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5년 만에 독자들을 찾아온 최정례의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속 54편의 시들은 기억의 편린과 편린, 그 겹침의 통증이 전작보다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 시집이다. 시인은 여전히, 기억을 통한 현실의 재구성과 거리두기의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훨씬 더 밀도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은 없는 것을 현재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최정례는 이질적 시간의 뒤섞임 속에 현실이지만 꿈같은 장면 안에서 어리둥절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돌연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어리둥절”은 시간의 교착상태에서 표출되는 주체의 당혹스러움과 아이러니를 말하면서 동시에 짐작할 수도 없었던 간절한 목소리를 출연시킨다. 이 시집의 시들이 이제까지의 그의 시와 다른 형식을 얻게 되는 것도 이 점이다. 간절함이 “꽃핀 저쪽”을 욕망하는 순간 어느새 그가 욕망하던 미래가 “사슴뿔을 뒤집어쓰고” 지금 여기에 도래하는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호랑이는 고양이과다
팔월에 펄펄
캄캄한 그 어디
산갈치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벙깍 호수
창문들
줄
스윙 댄스
바람둥이가 내 귀에
이름을 부를 때까지
당신을 이해해
제2부
꽃 핀 저쪽
화라지 송침
얼룩덜룩
아보카도 씨
논
도둑들
작전
누가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어
저녁의 수퍼마켓
떠돌이 개
어리둥절
굴비
로데오 구경
있었다
제3부
우주의 어느 일요일
??
영원한 휴일
공작새
착각하고 봄이 왔다
섬데이 라라라라 따라라
몽롱의 4월
기다려 기다려줘
여름풀
잠의 들판으로
한 줄기 넝쿨이
저무는 봄날
입술
제4부
모란의 얼굴
생각의 까마귀 떼라
춘투
구두와 열쇠
당신 발바닥 쓰시마 섬 같애
너는 내가 아니다
선인장 앞에서
거위와 말했다
늪과 시
거대한 식당
번쩍
석양
누가 내 안에
어디 먼 데
홍수 뒤
해설 | 이제 그의 시계는 오른쪽으로 돈다 · 함돈균
저자
최정례
출판사리뷰
시간의 교착이 만드는 당혹과 역설의 사이
짐작할 새 없이 드러나는 간절한 목소리
최정례 시인의 시간은 늘 교착된 어느 지점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 지점은 과거와 과거들의 겹침, 반복과 반복들의 접점이었고, 이를 통해 의미는 재구성되었다. 시간에서 파생된 파편의 반복·겹침은 그녀의 언어에 밀도를 높여주었고(이남호), 이러한 이를 통해 생의 모순에 관한 실감을 구체화해내었다(이광호). 이렇게 쌓인 모멸의 시간들(최현식)을 견디는 것. 그것이 그의 시였다. 5년 만에 독자들을 찾아온 최정례의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 속 4부 54편의 시들은 이러한 기억의 편린과 편린, 그 겹침의 통증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 시집이다. 헌데, 이전의 시집들과 다른 형태를 갖는다. “이제 그의 시계가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집 『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최정례는 개인의 상처와 불행한 기억을 안으로 끌어오지 않았다. 바깥에 두고 거리를 두었다. 이를 통해 감정-정서와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스스로의 “분노와 슬픔을 감춘 채”(문혜원) 보여주기를 택했다. 천연덕스러음과 비틀기를 통해.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레바논 감정」 , 『레바논 감정』부분
“레바논 감정”이라니. 이토록 먼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시인은 감정에 이국의 이름을 붙여, ‘여기’로 오지 않고, ‘거기’로 보내어버렸다. “현실이 아니라고 우”김으로 해서 과거 그리고 기억은 여기서 아득해졌다. 그리고 이 거리는 남다른 정서를 환기한다.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느꼈던 슬픔보다 더한 슬픔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슬픔’이면서 슬픔이 아니다. 물질화된. 울고 싶어도 이제는 울지 못하는 슬픔. 그러니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녀는 이 단어들을 “구름”으로 띄워놓고는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 최정례의 시의 객관적 감정은 이렇듯 ‘알 수 없는 정서’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번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기억을 통한 현실의 재구성과 거리두기의 감정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훨씬 더 밀도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은 없는 것을 현재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이 향기는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갑자기 가로수로 내달려 오렌지를 주렁주렁 매달리게 한다. 꽃송이를 들어 한 잎 두 잎 꽃잎을 날린다. 우연이 필연과 엉겨 기침을 했고, 그 순간이 무언가의 시작이었다는 듯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어찌하여 롤라는 투리두를 잊지 못했고 어찌하여 산투차는 질투에 눈멀게 되었을까. 사랑과 배신 치정과 복수, 피가 뚝뚝 떨어져 땅에 스며들었고, 이야기는 갈대 순처럼 무성하게 허공으로 손을 뻗친다. ─「어리둥절」 1연
어디선가 시인이 목도했을 풍경이 현재 가로수에 “오렌지를 주렁주렁 매달리게 한다”. 그것도 모자라, 꽃송이를 들어 “한 잎 두 잎 꽃잎을 날린다”. 적어도 세 가지 시점이 겸쳐 있는 이 장면에 우리를 끌어들이는 시인은 그저 우연이 이 모든 일이 펼쳐졌다는 듯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기억의 환기는 (그것이 1차적 체험이든, 2차적 체험이든 간에) 그것을 불러오는 물리적 대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무언가의 시작”인 것을 말이다.
