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신체에 달라붙은 ‘모종의’ 느낌
취향이라 단정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의 세계
하성란의 다섯번째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네번째 소설집 『웨하스』(2006) 이후 7년 만에 만나는 소설집이고 신작으로도 장편소설 『A』(2010) 이후 3년 만이다. 최근 2013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하는 반가운 만남이다. 소설집에는 「두 여자 이야기」 「여름의 맛」 「알파의 시간」(현대문학상), 「그 여름의 수사(修辭)」(오영수문학상)와 더불어 「카레 온 더 보더」(황순원문학상)까지 한여름을 추억하며 읽기 좋은 10편의 작품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책에 담긴 하성란의 단편소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다 읽어내지 못한 숨겨진 의도와 이야기를 찾게 한다. 그러한 감각을 부르는 읽기는 인간의 본능, 본성을 다각적으로 만나게 한다. 또 예민한 감각을 사용하게 해 긴장감을 높이는 가운데 어떤 정확한 말, 고급한 말보다 더 ‘느낌 있는’ 단어의 선택과 특유의 유머로 긴장을 풀어주는데, 이것은 하성란 작가만의 여유가 전하는 선물이다.
초가을에 떠올리는 ‘여름의 맛’은 어떤 것일까. 푹푹 찌고, 울긋불긋 달아오르고, 끈적끈적 들러붙던 그날의 일들이 조금은 서늘하고 쓸쓸한 뒷맛을 전하지는 않을까. 독자들이 살아낸 여름과 맞이할 여름 속에서 함께할 『여름의 맛』과의 공감을 기대한다.
목차
두 여자 이야기
여름의 맛
알파의 시간
오후, 가로지르다
카레 온 더 보더
제비꽃, 제비꽃이여
돼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여름의 수사(修辭)
1968년의 만우절
순천엔 왜 간 걸까, 그녀는
해설_이 실패를 어떻게 풀까/양윤의
저자
하성란
출판사리뷰
보다 ― ‘다른’ 시간을 뚫고, 보다
하성란만큼 난장(亂場)의 삶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는 작가는 드물다. 그동안 그녀는 우연과 폭력의 양면성을 가진 삶을 스스로 양자 우주 속의 입자가 되어 증명하는 소설을 써왔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좀더 ‘바라보는 데’ 초점을 둔 독특한 시선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오후, 가로지르다」에서 ‘여자’는 누군가가 사무실에서 기르는 뱀이 다리에 스치는 느낌 때문에 책상 위로 뛰어오르게 되는데, 그 순간 1인용 감옥과도 같은 큐비클 안에 갇힌 보이지 않던 개별자들의 사연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안에는 빨래를 널어놓고 ‘살다’시피 하는 사람, 젊은 날의 사진을 크게 뽑아 걸어놓은 사람, 사랑을 나누는 사람 들이 있다. 이 모습을 작가는 나이와 경력에 맞게 뒤로 밀릴 대로 밀린 ‘나이 든’ 화자의 쓸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또 「알파의 시간」에서는 국도 야립 간판에 새겨진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의 생을 되돌아보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엄마의 빛나는 한 시절이 불쑥 떠오르자 ‘나’는 “내 자신이 풍경의 일부”가 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때는 바로 엄마와 자신의 시간(모습)이 횡의 시간이 아닌 종의 시간으로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대상을 오래 바라봄으로써 얻게 되는 기다림의 결과 혹은 보상인 것이다.
맛보다 ― ‘유니크한’ 그 맛의 기억
“하성란의 소설에서 신체에 달라붙은 어떤 느낌은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남긴다”(양윤의). 하성란 소설이 요구하는 감각의 세계는 언어가 표상하는 어떤 의미나 상징을 뛰어넘어 육체가 식별하는 ‘모종의’ 느낌을 전달한다. 소설 「여름의 맛」은 그러한 하성란표 소설의 정수다. 주인공 최는 일본 여행 중 은각사를 금각사로 잘못 알고 찾아간다. 일본인이 몸으로 이해하는 ‘킨가쿠지’와 ‘긴가쿠지’의 발음 차이를 최는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최는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가 건넨 복숭아를 껍질을 벗기고 단물을 쪽쪽 빨며 먹은 뒤 “당신은 복숭아를 정말 좋아하게 됩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 맛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또 그런 최가 잡지 연재 기획 ‘여름의 맛’을 취재하기 위해 만난 김 선생은 어릴 때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죽음을 영문도 모르고 받아들이는데, “그런 면에서 김에게 최고의 음식이란 없었다”. ‘버림받았다’는 내상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맛을 느끼지 못하고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작가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근원적인 ‘행복’, 별것 아니지만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맛’의 감각으로 일깨운다.
최와 김 선생의 이야기처럼 하성란 소설은 종종 한 작품 안에서 다른 층위의 이야기가 맞물리는 다층적 서사를 품고 있다. 「카레 온 더 보더」에서도 갑자기 맡은 카레향 때문에 떠올리게 된 스무 살 무렵에 만났던 다섯의 노인을 봉양하며 살아가는 소녀 가장 영은의 이야기와 주인공 ‘그녀’의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된다. 짙은 카레향으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냄새를 가리며 살아가는 영은을 통해 ‘그녀’는 삶의 비루함 앞에서도 젊은 시절 과감하게 거리에 침을 뱉던 당시를 생각하며 길에서 넘어진 자신을 나무라듯 바라보는 김에게 욕을 날리며 결별을 선사한다. 그런 단호함에는 하성란의 뼈아픈 인생관이 묻어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으면서도 집착하고 연연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이 무정한 인생에 좀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식을 일러준다. 카레 맛의 복기가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인생의 비의를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다.
담다 ― 그때 그곳에 두고 온 나
이번 소설집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두 여자 이야기」와 「순천엔 왜 갔을까, 그녀는」에는 분열과 분할을 경험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오랜 고민인 듯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이처소재(二處所在,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의 설정은 등장인물들이 유사한 외모로 분열돼 존재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교차하는 형태로 보여진다. 「두 여자 이야기」에서 최는 자신과 닮은 여자 ‘오은영’ 때문에 낯선 도시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폭언과 손찌검을 당한다. 또 「순천엔 왜 간 걸까, 그녀는」의 장미는 납치당한(당할 뻔한) 순간이라는 ‘인생극장’의 A코스와 B코스를 오가며 창녀와 개그맨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이 느끼는 ‘나의 반쪽’에 대한 공허는 현재의 모습과 더불어 그 안에 담긴 가능성마저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인물들은 어떤 사고를 당한 사람 혹은 그런 사고를 겪을 뻔한 사람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았거나 지나쳐온 예측의 순간까지 담아내고 있기에 인간은, 그리고 인생은 무겁고 무섭다. 작가가 그리는 이러한 가정의 세계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왜 그다지도 ‘깊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지를 알게 해준다.
작가의 말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목제 난간 곳곳에 ‘추락 주의’라고 씌어진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다리를 다 건넜을 때쯤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났다. 수문 아래로 흘러가는 물, 단순한 시멘트 구조물과 물의 낙차가 교묘히 만들어낸 무늬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오길 정말 잘했다. 오래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직 설렐 일이 많을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설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도 될 거라는,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