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만물이 품고 있던 시가 첫울음을 울고
닫혀 있던 미망의 뒤 통로에 사자(死者)의 눈빛이 번득인다“
199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데뷔한 함성호 시인이 전작 『너무 아름다운 병』 이후 10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 광막한 시간을 배회하는 시인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언어를 꿈꾼다.
신화이자 악보인 시집 『키르티무카』는 이 불멸의 언어가 기록하는 ‘너머’에 대한 황홀한 기록이다. 빛과 어둠의 태초, 유년을 지나 현재에 닿는 시의 궤도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끝나기는커녕 그로부터 시작되어 우주적 이미지로까지 공명한다. 그렇게 영원히 닫히지 않을 문으로 기억될 이 ‘영광의 얼굴’은 이제 ‘나’를 세계의 ‘너머’로 인도하여 ‘나’의 뒷모습을 맞닥뜨리는 아찔한 경험을 전한다.
함성호의 새 시집 「키르티무카」은 시의 끝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노래다. 보기를 포기함으로서 보게 되는 너머 세계의 대한 노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옥망을 직시하고 그 불가능의 속으로 파고드는 언어다. 이 언어는 불멸을 꿈꾼다. 사라짐을 통해 사라짐을 극복하려든다. 영원은 늙지 않는다. 이 시집이 노정하는 바가, 영원히 새로울 것은 이 때문이다.
목차
시인의 말
1. 검은 말씀
루바토
2. 어부림의 청중들
투비트
사방을 잃다
자살자들
당신들의 바깥
과자와 설탕을 실은 장난감 열차
홍대앞 금요일
정말 위대한 여름이었다
은행에서 온 편지
(미치겠네)
파경
죽은 개
루바토
3. 봄밤 강화
루바토
4. 감각의 입체
감각의 거울 위를 날으는 나비
감각의 입체
기억-, 그 냄새
(여지없이)
두 개의 해안
아가씨, 시간 있으시면 연양갱이나 같이 먹을까요?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 왜 유가 아니라 무인가?
두 나무 사이
상징의 옷
5. 키르티무카
루바토
6. 사상의 지평선
단풍나무
절정
사상의 지평선
7. 사랑, -불가능한
루바토
8. 얼음 호수 쪽으로
루바토
해설| 언어의 연옥, 존재의 피안ㆍ강정
저자
함성호
출판사리뷰
“모든 인식과 행동과 정서가 몽땅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자” 함성호의 네번째 시집 『키르티무카』가 출간되었다. 전작 『너무 아름다운 병』 이후 무려 10년만이다. 침묵의 시간으로 보기에는 너무 오랜만이다. 그러므로 그간 그의 행적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잠시 덮어두기로 한다. 그 모든 질문과 의심을 거둬들이는 대신 시집 『키르티무카』를 펼쳐보자 그는 시로 화답할 것이다. 그는 시인이므로.
‘키르티무카’는 괴물의 이름이다. 이 괴물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는 힌두 신화의 한 대목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느 날 파괴와 창조의 신(神) 시바는 한 불경스러운 괴물을 멸하려다가 다른 엉뚱한 괴물을 낳아버리게 된다. 심한 뻐드렁니에 피골이 붙은 이 괴물은 나타나자마자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이 엉뚱한 괴물은 결국 허기를 참지 못하고 먼저 온 괴물을 먹으려 든다. [……] 시바는 대답한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너 자신을 먹어라!” 그러자 이 괴물은 정말 자신의 발부터 시작해서 두 다리, 두 팔, 몸통까지 다 먹어치운다. 얼굴 하나만 달랑 남은 괴물은 그러고도 계속 허기에 괴로워한다. 시바는 이 어이없는 상황 앞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준 예를 나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부르리라.”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 ─ 뒤표지 글 부분
이렇게 해서 이 괴물의 얼굴은 최고의 신 시바에게로 가는 입구를 지키게 된다.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신이 낳은 자식이자, 괴물. 욕망의 화신이자, 가장 영광된 자리에 놓여 있는 자, ‘키르티무카’. 한데, 이 모순, 낯이 익지 않은가. 가장 미천한 지위를 가진 숭고한 이름 그렇다. 키르티무카는 시와 시인의 다른 이름이다. 시집 『키르티무카』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 세계를 단숨에 집어삼키고 싶은 욕망과 그럴 수 었는 끝없는 좌절의 허기는 시인의 그것과 진배없다. 시인 함성호는 이 극한 갈등으로부터 출발한다. 시의 끝에서 출발하기. 이는 새로운 始作이고 詩作이다. 여기 전염벙처럼, 새로운 시가 창궐한다.
시집 『키르티무카』는 한 권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그 건축물은 성이고, 궁전이다. 신전이다. 그 속은 은밀하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는 자는, 이 은밀함에 흥분하게 된다. 수백수천의 나뉨 속, 모서리를 돌 때마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엇은, 미로타우루스일 수도, 진기한 보물일 수도 혹은 또 다른 모서리이거나 막다른 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여는 당신은 당황할 것이다. 아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템포 루바토’ 즉, 변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작도 하지 않은 곡의 변주로 시를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 세계는 너무 오래전부터 있었고, 언어는 아니 이 시집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쓰여 왔으므로, 이 변주는 타당하다. 다만 시인 자신의 리듬에 맞춰, 자의적인 해석이 시작된 것 일뿐. 이로써 최초의 세계(페이지)가 열린다.
