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시금 솟아나는 신생의 그리움!
김명인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여행자 나무』.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저자의 끓어오르는 문학에의 의지를 담은 이번 시집에서 스스로 변화된 몸에서 저자가 직접 길어 올린 깨달음을 시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에 따른 무의식 속 전쟁의 기억과 가족과의 단절 등 정신적 상흔을 담은 시편들로 한국문학에 독특한 궤적을 그려온 저자의 무한히 변화할 시세계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편들을 담고 있다. 풍찬노숙을 지나 노년에 이른 저자의 늙어가는 몸에 대한 사유가 담긴 ‘아귀’, ‘캄캄한 독서’, ‘살이라는 잔고’, ‘밤의 저수지’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아귀/有餘無餘/어디로?/여행자 나무/캄캄한 독서/우물 밖 동네/겨울 망양/살/문장들/공중부양/숲은 불의 기억을 간직한다
2부
꽃들/복사꽃 매점/앵두/치자/감꽃/몸 맛/이 잠 저 잠/投花/자수정 흘러오는/전람회 불빛/밤의 저수지/살이라는 잔고
3부
침묵을 들추다/아득한 식욕/아무 일 없이/냉장고 묘지/심청 누님/천 갈래 외로움 천 강에 띄워놓고/악력/민얼굴/구제역/기러기백숙/상강/아직도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았다/저녁의 트럼펫
4부
메마른 고집/악착/오늘 밤 예보도 폭우로 이어진다/가을 근시/이앙/그 틈새로/번개 지나고 우레/이 무뢰한!/자갈밭 끄는 용골처럼/지족/어두워지다/상처가 없으면 그리움도 없으리/秋甲 秋麻谷/항아리/황금 수레
해설 무한의 사랑_권혁웅
저자
김명인
출판사리뷰
가벼워지는 몸에서 찾는 무한한 자유
헐벗은 길 끝에서 선연해지는 사랑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는 시인 김명인이 열번째 시집 『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를 출간했다. 그는 첫 시집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에서 가장 오염된 세속에서 발원하는 가장 인간적인 사랑과 그 ‘더러운 그리움의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바다의 아코디언』(문학과지성사, 2002)과 『파문』(문학과지성사, 2005)을 통해 시간과 기억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근원적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해왔다. 시력 40년의 긴 여정에서 김명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몸의 기억’이다. 김명인 시의 존재자들은 대부분 고향을 잃고 부랑의 운명을 걸머진 채 헐벗은 길 위에 선 이들이다. 한국전쟁 발발에 따른 무의식 속 전쟁 기억, 가족과의 단절 등으로 몸 깊이 새겨진 정신적 상흔은 그의 시에 고스란히 담겨 한국문학에서 독특한 궤적을 그리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는 이번 시집에 어느덧 삶의 풍찬노숙을 지나 노년에 이른 시인이 자기 스스로 변화된 몸에서 길어 올리는 깨달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생명 안쪽에 낙인처럼 찍혔던 트라우마도 희미해지고, 대신 죽음이라는 깊은 어둠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흑백의 반전처럼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충만해지는 시절로서 늙음을 받아들이는 시인은 몸에 새겨진 상처들과 그 방랑의 시절마저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이로써 다시금 솟아나는 ‘신생의 그리움’, 즉 계속 끓어오르는 문학에의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다 보면 앞으로도 무한히 변화할 그의 시 세계에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에게 “아직 행려의 계절은 끝나지 않았다”.
늙음, 가벼워진다는 자유
제 살의 고향도 허공이라며
어제 못 보던 구름 내게 누구냐고 자꾸 묻는다
난 아직 날개 못 단 새끼라고
말씀드리면 머지않아 내 살도 새털처럼 가벼워져
푸른 하늘에 섞이는 걸까?
털리는 것이 아니라면 살은 아예 없었던 것
이승에서 꿔 입는 옷 같은 것
더는 분간할 일 없어진 능선 저쪽으로
어둠을 타고 넘어갈 작정인가, 한 구름이
문득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살」 부분
시집 곳곳에는 늙어가는 몸에 대한 사유가 묻어난다. 한 시절 울울창창한 숲처럼 풍성했던 살과 뼈는 ‘예전 같지 않지만’ 시인은 “운신 한결 가벼워졌다”며 이를 삶의 한 과정으로 수용한다. “살은 이승에서 꿔 입는 옷”이라는 그는 줄어드는 몸을 수긍하며 도리어 이를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이러한 관점을 양압(陽壓)과 음압(陰壓)으로 비유해, 삶의 측면에서 볼 때 늙음은 0(zero, 소멸)으로 수렴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죽음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영역이 영원히 커지고 팽창하는 무한(∞)을 향한 길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인에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여정인 것이다.
어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에 오는 사랑
지독한 빛이어서 극광까지
밀려가버렸다고 깨닫는 지금
구름다리도 걷혀버린 강 이쪽에서
건너편 저무는 버드나무 숲 바라본다
[……]
사랑이여, 다 잃고 난 뒤에야
무릎 꺾어 꿇어앉히는 마음의 이 청승
쟁쟁한 바람이 쇳된 억새머리 갈아엎으면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절룩이며 산등성이를 넘어간 그 짐승
밤새도록 흘렸을 피 같은 어둠이 몰려온다
-「어두워지다」 부분
젊은 시절의 삶은 지독할 정도로 밝은 빛이다. 시인은 “되는대로 미끄러져가며 떠뜨렸던/내 삶의 어떤 폭죽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잠깐 일어섰다 부서지던 파문”(「살이라는 잔고」)은 한창때의 나날들을 요동치게 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어떠한 빛이라도 종래에는 어둠이 오듯, 어떠한 격정 뒤에도 고요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생생한 쓰라림 가득했던 생채기들도 흔적만 남은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에 도래하는 사랑이 있다. 유년의 더러운 그리움에서, 젊은 날 상처의 그리움으로, 그러다 찾아온 죽음이라는 어둠 앞에서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발휘되는 지금의 모습을 김명인의 새로운 변화이자 또 한번 깊어진 진화라고도 볼 수 있다.
여행자 나무, 석양에서 피어오르는 신생의 그리움
선연하게 둘러앉는 두레의 그늘, 석양이 지고 있다
창밖으로 보면 오늘의 여행자는 홀로 서서 고즈넉하고
나무 또한 그가 버리고 갈 길에는 무심하지만
펼쳐든 여정이라면 누구라도
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행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에 서게 하는 걸까?
아직 행려의 계절 끝나지 않았다
어디로도 실어 보내지 못한 신생의 그리움 품고 나무의
늙은 가지에 앉아
몸통뿐인 새가 울고 있다
-「여행자 나무」 부분
김명인은 그간 발표해온 시들을 통해 ‘길’의 이미지를 늘 강조해왔다. 그 길은 고향에서 등 떠밀려 나온 뒤 계속된 ‘가고’ ‘떠나고’ ‘흐르고’ ‘지워지는’ 방랑의 운명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어느덧 석양이 지듯 삶의 황혼기에 이른 시인은,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방랑의 운명, 그 자체를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접을 수 없기에 지난날의 상처를 기억하고 더듬으며 새로운 긴장을 벼리는 그는, 아직도 실어 보내지 못한 신생의 그리움, 그 강한 생의 의지와 시적 욕망을 계속 노래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