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현실과 환상, 진짜와 가짜, 승자와 패자,
지루하고 고단한 이분법 세계 속 진실을 캐묻는다.
앞서 발표한 작품들에서 작가 염승숙은 현실 속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3차원의 평범한 일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설적 인물들을 이야기 속에 불러내며 낯선 환상의 세계를 그렸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낯설지만 어디엔가 있을법한 존재들, 현실에 보다 가까워진 이야기들로 존재와 진실에 대해 풀어놓는다. 작가는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을 통해 어디 한 곳 귀의할 곳 없는, 하지만 분명히 이곳에 존재하는 노웨어맨(nowhere man 혹은 now here man)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진짜를 흉내내기에 급급한 가짜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적당히 진짜를 따라가는 가짜로 자신을 포장하고,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 듯 그곳에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그들 모두는 가짜이면서도 그 자체로 고유하게 실존한다. 작가는 그런 우리의 모습과 같이 살아가는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값,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이지 않아서 가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나갈수록 결국 그리운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는 작가의 말은 그가 이 작품들을 통해 말하려는 바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책은 그렇게 사소하고 불안한 것들,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비추는, 흐릿하지만 따뜻한 빛이다.
목차
당신과 악수하는 오늘
노웨어맨
무대적인 것 - 노웨어맨 2
레인스틱
라이게이션을 장착하라
바디펌 기기의 생활화
곡선을 걷는 시간
프로24
해설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_이수형
작가의 말
저자
염승숙
출판사리뷰
Listen, hes a real nowhereman!
누구나, 한평생 우두커니, 그러나 꿋꿋이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삶,
보이지 않는 것들에 매혹되는 당신. 그래요,
“상상하는 시간만큼은 버는 겁니다!”
2005년 『현대문학』 6월호에 단편 「뱀꼬리왕쥐」를 발표하며 등단한 소설가 염승숙이 첫 책 『채플린, 채플린』(문학동네, 2008) 이후 3년 만에 두번째 단편집 『노웨어맨』(문학과지성사, 2011)을 발표했다. 등단작 「뱀꼬리왕쥐」의 ‘꼬리뼈 전문 물리치료사’나 몸에 숫자를 새기고 태어난 「수의 세계」의 주인공 ‘공영’ 말고도 거인증을 앓거나 달력 속을 드나드는 엄마 등 현실 속 인물이라고는 조금도 믿기지 않는, 익숙한 규범과 사전적 정의, 3차원의 평범한 일상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소설적 인물들 그리고 일찌감치 ‘염승숙 스타일 개인방언’이라 불리는 소설적 언어로 낯선 환상의 세계를 이야기했던 염승숙은 이번 책에서, 현실과 환상, 진짜와 가짜, 승자와 패자, 지루하고 고단한 이분법 세계 속의 진실을 캐묻는다. 뱀꼬리왕쥐나 고양이, 숫자 귀신들, 달력 화보 속의 핀업걸, 달로 간 채플린 등 루이스 캐럴이나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팀 버튼의 영화 속에서나 익숙한 인물들 대신 ‘개인 파산’이나 ‘청년 실업’ 같은 현실 세태 속 “어디 한 곳 귀의할 곳 없는” 사람들, 노웨어맨(nowhere man 혹은 now here man)을 통해 말이다. 길거리 낡은 건물이나 전봇대에, 공중에 나붙은 전단지 속 ‘파산, 회생, 상담, 도움, 구제’ 같은 단어들로, 매일매일 아프고 쓰디 쓴 상처를 목구멍으로 되삼키는 지금 여기의 우리들에게 염승숙의 8편의 소설은 허무맹랑한 환상의 세계와 지독히도 끔찍하고 비루한 현실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삶의 진실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달리는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결국 우리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러니 88올림픽에 설렜던 아이가 자라 88만원 세대가 되는 것이 결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 삶이란, 오로지 수궁하고 수용하며 건실한 기반을 다져나가게끔 되어 있다는 것. 쓸쓸함은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번식해 천장을 적셔나가는 곰팡이와도 같이 지우고 또 지워내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_「레인스틱」에서
전작 『채플린, 채플린』(2008)에 부친 「작가의 말」에서 염승숙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고, 일 초 전에 숨쉬던 나는 일 초 후에 어디고 가는지 묻고 싶었다. 말하고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의심스러웠고, 나를 살게 하는 이 역시 정말 나란 주체가 맞는지 의아스러웠다. ‘숨’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내가 분명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는지 나는 두려웠다.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갖고 싶어 했던 건 결국 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소설 창작의 계기를 밝힌 바 있다. 그렇게 세상에 부려진 온갖 것의 안팎 이야기들을 좀체 손길이 가지 않는 국어대사전을 뒤적이거나 혹은 조금 비틀어 새로 만든 어휘들로 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한 염승숙은 초점이 흐리거나 뭉개진 프레임에 가해진 ‘흔들림’의 정체, 정규 궤도에서 벗어나 곡선을 그리거나 혹은 폐선으로 전락한 처지의 인물들을 응시하며 낯설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 것만 같은 기시감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오늘, 염승숙의 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기막힌 환상보다 리얼한 현실에 한 뼘 더 가까워졌다.