1. 검은 말씀
역주
이 와):여기서 필자가 영어로 기쁨을 뜻하는
단어(눈이 와) ‘a delight’ 대신 ‘a de-light’를
사용한 것은 달마의 전설과 관계가 깊다. 달마는
득도(得道)를 위한 수행 기간 동안(눈이 와)
내적 인식의 눈을 갖기 위하여(눈이 와) 자신
의 눈꺼풀을 잘라내었다고 전한다. 그 결과(눈
이 와) 그는 외부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즉 빛
을 빼앗기지만(de-light) 그 대신에(눈이 와)
도에 이르는 기쁨(delight)을 얻게 된다. 그러므
로 ‘de-light’는 빛을 잃는 동시에(눈이 와)
기쁨을 얻는다는 이중 의미로 쓰여졌다.(눈
― 〈루바토 1〉에서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라는 성경 말씀과 같이 출발하는 이 시집은 이야기의 지독한 불면성을 공시한다. “처음으로 돌아와야 하는 끝나지 않는” 반복재생은 죽음을 맞이하여야 그 끝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이 순환고리(“링반데룽”)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그 시작은 언제나 처음이 아니다. 여기서 그는 이탈을 시작한다. 변주이다. 변주만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세헤라자데와 같이 이야기꾼으로서의 방황(불면)은 그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간다. 자신의 출생지, 그 뿌리 깊은 공허 속이다. 시집에 해설을 쓴 시인 강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공허’는 함성호가 둥그렇게 엮어놓은 ”무한 반복 재생되는 문장의 시제“처럼 어두와 어미가 맞붙은 채 시작도 종결도 없이 순환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 공허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전무(全無)’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니 이것을 불가능하다. 강정 역시 이를 인정한다. 공허 속에서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전달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계속 전한다. “‘공허’는 ‘발생’ 이전에 떠도는 부재하는 것들의 입김이 아닐까. 시는 그 ‘부재의 입김’을 존재의 표면에 투과시켜 거기에서 발생하는 열기와 소리를 언어로 음각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 시집 『키르티무카』는 “이전에 떠도는 부재하는 것”들이 전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빛이 있으라”라고 전하던 태초에 말씀이 빛과 어둠을 갈라놓듯, 내정된 부재를 소환한다.
그대여, 나를 사유해다오
나를 세상의 깊이에서 불러다오
우리는 존재의 흐름을 쫓는 여울
그대는 나를 여기에 있게 하는
그 사람─나는 떨림,
나는 빛,
나는 무늬─저기, 죽음의 수면을 울려
여기, 내 심장의 고동을
소리의 거울에 비추어다오
거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햇빛을 두드리며 작렬하는 동백 숲
바람을 타고 흐르는 은사시나무처럼
두텁고, 두꺼워라
어디든지라면, 여기도 아닌
여기라면, 그곳이 어디든
어쩔 수 없이,
또, 스스로
(……나는) ― 「봄밤강화」에서
시인은 원한다. 개인의 체험이 녹아 있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기쁨을. 이것이 첫 시에서 말하는 de-light에서 출발하는 delight이다. 그러나 이 ‘기쁨’은 깨달음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나를 죄다 집어삼키는 자에게 그런 기쁨은 허용되지 않는다. 피안 너머의 진리는 시인에게 괴로움일 뿐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후벼 파내고 있다. 지독한 불면으로부터 오는 끝없는 이야기들, 그 순환의 고리는 끊이지 않는다. 단지 그는 깨닫는다. 처음부터 이곳이 빈 곳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언제나 혼자였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 기쁨의 정체는 무엇인가. 처음부터 혼자였던, 개체들을 위한 치열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어머니 전 혼자예요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공중을 혼자 떠도는 비눗방울처럼
무섭고 고독해요
나는 곧 터져버려 우주 곳곳에 흩어지겠지요
아무도 제 소멸을 슬퍼하지 않아요
어머니 전 혼자예요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고요히 솟아오르는 말불버섯 홀씨처럼
어둡고 축축해요
나는 곧 지구 부피의 여덟 배로 자랄 거예요
아무도 이 거대한 가벼움을 우려하지 않아요
─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왜 유가 아니라 무인가?에서
이 진혼곡은 사실, 처음부터 노래였다. 이 노래는 끝없이 반복되는 시집의 구조와 같이, 죽음에 이르러서 그 끝이 날 때까지 무한하다. “끝없이,/언제나 다시,/저승의 유행가일” 이 노래는 부르며 듣는 들으며 부르는 생의 가장 서러운 형태임에 분명하다. 모든 시작은 그러하다. 그러나 함성호의 이 설움이 더 특별해보이는 것은 생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집어 삼키는 자가 스스로를 목도하며 얻는 비애에서 출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집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바쳐졌다(헌사 참조). 시인 함성호는 존재한 적이 없는 ‘너머’의 언어를 꿈꾸고 그 앞에서 절망한다. 그럼에도 그 절망이 빛나는 까닭은 그 절망마저 기록하기 때문일 것이다. 빛과 어둠의 태초와 유년을 거슬러 올라가 비록 만나는 것이 자신의 막막한 등일지라도 함성호는 끝까지 가보려 하는 것이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라는 명제는 틀렸다. 시는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가, 끝없이 꿈틀대는 세계의 직관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의 전위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함성호의 새 시집 「키르티무카」은 시의 끝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노래다. 보기를 포기함으로서 보게 되는 너머 세계의 대한 노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옥망을 직시하고 그 불가능의 속으로 파고드는 언어다. 이 언어는 불멸을 꿈꾼다. 사라짐을 통해 사라짐을 극복하려든다. 영원은 늙지 않는다. 이 시집이 노정하는 바가, 영원히 새로울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