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꾸준히 철학과 심리학 등의 인문학 전반에 대한 탐구와 사색을 계속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이 깊게 녹아든 시를 써온 이경임 시인이 1998년에 발표한 시집 『부드러운 감옥』 이후 무려 13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 13년 전 우울함이 극에 달했을 때 죽음과 어둠의 감옥에서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희망을 걷어 올릴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첫 시집에 이어 이번에는 중년에 이른 시인이 자신의 세계를 응시하며 ‘비움’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시집 전체를 끌어 나간다.
이경임의 실험은 새로우면서 동시에 절박하다. 새로움은 그가 지혜와 욕망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한 게 아니라, 그 둘의 중첩을 현대사회의 실상으로 보고 그 상황의 극복을 모색한 데서 비롯된다. 시인의 시는 차원의 차이를 분쇄하면서, 그 안에 겹의 차원을 만드는 것. 현존을 겪으면서, 그 겪음이 그 자체로 부재의 도래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슬픔’이라는 정서를 폭발력 있게 전달한다는 특징을 가진 시편들은 어렵고 아픈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자신에게 찾아온 시를 통해 자기 치유와 극복의 가능성을 찾은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無의 매혹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늘
반 고흐의 귀
無의 매혹
회전문
一生
비 오는 날
꽃씨에 대한 명상
축제
구멍에 관한 사색
사라지는 얼굴
길 위에 서서
잠깐씩
네가 없는 곳
제2부 춤추는 시계추
춤추는 시계추
신성한 식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바다
회전목마
째깍째깍
모래시계 속에서 수족관
흙 한 줌
생각하는 인형
없는 주어
한 개의 모래 알갱이
조금 떨어진 곳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고장 난 시계
분수대 앞에서
환청
제3부 생활의 발견
마네킹 일기
한 씨네 산양 이야기
생활의 발견
지네
물질처럼
이상한 공연
식욕에 관한 고민
그 정원에서
이중생활
세월
냄새
호수
부끄러운 원근법
고독
붉은 달리아 꽃들
곡예사
자화상
오리
동행
제4부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비밀
길거리에 핀 이름 모를 잡초
꿈의 해석
죽음에 대한 명상
봄비
심연(深淵) 1
심연(深淵) 2
종착역
잠
거울 속의 눈사람
그 나무 앞에서
아름다운 연애
그 순간이 지나가면
포옹
충돌
그곳에서
너를 어떻게 사랑할까
바람 한 줄기
해설|그대 영혼 속에 지네가 살아 있다ㆍ정과리
저자
이경임
출판사리뷰
‘비움’마저 욕망이 된 세계
모든 허위를 떨어내고 이제,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이경임 시인의 새 시집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2011, 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되었다. 1998년에 발표한 시집 『부드러운 감옥』 이후 무려 13년 만이다. 시인은 꾸준히 철학과 심리학 등의 인문학 전반에 대한 탐구와 사색을 계속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이 깊게 녹아든 시를 써왔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슬픔’이라는 정서를 폭발력 있게 전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시인이 살아가며 어렵고 아픈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자신에게 찾아온 시를 통해 자기 치유와 극복의 가능성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13년 전 우울함이 극에 달했을 때 죽음과 어둠의 감옥에서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희망을 걷어 올릴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첫 시집에 이어 이번에는 중년에 이른 시인이 자신의 세계를 응시하며 ‘비움’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시집 전체를 끌어 나간다.
텅 빔으로 가득 차다
이 시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이경임의 비움은 비움의 비움, 즉 비움 욕망의 비움, 다시 말해, 비움이 욕망이 된 현 사태에 대한 비움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구름은 대합실처럼 붐비다가 텅 빈 항아리가 된다
구름은 도서관
구름은 분실물 보관소
읽지 못한 것들로 채워져 있고
잃어버린 것들로 메워져 있다
-「一生」 부분
내가 달리고 있다고 확신에 차 있을 때
삶은 눈먼 자의 환희처럼 빛난다
-「회전목마」 부분
일생은 진리로부터의 좌절과 욕망 충족의 실패로 가득 차 있다. 절대적 진리를 구가하며 연구의 연구를 거듭해도 결코 ‘절대’의 경지에는 닿을 수 없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여 기어코 얻더라도 그것이 진정 욕망의 충족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꾸준히 자신의 지혜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공부하고,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신화다. 내가 달리고 있다고 확신에 차 있더라도 그것이 눈먼 자의 환희와 다를 것이 없다. 자신에 대한 맹목을 자기에 대한 ‘확신’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절대에 대한 믿음과 억지로 붙여놓는 데서, 삶의 환희를 극대화하는 것뿐이다.
이경임의 시는 읽는 것만으로 아프다. 그녀의 시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삶의 이러한 허위와 좌절을 남김없이 드러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직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그곳은 겨울 숲이다. 이 시집을 처음 든 사람들은 의아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의 끝자락이 머물며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계절에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라니. 그렇지만 이경임의 시에서 겨울은 단지 연말에 찾아오는 추운 계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에게 겨울은 모든 잎을 떨어낸 겨울의 어둠이 갖는 평화, ‘비움’으로 가득한 세계를 말한다.
비어 있는 숲들은 장례 행렬 같다
어떤 숲은 유아세례식 같기도 하지만
이 숲은 텅 비어 있으면서
숨이 막힐 듯이 채워져 있다
어둠이 숲을 채우면 이 숲은 무겁다
어둠이 숲을 채우면 이 숲은 무겁지 않다
숲의 형식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 숲에는 요염한 여인이 누워 있다
이 숲에는 성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이 숲은 차갑지 않다
빛이 비치면 이 숲은 평화롭다
빛이 비치면 이 숲은 평화롭지 않다
이 숲에는 짐승의 냄새와 신의 체취가 떠돈다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전문
이 시집 전체에서 일관성을 이루고 있는 동일 형식의 실험(A는 B다/A는 B가 아니다)은 위의 시에서도 역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시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A를 B라고 말했다가 그 다음 행에서 B가 아니라고 기술하는 것은 의미를 의미 없음으로 전환하여 도저히 시인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둠이 숲을 채우면 숲은 무거운가, 무겁지 않은가? 빛이 비치면 숲은 평화로운가, 평화롭지 않은가? 이는 마치 미로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게끔 한다. 하지만 찬찬히 읽다 보면 앞의 형식을 계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시인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부정성을 드러내는 것, 해설자 정과리는 이를 “항아리를 깨지 않고”“썩은 물을 비워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어둠이 무거운지, 빛이 평화로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모든 허위를 들춰낸 뒤 이 겨울 숲에는 “짐승의 냄새와 신의 체취가 떠돈다.” 이경임의 시집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에서는 모든 썩은 것들이 빠져나간 진정한 비움의 세계를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