여진(餘震)」). 어김없이 적절한 거리와 적당한 때를 필요로 하는 이 일은 말이나 각오처럼 쉽지 않기에 육체가 허물어지는 몸살을 수반하기도 한다(“한번 녹으면 영원히 얼지 못하는 얼음처럼/ 한번 아픈 것이 영원히 낫지 않는다/ 낫지 않으니 축적이다/ 독을 내몰고 새 독을 품으려니 갱신이다”―「몸살」). 때로 고통스런 이 행위의 결과가 너무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일 때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차오르는 건 슬픔이겠다. 그러나 이 순간, 차갑고 단단한 시간 속의 시인은 인간은 결국 지극한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만이(“나는 한사코 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나에게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이다”―「나는 나만을 생각하고」) 시인이 자신의 맨 처음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기라도 하듯이.
혼자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혼자」 부분
왜 혼자여야 할까. 혼자가 내포하는 의미들은 여럿일 테지만 이 시집 속에서 이병률은 사소하다. 끊임없이 망설이고 결국엔 모르겠다 고백하는 시인이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는 그 때문에 여기에는 깨달음으로써 초자아의 영역에 다가가는 단독자가 설 자리는 없다. 또 한편으로 나르시시스트로서의 혼자가 있다. 이것 역시 시인 이병률과 나란히 놓기엔 적당하지 않다. 시 안에서 그는 담담하게 세상의 구석지에 자신을 가져다 놓는다(“시를 모른다 하더니 나조차 모르는 당신을 앞에 두고/ 많은 막걸리를 마시었다/ 내 얼굴을 가리기엔 막걸리 잔이 좋아서였다// 넘기려 했으나 쓴 찻물처럼 넘겨지지 않는 시간을 넘기고/ 혼자서 다시 찾은 밤 공원”―「시의 지도」). 여기에 애당초 성스러움 따위는 없다.
이번 시집 전편에 가득한 ‘나’는, 그러니까 가늠하여 드러난 시인은 맞춰지지 않는 퍼즐조각처럼 문득, 남아 있는 존재이다. 사회 속에서 개인이 맺고 있는 무수한 ‘관계들’을 거둬낸 그저 ‘사람’이다. 이는 시인이 자주 떠나는 여행과 비슷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익숙해지기 전에 벗어나는 것. 그럼으로써 맨몸의 자신을 발견하는 행위 말이다(“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나는 불편한 사람/ 불난 계절을 막 진압하고도/어쩌면 간절히/ 어느 멀리 멀리서 살기 위해/ 돌고 돌다/ 나를 마주치더라도/ 나는 나여서 불편한 사람//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려는 수작을 부리는/ 나는 당신 한 사람으로부터 진동을 배우려는 사람/ 그리하여 그 자장으로 지구의 벽 하나를 멍들이는 사람”―「진동하는 사람」). 시를 통해 그는 온전히 ‘한’ 사람이 되는데, 그것은 세상과 불화하는 존재가 아닌, 일치/불일치 혹은 화해/불화 이전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혼자서 떠난다. 떠남으로써, 시적으로 최초의 인간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 시를 쓰게 만드는가. 무엇이 그를 온전히 시인이게 하는가. 스스로를 외롭게 유폐시키면서 그는 시를 쓸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낸다(“모든 죽음은 이 생의 외로움과 결부돼 있고/ 그 죽음의 사실조차도 외로움이 지키는 것/ 그러니 아무리 빚이 많더라도 나는/ 세상의 나머지를 거슬러 받아야겠다”―「세상의 나머지」). 결과의 실패와 성공을 논하는 일이 그에게는 의미가 없다. 화려한 수사나 비유가 필요치 않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시의 처음, 시의 씨앗이 인식의 영토 안에 심겨 처음-그 연둣빛 싹을 틔우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병률의 새 시집 『눈사람 여관』의 시들은 시가 시로 씌어지기 전 그 처음의 과정에 집중한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슬프고, 아프며, 깨끗하고, 황홀하다. 그의 새롭지 않은 시 쓰기가 전혀 새로운 과정으로 탄생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다(“최초의 나무 한 그루가 우리 손발짓과/ 가리키는 곳을 관장한다고 합시다/ 손끝을 모은 한가로운 모든 것들을 흰색으로 칩시다// 근본이 벌어진 틈을 타/ 온전히 혼자인 스스로를 설득하고// 밥을 욱여넣는 것처럼 사랑할 때나/ 생각의 절반을 갈아 치우게 하는 달력의 일들/ 모두가 흰색이었다 합시다”―「흰」).