잃어버린 주민등록증을 찾으러 가는데 신호등 앞에서 가슴에 띠를 두른 교회 여자들이 부활절 삶은 달걀을 내민다. 입주금만 내고 프라임빌라에서 꽃을 가꾸고 삽살개를 키우며 사세요라고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예쁜 여자애가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면서, 그래. 여섯 시에 거기에서 만나. 허공에 대고 말한다. ─「어리둥절」 2연 부분
객관적인 대상물들, 부활절 계란을 나누어주는 교회 여자들이라든가, 신축 빌라 광고 플래카드, 통화를 하며 걸어가는 예쁜 여자아이는 시인에 1연의 아득한 풍경을 선사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오렌지가 열리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게. 그래서 시인은 어리둥절하다. 여긴 어딘지, 거긴 어딘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 혼돈은, 1연의 세계를 심정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최정례의 거리두기가 맞이한 새로운 국면을 목도할 수 있다. 현실을 인지하는 것. 그것들이 모두 미래를 예정하고 있다는 것. 부활절도, 빌라에 입주하여 펼쳐질 멋진 삶도, 여섯시에 만날 거기도 모두 현재가 노정하고 있는 미래다. 그리고 당연한 듯, 사람들은 그 시간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하다.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 여기는 세계가 말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 향기는, 그 목소리는 날아간다.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날개에 올라 지붕과 지붕, 신호등과 다리, 숲을 지나 호수, 호수에 주저앉아
다 잊어버리고 만다. 거기서 살아간다 어리둥절. 그 나라는 가로수가 오렌지나무래, 걸어가다가 손을 뻗쳐 따 먹을 수도 있대, 그래 거기서 만나. ─「어리둥절」 2연 나머지 부분
이 어리둥절한 감정은, 마치 처음 느끼는 중력처럼, 시인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미래의 시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인의 시간은 현재까지에만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바깥으로 나온다. 전작들과의 차이는 여기서 시작된다. 시인이 조심스레 인지하기 시작한 세계의 뻔뻔함에 대한 낯섦. 이 낯섦은 아무런 감정도 수반하지 않는다. 그저 세계를 보고 있다. 그러니 어리둥절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 최정례 부음 목동병원 영안실 203호 발인 30일. 평소에도 늘 받아 보던 문자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었고 내 이름이었다. 실수임을 인정하는 정정 문자가 다시 오겠지 기다리며 그냥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웃긴다고 말했더니 남편의 말이 그것은 시인의 죽음이지, 당신은 시인이 아니잖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딸애에게 내가 죽으면 제일 걱정되는 것은 자개장롱과 돌침대라고 했다. 딸애는 걱정 말라고 했다. 자기가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다. 방 안 전체를 차지하는 이 무거운 구닥다리를 그 애가 쓸 리가 없다. 남 주거나 팔아버리지 말라고 했다. 딸애는 자기를 못 믿는다고 벌컥 화를 냈다. ─「벙깍호수」 부분
시인은 자신의 부고를 받는다. 느닷없이 현실에 개입한 미래에, 자신의 죽음을 비웃듯 공지하는 이 메시지에 시인은 화를 내지 않는다. 분노는 현재에서 출발하는 ‘미래지향적’ 감정이다. 그래서 시인은 당혹스러울 뿐이다. 자신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하고 딸애에게는 고작 아끼는 가구 걱정이나 늘어놓는다. 이 희극적인 상황 앞에서 시인은 한편, 너무 진지하다. 이 ‘미래지향적’ 현실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 난 정말 살아 있다. 그런데 궁금했다. 집 앞 문간에 의자를 내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들, 동남아시아 어디쯤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았다. 나도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하고 그냥 그러고 있다. 왜 벙깍 호수라는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호수는 매립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그 호수에 데려다달라고 했더니 운전수가 한 대답이었다. 벙깍 호수에도 못 갔고 플리즈 원 달러를 호소하는 애들에게 일 달러도 안 준 나다. 한 번 주면 오십 명은 달라붙는다고 해서 못 줬다.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나는 살아 있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살아 있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친구들은 바쁘고 헛소리는 들어주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앉아서 지금은 사라졌다는 벙깍 호수만 그려보고 있다. ─「벙깍호수」 부분
그래서 다시 시인의 마음은 동남아시아 어디쯤으로 간다. 이는 달아남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름만 남겨두고 사라졌다는 벙깍 호숫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건 사람의 ‘생’에 대한 우화가 되기도 한다. 현기증이 나는,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일. “다들 바쁘고, 헛소리는 들어주지도 않을” 정도로 바쁜 삶.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그저 멍하게 사라진 호수를 그려볼 뿐이다.
