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말에 의지하고 있는 사물과 현상을 휘발성의 언어로 구제하려고 애쓰는 송승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이번 시집은 그의 첫 시집 『드라이 아이스』에 연속하면서 또한 단절을 시도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말의 부정을 넘어서서 말을 지워나가는 무모한 도전이 감행된다. 이러한 ‘여백’의 기획은 말에 의존하지 않고 대상을 만나려는 그의 순수한 면모와 맞닿아 있다.
이 시집의 제목인 ‘클로로포름’은 마취제의 원료로 쓰이는 화학 성분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클로로포름, 클로로포름 하면서 연이어 읽다 보면 의미는 모두 날아가고 혀의 감각만이 남아 리듬을 전한다. 오롯이 자신의 느낌, 그 언어적 체험에 집중해 시어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은 곧 새로운 시, 새로운 언어의 출현을 기대하게 한다. 이처럼 말의 열기로 대상을 차츰 태워나가는 이런 시들을 읽다 보면, 그 에너지로 인해, 결국 시를 읽고 있는 사람마저 증발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마이크
시클라멘
랜디
마이크
제라늄
OISEAU
마이크
마이크
마르시아
마크 리더
레코드 플레이어
마크 리더
마크 리더
마크 리더
레코드 플레이어
레코드 플레이어
레코드 플레이어
카메라
카메라
카메라
모터에서 제너레이터까지
모터에서 제너레이터까지
에테르
에테르
에테르
잭해머
잭해머
레이저 프린터
레이저 프린터
클로로포름
클로로포름
클로로포름
끓는 점 10.8˚C
끓는 점 10.8˚C
해설 | 비등점의 언어, 휘발되는 사물 · 조재룡
저자
송승환
출판사리뷰
여백 속에 넘쳐나는 침묵의 이미지들,
그 안에서 존재는 분명한 ‘있음’으로 자신을 열고
우리와의 만남을 허락한다!
말에 의지하고 있는 사물과 현상을 휘발성의 언어로 구제하려고 애쓰는 송승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서, 2011)이 출간되었다. 송승환이 포착하는 물상의 면면은 일상의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아주 낯선 현장들로 넘쳐나는데, 그의 시 속에 묘사되는 물상을 구성하는 질료들은, 그것 본연의 물리적 특성을 전면적으로 해체하면서 대상과 만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의 첫 시집 『드라이 아이스』(문학동네, 2007)에 연속하면서 또한 단절을 시도해나가는데, 이때 말의 부정을 넘어서서 말을 지워나가는 무모한 도전이 감행된다. 이러한 ‘여백’의 기획은 말에 의존하지 않고 대상을 만나려는 그의 순수한 면모와 맞닿아 있다. 송승환에게 여백은 비어 있음이나 침묵의 예찬이 아니라, 의미의 특수성이 창출되는 시의 새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송승환은 가장 적은 말로, 가장 집약적이고도 소란스러운 관념을 성취해내고, 사물과 하나가 된 자신을 만들어낸 후, 그런 자신마저도 지워나가는 시를 쓰면서, 세계와 타자를 두드리는 저 힘겨운 행위를 완성한다. 산화하는 풍경이 말에 감겨 하늘로 날아갈 때, 역설적으로 대상과 세계를 두드리는 행위로 그의 시가 우리 곁에 남겨진다. 그의 시는 잉크가 증발하고, 종이가 닳을 때까지, 사물이 당도하거나 사라지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되고 말이 되어, 대상을 태워내고, 그 과정을 체험해내려는 투철한 자기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단정해 보이는 그의 시가, 열에 넘치는 부산한 사건이자, 정념으로 쏘아올린 하나의 스펙터클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_조재룡(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우리는 어떤 근거로 이름 하나 붙여놓고서 사물에 대해 안심할 수 있는가
송승환은 기호의 자의성을 취하하기 위해 직접 사물이 되어 사물의 속성을, 사물에 드리울 말과 사물을 관통해낼 말을 직접 감당해내려 한다.
