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첫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로 탄탄한 서사와 파격적 이미지로 주목을 받기도 했던 시인 겸 소설가 김선재의 첫 번째 시집. 그녀가 선보이는 첫 시편들에는 현재의 생에 지속되는 통증을 아프게 자각하며, 아픔이 비롯된 얼룩의 탄생 지점을 흐리마리한 꿈결에서 기억해내는 솔직한 토로가 담겨 있다. 마치 이명처럼 울려서 들리는 슬픔의 기원을 시라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잠 속은 ‘풍경 없는 꿈’으로 가득하다.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서의 꿈속 공간은 자아의 욕망으로 다채롭게 물들어 있지 않고 마치 선잠처럼 모든 것이 흐리고 모호한 알 수 없는 곳이다. 잠과 각성의 틈새에서 시인은 전혀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불러들인다. 0시의 시간처럼 없는 시간, 부재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나와 너 사이’로 다른 내가 되어 너를 찾아간다. ‘너’에게 하는 얘기는 주로 먼 곳의 얘기, 이 세계와 무관한 곳의 이야기이자 더 이상 발화할 수 없는 잊어버린 기억에 대한 잃어버린 이야기다. 설핏 잠드는 순간의 경험처럼, 시가 만들어낸 시공간 속으로 푹 빠져, 시인과 같은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여기가 아닌 어디인가
가위
이 별의 바깥
북극의 피아노
저녁 숲의 고백
마지막의 들판
0시의 취향
내가 지운 기린 그림
얼룩의 탄생
간결한 감탄사
상상마당
청년기
용기가 필요해
혀끝을 맴도는 변명
블라인드 테스트
내 그레텔의 정원
기호의 모습과 기호의 마음
어떤 생일
소설을 쓸까요?
히드라Hydra
R과 알
비뚤어진 아이의 비굴어진 거울에 대한 묘사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몇 가지 훈련
거리의 우울을 지나
12시에 이별하다
영원으로 향한 영원의 시간
2부
우리의 집은 어디입니까
태양의 서쪽
빈칸
하루의 연보
광대곡
구름의 제국
피오르식 공원의 산책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폭설 전진기지
백야의 집
공부도하가
쓸쓸한 만선
질량은 보존된다
조탑꽃
기쁘게 눈 오는 그믐으로
삼도천
안개 속의 거짓말
오독의 기억
어느 구경에 대한 기록
아무도 몰래 모르는 곳으로
태풍이 지나난 거리
어느 세기의 끝
물의 눈
오래된 동물원 옆 미술관
망상역
가시를 위하여
저자
김선재
출판사리뷰
홀린 듯 꿈처럼 찾아오는 이명(耳鳴)의 세계
잊어버린 기억들이 얼룩처럼 묻어나는 0시의 슬픔
덥고 슬픈 오수에 빠졌네
김선재의 첫 시집 『얼룩의 탄생』이 2012년 초여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7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부문에 당선되어 시단에 나온 김선재는 앞서 소설로도 등단해 첫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문학과지성사, 2011)로 탄탄한 서사와 파격적 이미지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선재의 이번 시집은 설핏 잠드는 순간의 경험처럼, 시가 만들어낸 시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홀린 듯 잠겨들게 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이에 대해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스며드는 사건”과 같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여름날 더위에 지쳐 빠져든 한낮의 오수처럼, 김선재는 시 속에서 선명한 풍경 대신 미지의 장소를 끊임없이 펼쳐내며, 꿈속에서 잊었던 슬픔과 담담하게 대면한다. 불평 없이, 처연하지 않게, 원래 삶이란, 사랑이란, 그러한 것이라는 듯.
0시, 잊어버린 기억에 대한 잃어버린 이야기
거친 잠이 조금만 다정해진다면 나는 나와 너 사이에서 너를 만날 텐데 물론 주로 먼 곳의 얘기를 하겠지 이를테면 숲이 물이 되는 꿈 물의 몸이 되는 꿈
옛날이야기를 해줄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잊어버린 기억에 대한 잃어버린 이야기 저녁의 세계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코끼리의 코와 잠자리의 잠에 대해 12시에서 12시까지
사랑한다 말하지 말아요, 12시에서 0시까지
미워한다고도 말하지 말아요, 0시에서 12시까지
? 「0시의 취향」 부분
그의 잠 속은 ‘풍경 없는 꿈’으로 가득하다.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서의 꿈속 공간은 자아의 욕망으로 다채롭게 물들어 있지 않고 마치 선잠처럼 모든 것이 흐리고 모호한 알 수 없는 곳이다. 잠과 각성의 틈새에서 시인은 전혀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불러들인다. 0시의 시간처럼 없는 시간, 부재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나와 너 사이’로 다른 내가 되어 너를 찾아간다. ‘너’에게 하는 얘기는 주로 먼 곳의 얘기, 이 세계와 무관한 곳의 이야기이자 더 이상 발화할 수 없는 잊어버린 기억에 대한 잃어버린 이야기다. 없는 내가 되어 없는 세계에서 없는 이야기를 하는 꿈 없는 잠 속. 이 기이한 만남과 결별의 순간에 서서 ‘나’는 잊었던 사랑과 증오를 회상하는 대신 지나간 시간을 실감한다.
모든 얼룩이 평등해지는 시간
지금은 오래된 얼룩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
모든 얼룩이 평등해지는 시간
얼룩을 덮은 얼룩이 서로에게 기대는 시간
저녁의 새들이 물고 온 종이에 그려진 종이 혼자 우는 시간
하루를 지나온 숲은 서늘한 입김으로 어제보다 조금 더 늙어
늙어서 기쁜 시간으로
시간의 끝으로 달려간 어느 날,
슬프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 별의 모든 사잇길이 걸어갑니다
? 「저녁 숲의 고백」 부분
얼룩은 본바탕에 의도하지 않게 생긴 다른 빛깔의 자국이다. 얼룩이 드러나는 것은 현재지만, 실은 현재의 사태가 아닌 과거로부터의 흔적인 것이다. 살아오면서 생긴 과거의 상처들이 기억 속에 자흔처럼 남아 그것들이 서로 덮이고 뭉쳐져 현재 속에 새로운 양태로 돋아나듯이 얼룩은 현재에도 과거에도 속하지 않은 고유한 시간성을 가지며 언제로부터의 얼룩인가를 떠나 평등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얼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시간의 끝에 섰을 때 슬프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길 바라며 늙어서 기쁘다고 말하는 마음이 쓸쓸하다.
이제 그만 슬픔을 잊어요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
통증을 용서해요 나를 잊어요
? 「가시를 위하여」 부분
사랑과 이별의 전 과정은 꿈처럼 모든 것이 모호하고, 상처를 내는 주체와 상처받는 객체가 구분될 수 없다. 혀와 바늘과 미각과 온도가 지배하는 그 통증의 세계 속에서 감각의 주체는 서로 뒤섞여버리고, 온전한 전체의 몸이 없는 것들은 “피 흘리지 않고 아”프며 “찾는 순간 서로를 지울” 수밖에 없다. 시간을 견뎌서 잊을 수 있길 기다릴 뿐.
김선재의 이번 시집은 현재의 생에 지속되는 통증을 아프게 자각하며, 아픔이 비롯된 얼룩의 탄생 지점을 흐리마리한 꿈결에서 기억해내는 솔직한 토로가 담겨 있다. 마치 이명처럼 울려서 들리는 슬픔의 기원을 시라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