시인의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시집의 해설을 쓴 함돈균 씨는 그것이 두려움의 극복이라고 말한다. “주체를 얽어맨 상처와 불행의 시간 속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이 두려움은 “시간의 어두운 얼굴에 지독한 화상을 입은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정상적 궤도에서 이탈하여 다른 방식으로의 발화가 “반복된 회귀를 통해 매번 동일한 시간에 닿”게 했을 거라고 았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렇기 때문에 “능청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감춘 “얼굴의 이면”은, “시간의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시간의 무한성의 바탕 위에서 다른 시간으로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고민에 닿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작은 이 고민의 산물이며, 이번 시집은 그 고민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시인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의 부조리로부터 자신을 구하고, 동시에 세계를 구한다. 드디어 위풍도 당당한 “사슴의 뿔을 뒤집어 쓰”(『꽃 핀 저쪽』)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돌진. 그 첫걸음이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의 정체다. 꼬박 이십 년이 걸린 용기와 회복의 과정은, 어쩌면 예견되어 있었던 일일 수도 있다. 시인은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슴뿔”을 뒤집어쓰기 위한 인내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음의 시를 읽어보? 이런 추측은 더 분명해진다.
내가 살던 옛집으로 당신이 찾아왔어요
그 집 떠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난 그 집에 살고 있었어요
꿈이라는 것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지요
[……]
스토커는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요
스토커는 매달릴 것을 찾아 붙잡아야 해요
내가, 당신이, 우리들 스토커가
홍수에 떠밀려 가며 꿀꿀거렸어요
[……]
그처럼 적나라하게
허드레옷을 입고 있는 내게 다가와
당신이 다정하게 말을 걸었는데
거긴 무너진 옛집이었어요 ─「홍수 뒤」 부분
“그 집을 떠나온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스토커는 버림받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매달릴 것을 찾아 붙잡고 있다. 그 오래된 것들을 안고 있는 까닭은 단지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찾아올 당신 때문이다. 당신은 오래된 주소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 무너져가는 그 집에서 내가 기다리는 까닭이다. 내가 “허드레 옷”을 입게 될 때까지 오지 않은 당신이 마침내 찾아와 말을 거는 순간, 그 집이 “무너져내”린다. 홍수가 찾아와 모든 것이 떠내려간다. 그리고 화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제발 부탁인데
지금 어디야? 그런 것 묻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갔으니
다음 생엔 당신이 시를 써요
당신이 떠내려가며 꿀꿀거려요
그 집은 팔아버렸고 주소도 사라졌어요 ─「홍수 뒤」 부분
지금 어딘지 더 이상 당신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 이제 다음 생은 당신이 기다릴 차례, 당신은 떠내려가며 꿀꿀거리게 될 동안 그 집은 팔아 없어지는 것뿐 아니라 주소마저 지워진다. 최정례 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고 하고 있던 당신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객관적 타자인 동시에 나의 감정이 밀착해 있는 당신이라는 단어에서 당신은 떠내려가버리고 타인이 된다. 의지는 각오뿐 아니라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알게 되는 지점, 당신을 홍수 속으로 버려둘 수 있는 그때에 최정례는 닿아 있는 것이다. 이 단호함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꽃 핀 저쪽』)”이라는 바람과 합쳐져 진정 어린 간절함을 낳는다. 이 간절함은 “시가 희망을 말하는 고유한 방식”(함돈균)이며, 시간의 균열 속, 자발적 걸음을 내딛은 시인의 행보에 큰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시인 최정례는 변화의 과정으로 두려움을 극복해냈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이 확장에 대한 의지가 단호하고 또 간절할수록, 넓어지는 그 외연은, 이제 그 자신의 세계를 온전하게 완성한다.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는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사유의 변화, 행동 양식의 변화, 심경의 변화들. 어떤 변화는 변화를 가장하고, 어떤 변화는 목적 없이 표류하기도 한다. 변화는커녕 안주하기에도 급급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적 투쟁, 화답 없이 묵묵히 진행해가는 싸움 이것이 시의 본령이다. 최정례는 시력 20년 동안 꾸준히, 스스로와 싸워 변화해온 시인이다. 그리고 그의 다섯번째 시집인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는 그 치열함의 과정이다. 마치 첫 시집을 대하듯. 마치 처음 세계와 세계의 질서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발을 내딛는 시인의 행보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