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상 문학 대상을 수상하며 시적 기량을 펼쳐온 시인 이재무의 아홉번째 시집.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정직한 내면 토로와 투명한 사물 묘사를 줄곧 결속하면서, 서정적 귀환을 통한 자기 탐색에 골몰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완만하게 이으면서도 ‘스스로 흔들리며 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것이라는 투명한 전언을 풀어낸다.
시인의 시어들은 사물의 ‘겉’과 ‘속’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세계의 긍정과 생의 슬픔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작업은 물(物) 속에 숨겨진 은밀한 내부까지 들여다보게 만들고, 시인을 ‘감각적 현존’이라는 본연의 위치로 회귀시킨다. 격정의 깊이를 언어 뒤편에 숨긴, 그 내밀하고도 단단한 목소리에 저절로 귀 기울이게 되는 작품집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나무 한 그루가 한 일
돌로 돌아간 돌들
말 없는 나무의 말
꽃들의 등급
문신
눈
술이나 빚어볼거나
펜에 대하여
적막을 줍다
백둔정방 요양원에서
설야
그늘에 물들다
무중력 저울
태양의 부족
불의 지청구
저녁 산책
올가을 화장품이나 만들어볼까
버림받은 자
뜨거운 여름
2부
내 몸속에는
간절
주름진 거울
로드 킬
시소의 관계
수평선
묵묵한 식사
된장찌개
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
두부에 관한 명상
도망가는 산
저녁, 교정에서
또 그렇게 봄날은 간다
봄날을 치우다
빨래들만 즐겁다
물의 기억
자국
3부
똥파리
물의 신
수직과 수평
첫인사
피를 보다
뼈아픈 질책
웃음의 배후
공공근로
수상한 세월
칼과 도마
묵언의 빛깔
눈사람
숟가락
통조림
샛강
겨드랑이가 가볍다
맑은 물은 바닥을 감추지 않는다
불나방
장갑들
기우뚱한 어깨
우리 집 선풍기는 고집이 세다
4부
숫눈
명경
클릭
신발이 나를 신고
푸른 거처
워낭 소리
자작나무
경쾌한 유랑
꽃잠
저 꽃들 수상하다
폭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비의 냄새 끝에는
고요 한 송이
일렬종대
흑산도 홍어
해설 자유롭고 경쾌한 본원으로의 귀환 - 유성호
저자
이재무
출판사리뷰
삶의 견고한 질서와 타율성에 가하는 풍자로
세계의 부정성을 전환시키는 경쾌한 유랑의 여정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상 문학 대상을 수상하며 시적 기량을 펼쳐온 시인 이재무의 아홉번째 시집 『경쾌한 유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은 그동안 이향(離鄕)에 따른 근원 회귀의 열망, 현실 천착과 생태적 사유의 결합을 지나, 실존적 반성과 자기 탐색의 흐름을 면면히 이어왔다. 이번 시집은 이러한 흐름을 완만하게 이으면서도 ‘스스로 흔들리며 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것이라는 투명한 전언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오랜 격정의 시간과 들끓던 내면의 열망을 충분히 가라앉히면서, 중년 이후 삶의 형식을 깊이 묻고 사유하는 반성적 성찰의 기록이 바로 시집 『경쾌한 유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돌” “빈 항아리” “붙박이 나목” 등의 자연 사물과 내면 사이의 합일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이는 세계와의 치명적 불화를 발화하는 데 주력하는 최근 일각의 흐름과 대비되는 그만의 시적 화법이라 할 수 있다.
맹렬한 적개심으로 존재를 불태웠던
질풍노도의 서슬 퍼런 날들이 가고
돌들은 흩어져 여기저기 땅속에 처박혔다
돌 속에서 비칠, 어칠 사람들이 나오고
비로소 돌로 돌아간 돌들
저마다 각자 장단 완급의, 고요한
풍화의 시간 살고 있다 ─「돌로 돌아간 돌들」 부분
이 시에서 등장하는, 일상 속에서 흔히 마주치는 “돌”은 시인의 세계로 들어와 고요한 “풍화의 시간”을 살아내는 존재로 전환된다. 이재무는 이번 시집에서 사물의 ‘겉’과 ‘속’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세계의 긍정과 생의 슬픔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작업은 물(物) 속에 숨겨진 은밀한 내부까지 들여다보게 만들고, 시인을 ‘감각적 현존’이라는 본연의 위치로 회귀시킨다.
이렇듯 시인은 존재를 깊이 있게 투시하여 그 심부에 내재된 열정을 매개하고 표현한다. 그는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타율적 기제들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며, 사물 속에 담겨 있지만 일상의 눈으로는 간과하기 쉬운 견고하고 항구적인 질서와 힘을 풍자한다. 노여워하며 고발하는 것이 아닌 풍자와 자조로, 이재무는 이 세계의 부정성을 전환시키는 경쾌한 유랑을 꾀한다.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그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웃음의 배후」 부분
시인 이재무는 웃음에도 배후가 있다고 말한다. 웃음이 계속 비어져 나와 “가로수” “도로” “육교” “지하철” 등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지만, 그러다가 “생활의 목에/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만 같이 느끼는 그다. 이는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팍팍한 삶에 대한 회한(「첫인사」)일 수도 있고, 이제 중년이 되어버린 자신의 허무함(「주름진 거울」)일 수도 있다.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지는 것에 가까운 삶의 감옥, 즉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 시인의 초상은 독자에게 찌릿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웃음의 틈새로 번지는 슬픔의 중압감으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삶의 폐쇄성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시인은 삶을 지배하는 타율적인 기제들을 새로운 존재로 전환시켜 꿈꾸는 서정적 처방을 내리고자 한다.
새벽 공원 산책 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 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경쾌한 유랑」 전문
새벽 산책 길에서 만난 참새 무리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듯, 힘들고 고단한 삶에도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시인은 표제작 「경쾌한 유랑」에서처럼 세계의 부?성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며, 그 자체를 발랄한 놀이로 전환시키는 시의 힘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재무는 이번 시집에서 정직한 내면 토로와 투명한 사물 묘사를 통해, 서정적 귀환에 골몰한다. 동시에 일상적이고 물리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을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았다. 시집 『경쾌한 유랑』은 격정의 깊이를 언어 뒤편에 숨긴, 그 내밀하고도 단단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자유롭고 경쾌하게 본원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이 ‘역동의 고요’에, 이제 우리가 귀 기울일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