나는 잃는다
나는 읽는다
나는 잊는다
나는 있는다
안치실 _「레이저 프린터」 부분
그리고 그 사물들의 사이(그리고 경계)에 위태롭게 서기를 자처한다.
종이가 있다
노랑
붉음과 초록 사이
주홍
붉음과 푸름 사이
청록
푸름과 초록 사이
빛의 얼룩
검정
모든 빛이 씌어지면서 사라지는
흰 빛 _「마크 리더」 부분
카메라
이 파란색
저 파란색
사이
다른 파란색
다른 파란색
그 모든 파란색의 경계 _ 「카메라」 부분
또한 송승환의 시는 존재에로 가장 가까이 다다가기를 꿈꾼다. 이는 마치 말라르메가 그랬듯, 오규원이 그랬듯, 말과 대상이 닮아갈 때가지 덤벼듬의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시인은 붉게 피어오른 시클라멘에 가 닿기 위해 “붉어 붉은 붉지 붉게……”를 수없이 되뇐다. 그리고 랜디 앞에서 “분홍 부운홍 분분 홍홍……”하며 울듯 웃듯 말한다. 제라늄에게 가려면 “푸름 푸름 푸르스르……”를 몇 번 더 말해야 할까. “희여언 희여언 희어 희어 혀혀 희어……”를 열 번즘 말하면 마르시아 꽃에 좀더 다가서 있을까. 송승환은 그렇게 좀더 좀더 대상에 다가가려 ‘애쓴다.’
나는 사과에게 출발한다
나는 사과에게 가고 있다
나는 사과에게 도착한다
내 손가락 끝이 사과에 닿아있다 - 「모터에서 제네레이터까지」 부분
송승환의 이러한 여정은 끝이 없다. 이 헛짓으로 단련된 현란하고 난해한 세계는 끝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이 끝없는 난항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 실패가 된다. 확정되지 않은 사물, 그 가능성의 확장은 곧 우리가 서 있는 세계 지평을 넓히는 거대한 도전으로 남기 때문이다.
시의 본질 중 하나, 낭독하는 즐거움
―모든 의미가 퇴각하고 리듬만이 남아 존재의 울림을 전한다
이 시집의 제목은 ‘클로로포름’이다. 클로로포름은 마취제의 원료로 쓰이는 화학 성분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클로로포름, 클로로포름 하면서 연이어 읽다 보면 의미는 모두 날아가고 혀의 감각만이 남아 리듬을 전한다. 오롯이 자신의 느낌, 그 언어적 체험에 집중해 시어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은 곧 새로운 시, 새로운 언어의 출현을 기대하게 한다.
울울창창 울울창창 검은 숲 검은 불
불 춤 불 춤 불불 춤춤 불불 춤춤 _「시클라멘」 부분
어떤가. 혀가 춤추고 고개가 흔들리는 물리적 추위가 곧 빨간 시클라멘 꽃으로 다가가는 행위였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가공 가늠 가닥 가동 가락
가래 가로 가루 가름 가리
가막 가목 가미 가배
가변 가분 가산 가상 가색
가선 가설 가성 가속 가스 _「잭해머」 부분
시인은 잭해머의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가공, 가늠, 가름, 가분, 가속…… 그것들은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고 혀를 놀릴 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이 어느 순간 가장 직접적으로 잭해머의 본질을 전달하는 것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송승환의 시들 속에서 운위되는 형식의 간결함이나 말의 경제성은 시에 주관적인 공간을 부여하고 의미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비한다. 말의 열기로 대상을 차츰 태워나가는 이런 시들을 읽다 보면, 그 에너지로 인해, 결국 시를 읽고 있는 사람마저 증발되는 사태에 직면하고 만다. 이것은 사물이 말로 기획된 하나의 사건이 될 때까지 사물을 꿰뚫어내며 사물의 다양한 양상을 적확하게 포획하는 직관이 그의 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