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규정되지 않고 불확정적인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 김이듬. 2001년 데뷔한 이후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에 공들이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시적 담론을 추구하며 시단의 한 그룹을 형성한 그녀가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했던 첫 시집과 “도저하고 명랑한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두번째 시집을 거쳐 세 번째 발걸음을 내딛었다.
죽음의 환락 속으로 거칠게 틈입하는 김이듬의 ‘마임’은 김수영이 일찍이 건설한 ‘온몸-게토ghetto’의 성실한 시민, 아니 ‘흔들리는 난민’으로 주체를 등록하기 위한 ‘자해’와 ‘헌정’의 몸짓이다. 말 그대로의 “타고난 발성”은 입을 막거나 목청을 제거하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불충분하고 불안정하다. 그녀의 ‘온몸’이 언어이고 입이어야 하며 그녀가 ‘온몸’에 구멍을 계속 뚫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과 피를 동시에 철철 흘리는 ‘온몸의 마임’. 그곳은 말할 수 없는 애인끼리의 모럴moral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대화가 갱신되고 성숙되는 원형 공간 그 자체이다. 여전히 빛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들의 말할 수 없는 빛남에 대하여 말하기 위한 시인의 몸부림이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작품집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나 말고는 아무도
함박눈
겨울 휴관
말할 수 없는 애인
인공호흡
사생아들
꽃다발
날치고 훔치고
거기 누구 없어요
문학적인 선언문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폐와 이발사
파도
날마다 설날
12월
호수의 백일몽
제2부
기적
기타의 행방
모계
백발의 신사
너무 놀라지 마라
당신의 코러스
카트를 타고
질&짐
생활의 발견
마임 모놀로그
자살
버린 애
옥상에서 본 거리
도플갱어
오빠가 왔다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지방의 대필 작가
나의 파란 캐스터네츠
어머니의 방
달래보기 시리즈
부부 자해공갈단
권태로운 처사랑
나는 세상을 믿는다
동시에 모두가 왔다
크라잉게임
아케이드
숲
이상한 모국어
제3부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응답
성으로 가는 길
전람회,동피랑,골목
종업원
오늘도
마지막 연인
스침
제자리뛰기
슬럼프
등단 7년
저물녘 조언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때
세레나데
삼월은 붉은 구렁을
행진
고향의 난민
해설|마임 모놀로그의 행방·최현식
저자
김이듬
출판사리뷰
말과 피를 동시에 철철 흘리는 ‘온몸의 마임’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끝내 내가 말하지 못할 때까지…
규정되지 않고 불확정적인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에 공들이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시적 담론을 추구하며 시단의 한 그룹을 형성한 시인 김이듬.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했던 첫 시집과 “도저하고 명랑한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었던 두번째 시집을 거쳐, 그녀의 세번째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이 독자들을 찾아왔다.
2007년 말 출간된 전작 『명랑하라 팜 파탈』에서 김이듬 시인이 들려주었던 세이렌의 노래를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세이렌의 노래」, 『명랑하라 팜 파탈』)라는 표현처럼 치명적인 월경으로 유혹했던 시인은 이 세상에 없던 불길한 세이렌의 시간 속으로 듣는 자를 인도했었다. 그리고 이 ‘팜 파탈-세이렌’의 ‘명랑’은 고통을 다른 쾌락으로 만드는 시적 체위로써, 시인이 가진 시적 에너지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당시 문학평론가 이광호 씨가 쓴 해설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세이렌이여, 그 한없는 몽유, 혼몽의 시간 속에서 명랑하라. 영원히 유령처럼 놀아라.”
“마음껏 메마르고 신나게 어두워지리라. 흥청망청 삶을 다 사용할 테다”(시인의 산문, 『명랑하라 팜 파탈』). 김이듬 시인의 ‘명랑’, ‘유령처럼’ 노는 방식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껏 메마르고 신나게 어두워”진 그 자리에서, 시인은 “삐걱거리는 책상, 치고받는 부모와 우는 계집애, 그치지 않는 빗소리, 무기가 된 내 걸상과 찢어진 얼굴, 내가 죽인 애인들의 빛나는 얼굴, 쓰레기와 오물, 면사무소와 읍사무소와 포도청을 향하는 진흙길, 떡이 된 고양이, 도주하는 자와 사로잡힌 자와 도피하려는 자와 친구 없는 친구들의 막다른 골목. 입구에서부터 달려와 내 몸을 푹 쑤시고 마구 애무하다 사라진 이 모든 것들의 뿔, 얼핏 번쩍했던 순간 뒤의 칠흑, 진흙처럼 흘러내리던 시간”(시인의 산문, 『말할 수 없는 애인』)을 만났으리라. 그리고 이것들은 오롯이 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이 한 말이 아니라고 이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은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럴듯하고 좀더 감동시키고 슬프게 하는 말”을 찾는 시인에게 애인이 말한다. “이제 내가 네 몸에 뭐라 쓰는지/숨을 몰아쉬고 받아 적어”(「지방의 대필 작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애인』에서 독자들은 ‘말’이 아니라 ‘몸짓’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몸짓(마임)’으로 시연하는 것일까. 『명랑하라 팜 파탈』의 해설에서 이광호는 김이듬의 시에서 상징질서 내부의 주체화를 거부하는 혼종적 주체인 화자와, 온갖 대립적 경계가 갖는 상징적 권위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언어에 주목했다. 이것은 시인의 시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말할 수 없는 애인』은 거기서 더 나아가 “타고난 발성 우리의 언어”를 살고자 한다. 그렇기에 구렁텅이 삶조차 구원일 수 있다고 시인은 열연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격 미달 함량 초과 안전도가 미심쩍은 우리”이기에 “타고난 발성”(「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우리를 규정짓는 이들에 의해 언제 입이 봉해지고 목청이 제거될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온몸으로 ‘마임’을 펼쳐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시인의 산문, 『명랑하라 팜파탈』)을 더듬어보았던 시인은 이제, 몸부림을 치며, 온몸으로 쓰고 또 쓸 것이다. 여전히 빛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들의 말할 수 없는 빛남에 대하여. 그것을 끝내 말하지 못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