“모두가 가짜인데, 진짜를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인”(「노웨어맨」) 2011년 오늘, “적당히 유치하고, 적당히 진짜를 베낀 티를 흘리고, 적당히 아류다운 것”(「무대적인 것」)을 좇는 우리들에게, 염승숙은 “비루하지도, 해말끔하지도 않은, 평범하지만 동시에 생경한 누군가”(「레인스틱」)들을, “딱 보기에도 있는 듯 없는 듯 회사에 붙박인, 존재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라이게이션을 장착하라」)들을, “어느 외로운 이의 서러운 울음과 웃음이 뒤엉켜 스러지는 소리”(「레인스틱」)들을, 독서실을 전전하며 오늘도 내일도 취업을 꿈꾸는 하루 일당 8,220원 벌이의 지하철 커트맨을, 진짜라고 믿어진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는 또 다른 가짜로 귀결된다는 현대의 운명 자체가 이미 모순이라면, 모순된 조건하에서 또 다른 모순을 감행하고자 고안해낸 거짓말 네비게이션인 일명 ‘라이게이션liegation을, 현대 여성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바디펌 기기의 ’바디체커‘보다 못한 보조원 ’헬퍼‘가 종국엔 누군가를 비춰주는 가로등 신세로 전락하는 인물들을 소개한다.
수의 제유와 환상 기제 등을 통해 “비범한 평범함을 추구”하려 했다는 평론가 우찬제 씨의 언급처럼, 염승숙의 소설은 궁극적룀로 이런저런 좌절과 실패, 상실과 전락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값이 소진되었다고, 존재의 의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스레 환기시킨다. 그리고 ‘흔들리는 정체성, 무화된 정체성, 고갈된 정체성’ 등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론에 관한 문제의식과 동시대의 계량적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듯한 작가의 시선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매혹”되어 왔고, “잡을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 아득하고 멀기에 또한 동시에 안온하고도 평화로운 것. 역설적이게도 보이지 않아서 가질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내겐 아름답고 특별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나갈수록, 결국 그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작가의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리하여 “자주 아팠고, 쓸쓸했고, 부끄러웠”던 작가 염승숙의 고백처럼 이번 소설집은 그렇게 사소하고 불안한 것들, 우리가 속한 세계의 모든 루저loser 혹은 노웨어맨nowhere man 들에게 건네어진 “손이고 어깨이며 윙크”이다.
작가의 말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매혹되어왔다. 잡을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 아득하고 멀기에 또한 동시에 안온하고도 평화로운 것. 역설적이게도 보이지 않아서 가질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내겐 아름답고 특별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나갈수록 나는 깨달았다. 결국 그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자주 아팠고, 쓸쓸했고, 부끄러웠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는지 좀처럼 견딜 수가 없었다. 어둡고 긴 밤, 시간의 촉수를 베고 누운 채로 그러니 나는 곰곰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련하고 사소하며 불안한 그 모든, 나의 보이는 것들을.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채로 가만 보고, 듣고, 걸으며 썼다. 매일 그리울 지라도, 매 순간 아무것도 아닐 지라도.
작품 해설
존 레논이 부른 「노웨어맨」은 “그는 진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너와 나를 닮은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다른 누굴 위한 것도 아닌 계획을 세우는 데 골몰하다 사라져갈 것이다. 노래는 흘러흘러 걱정하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누군가가 손 내밀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 노웨어맨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걸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내밀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염승숙의 소설은 그렇게 노웨어맨을 위해 건넨 손이고 어깨이며 윙크이다. 이수형(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