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베케트의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쿼드」 「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밤과 꿈」)에 붙인 철학적 해제를 담은 책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사유는 네 편의 단편극에 그치지 않고 『몰로이』 『머피』 『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등 베케트의 전작을 꿰뚫으며, 블랑쇼와 카프카, 예이츠, 베토벤까지 그 폭을 확장해나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케트 말년의 작품에 붙인 들뢰즈 말년의 에세이다. 따라서 두 노회한 지성이 평생에 걸쳐 작업하고 사유했던 바, 원숙한 그들의 철학 세계가 이 작은 책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독특한 구성 역시 주목할 만하다. 들뢰즈의 글과 옮긴이 이정하의 분석적인 해제가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며, 베케트에 관한 들뢰즈의 해제와 그에 대한 이정하의 해제라는 이중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 철학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이접적 종합’이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시도되고 있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주며, 들뢰즈 철학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이미지론과 그의 예술철학적 작업을 이해하는 데 좋은 교과서가 되어줄 것이다.
목차
옮긴이 서문
소진된 인간
Ⅰ
Ⅱ
옮긴이 해제
베케트의 『쿼드』 수록 작품 소개
베케트와 들뢰즈의 작품 목록
저자
질 들뢰즈
출판사리뷰
“소진이란 무엇이며, 소진된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베케트 작품의 감각적 사유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들뢰즈의 독창적 에세이
2012년, 한국 사회에 등장한 ‘피로사회’라는 화두는 성과주의로 인해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 펴낸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 역시 이 피로와 소진이라는 개념을 문제 삼은 들뢰즈 말년의 예술철학 에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들뢰즈는 피로와 소진 개념을 좀더 엄밀하게 구분하며, 그 차이를 철학적으로 깊이 파고든다. 들뢰즈는 기존 철학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수많은 기념비적 저작을 남긴 것은 물론, 소설, 시, 영화, 회화 등 장르를 뛰어넘는 방대하고 폭넓은 관심사를 바탕으로, 철학과 예술을 종합하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개진한 인물이다. 『소진된 인간』 역시 그 작업의 일환으로, 베케트의 작품에서 ‘소진’이라는 특이성을 끌어내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이미지의 역량에 관한 빼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짧은 분량이지만 깊이 있는 시적 사유가 농축되어 책의 무게감을 더한다. 한편 옮긴이 이정하가 다소 난해하고 함축적인 들뢰즈의 글에 상세하고 탁월한 해제를 붙이고, 이 책에서 다뤄진 베케트의 작품을 간략히 요약 정리해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3)
들뢰즈와 베케트의 만남: 베케트의 비참하고 비천하고 위대한 인간들에 대하여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은 베케트의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쿼드」 「유령 삼중주」 「한갓 구름만……」 「밤과 꿈」)에 붙인 철학적 해제다. 그러나 들뢰즈의 사유는 네 편의 단편극에 그치지 않고 『몰로이』 『머피』 『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등 베케트의 전작을 꿰뚫으며, 블랑쇼와 카프카, 예이츠, 베토벤까지 그 폭을 확장해나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케트 말년의 작품에 붙인 들뢰즈 말년의 에세이다. 따라서 두 노회한 지성이 평생에 걸쳐 작업하고 사유했던 바, 원숙한 그들의 철학 세계가 이 작은 책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베케트의 극중 인물들에게서 어떤 공통의 특성을 찾아낸다. 피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소진’이 그것. 『소진된 인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 들뢰즈에게 ‘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실현’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그러나 가능성은 남은 상태)이지만, ‘소진’은 더 이상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피로한 인간이 누워 있거나 포복하거나 바닥에 버티고 선 채,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소진된 인간은 책상 위에 머리를 푹 숙여 기댄 채 앉은 자세를 취한다. 앉아 있으므로 회복될 수 없다.
베케트의 극중 인물들, 성별도 이름도 나이도 없는 익명의 주체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실현하려 하는 대신, 수동적 주체에 머물며 무용한 왕복 운동을 반복할 뿐이다. 즉 들뢰즈에게 ‘소진’이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순수한 발생적 역량이 역설적으로 함축된 개념인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베케트 극의 인물들에게서 추출해낸 ‘소진’이라는 개념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한 뒤, 소진됨으로써 만들어지는 이미지(혹은 공간)에 관해 새롭고 격조 높은 사유를 펼친다. 그런데 왜 베케트였을까? 사실 베케트와 들뢰즈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들뢰즈는 이미 『차이와 반복』에서 베케트 소설의 인물들을 ‘애벌레 주체’로 정의하며 ‘수동적 종합’에 관한 사유를 풀어낸 바 있으며, 『시네마 1』에서는 베케트의 「영화」를 통해 운동-이미지의 유기적 운동의 구도를 추출해냈다. 즉 들뢰즈는 베케트의 작품 세계에 내재한 문제의식을 탁월하게 읽어내며, 자신의 철학 세계를 세우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들뢰즈 철학을 특징짓는 ‘이접적 종합’의 실험실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이 만들어진 1970~80년대는 텔레비전 ‘이미지’의 물질적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다. 들뢰즈는 베케트의 작업이 텔레비전 매체를 통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하는데, 이러한 베케트 극의 형식적 특질은 동시대의 영상적 실험들과 궤를 같이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베케트의 극에서 카메라의 존재감은 매우 두드러진다. 그것은 등장인물과는 다른, 자율적이고 이질적인 움직임을 지닌 ‘야생의 눈’이다. 카메라는 공간을 정교하게 재프레임화하면서 프레임을 강력한 ‘시간의 프레임’으로 만들어내며, 바로 그 안에서 순수한 시간-이미지들을 생성해낸다.
이 책의 독특한 구성 역시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 미뉘 출판사에서 1992년에 출판된 『쿼드』 선집에서 베케트의 네 편의 텔레비전 단편극 시나리오와 들뢰즈의 해제가 동일한 분량을 차지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출간된 이 책 역시 들뢰즈의 앞선 시도를 전격적으로 따르고 있다. 즉 들뢰즈의 글과 옮긴이 이정하의 분석적인 해제가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며, 베케트에 관한 들뢰즈의 해제와 그에 대한 이정하의 해제라는 이중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 철학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이접적 종합’이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시도되고 있다. 『소진된 인간』이 출판된 1992년은 들뢰즈의 오랜 철학적 동지였던 펠릭스 과타리가 세상을 떠난 해이며, 그로부터 3년 후 들뢰즈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마지막 창조 행위인 ‘이미지 만들기’를 위해 자신의 숨을 내주는 ‘소진된 인간’을, 그리고 폭발 직전의 엄청난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이미지의 자기소멸에 관해 쓴 이 에세이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주며, 들뢰즈 철학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이미지론과 그의 예술철학적 작업을 이해하는 데 좋은 교과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