눈사람 여관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눈사람 여관」 부분
시인의 발걸음은 이제 여관으로 향한다. 이 순간 그와 동행하는 이는 쉽게 녹아 없어질 눈사람이다. 체온이 닿는 순간 녹아내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인 눈사람은 어쩌면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객관적 거리란 논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돌이킬 수 없으려니/ 너무 많은 것을 몰라라 하고 온다// 그냥 사각의 방/ 하지만 네 각이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제 마음에 따라 여섯 각이기도 한 방// 어느 이름 없는 별에 홀로 살러 들어가려는 것처럼/ 몰두하여/ 좀이 슬어야겠다는 것/ 그 또한 불멸의 습(習)인 것”―「침묵여관」). 그토록 허무한 자신과 맺는 계약은 사라짐을 예비한다. 이 눈사람과 함께 드는 여관에서 시인은,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는 인식을 재확인한다. 이것은 차갑도록 냉철한 인식이면서, 이렇다 할 세간이 없는 여관의 방바닥을 비추는 전구처럼 뜨겁고 명확한 인식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발문에서 시인 유희경은 “어쩌면 관계의 맨 처음, 가장 순수한 형태인 당신을 눈사람으로 여기는” 존재, “시간이 지나며 사라져버리는 존재. 그럼으로써 나 역시 휑뎅그렁하니 남게 만드는 존재”를 시인으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 혹은 그들이 함께 드는 여관을 “모두가 객체가 되는 공간, 타인의 삶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처소”라고 부른다. 이 글에 따르면 여관이란 아무도 없는 혼자여서, 모두를 ‘끔찍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속살을 위해 울 때도 있음을 아는 밤// 할 말이 있음은 안다/ 몇몇 밤은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고/ 내 반경은 넓게 감정을 반죽하려 들지 않겠지만/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마지막을 맞대야 하는 것쯤은 안다”―「벽」). 이곳이야말로 온전한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무표정의 은유와 서사만으로 닿을 수 있는 익숙하지만 낯선 생의 이면이다(“손바닥으로 쓸면 소리가 약한 것이/ 손등으로 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삶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면면」).
그러니 시인이 혼자가 되는 행위는 다시 말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버리는 대신 그것 혹은 그와 멀어짐으로써 가까워진다는 관계의 역설이자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시적 행위이고 또 시적 사유에 해당한다. 너무도 명확해 보이지만 부조리로 가득하고, 그럼에도 일말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는 내면의 세계, 어쩌면 시가 존재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시집 『눈사람 여관』에서 돌올하게 그려지는 시인의 생각과 태도는 분명 세련된 도자기나 투박한 질그릇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부드러운 무형의 선과 거친 감촉을 지닌 진흙에 가깝다. 적어도 『눈사람 여관』에 담긴 시들은 그러하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을 세상의 나머지라 부르겠다”면 “세월이 나의 뺨을 후려치더라도 건달이며 전속 시인으로 남아 있을” 요량이라면, 그러한 시인의 각오는 이렇게 복기된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전부」).
[시인의 말]
삶과 죄를 비벼 먹을 것이다.
세월이 나의 뺨을 후려치더라도
나는 건달이며 전속 시인으로 있을 것이다.
2013년 초가을 이병률
[시인의 산문]
아픈 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ㅏ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시집 맨 앞에 붙일 헌사에 대해 생각했다.
‘불[火]에게’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不)에게’라고 썼다.
붙들고 싶은 것은 불[火]이겠지만
여전히 나에겐 불가능한 것들이 많음을 안다.
어떤 이유도 없이 헌사를 넣지 않기로 했다.
그리 마음을 정하니 불(不)이라는 말이 가까이 있어 좋다.
무엇에도 닿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말은 있다.
어쩌자고 불[火]이라 써놓고 불(不)이라고 읽는다.
아무리 무심하려 해봤자 어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을 세상의 나머지라 부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