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첫 시집 『흑백』으로 언어와 상상력이 한계처럼 내장하였던 경계를 깨부수고, 돌에 새긴 시처럼 단단했고 새로운 언어를 펼쳐보였던 이준규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시들과 자신의 블로그에 연속 등재한 장시 「문」 등 13편의 시들로 꾸려져 있다. ‘불안’이라는 마음의 질서를 숨기지 않은 채 언어의 본질로 접근해가는 이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내밀한 질서로 시를 써내려가는지 잘 보여준다.
시인은 이번 작품집에서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것인지, 얼마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거듭해서 인정한다. 그의 세계를 스쳐가는 수많은 강력한 타인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 태생적으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추위 앞에서는 연약하기 그지없을 뿐이다. 이제 연약한 존재들이 자신의 세계에 오고 가고 드나들기를 비밀스럽게 갈망하며 기억함으로써 망각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내 마당
문
후회
눈물
누가
그러나 너는 나비
칠월
휘파람새
검은머리방울새
모른다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새앙각시
그는
해설|체스ㆍ허윤진
저자
이준규
출판사리뷰
시인 이준규의 첫 시집 『흑백』은 놀랍고도 대담했다. 언어와 상상력이 한계처럼 내장하였던 경계를 깨부수었고, 이로써 얻은 날카롭고 생경하고 생생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베어내거나 찔렀다. 그때의 충격은 아픔이었으나, 경악과 경외를 내포한 것이었다. 그는 감히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이글거리는」)라고 선언했고 그다음 그가 행한 “글자놀이”(표4 글)들은 새로운 문법이었다. 그가 보여준 파격의 상상력과 언어 들은 그러나, 인문학적-문법적인 계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계보학적 이탈과 반항은 무엇보다 자신의 생활로부터 걷고 만지고 맛보며 얻은 사유들이었으므로, 마치 돌에 새긴 시처럼 단단했고 새로웠다.
2010년 겨울의 초입. 이준규의 새 시집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이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한 시들과 자신의 블로그에 연속 등재한 장시 「문」 등 13편의 시들로 꾸려져 있다. ‘불안’이라는 마음의 질서를 숨기지 않은 채 언어의 본질로 접근해가는 이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내밀한 질서로 시를 써내려가는지 잘 보여준다. 끝임없이 변주되고 변용하는 시어들,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기억과 망각이 나와 타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세운다.
도도한 입술이 흐리게 젖는다
섬망을 노래하는 어리석은 벌레들아
검고 푸르게 간격을 지우며 움직인다
시곗바늘 소리에 맞추어
사랑한다고 함께 죽자고
숨이 벅차다고 그늘이 휜다고─「흑백 1」 (『흑백』, 문학과지성사 2006)
이준규는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죽자고” 말한다. 공존을 위한 공멸이다. 슬프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의 시는 언제나 그렇다. 아름답게, 함께 사라진다. 그의 첫 시집 『흑백』은 이토록 처연한 노래의 책이었다. 그 무엇이든 망설임 없이 접근하는 그의 태도에 시집을 읽는 우리는 당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 거의 대부분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타자와 나의 거리가 붕괴된다. 이준규는 이처럼 한없이 투명한 언어로 모든 거리를 극복하는 시를 써왔다. 시집 『흑백』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정과리 씨(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를 지적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투명하게 언어를 움직이고자 하는” 기획은 순수한 주관의 운동, 즉, 자원과 방법과 표현을 모두 주체에게서만 끌어내어, 어떠한 이질성도 배제하기 때문에 투명한, 주관의, 주관에 의한, 주관을 위한 운동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가 보기에 그 기획은 “당신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타자성은 배제하는데 타자가 없으면 그의 기획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완성의 뜨거움은 “언제나 출발선에 있고 언제나 문 밖에 있”다─해설 「모든 시의 기저 수준으로부터」(이준규, 『흑백』, 문학과지성사 2006)
그는 이 절실한 한계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였다. 이러한 안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관찰자란 시점은 실상 불가능하지만, 이준규는 그 불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실패와 극복을 반복하였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모방하기 어려운 독창성과 한국 시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이번 시집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은 어떨까.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시선의 가능성, 시적 주체가 가지고 있는 감각 반응의 범위를 더 넓힌다. 그렇게 넓어진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응시하고 그 이면과 이면의 이면으로 연결되는 긴 통로에 몸을 던진다. 그 속에는 ‘분신’이 있다. 그것들은 시인 속에 내재된 ‘시’다.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준규는 지금껏 타자와 나의 경계의 해체, 그 관계의 투명성에 골몰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으로 시작한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문’이란 경계·단절의 상징이다. 잠겨 있건 열려 있건 그것은 ‘사이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준규가 내민 시는 바로 「문」이다. 그간의 그 무수한 노력을 마치 손바닥 뒤집듯, 그는 ‘문’을 말하고 있다. 단숨에 모든 관계가, 관계의 사이가 명료해진다. 그러나 이는 배반도 번복도 아닐 것이다.
문을 연다. 흐른다. 흰색에 더해지는 흰색. 문을 열고 들어가 문 앞에 서다. 지나가다. 멈추다. 지나가다. 서다. 문을 연다. 흐른다. 문을 연다. 문을 열었다. 서 있는 너. 그것. 돌아서는 몸. 돌아서는 몸. 흐르는 너. 흐르는 너는 주름이 깊다. 문을 밀고 들어가. 서다. 앉다. 그가 말한다. 흐른다. 그가 말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흘러. 그가 말한다. 사다새 하나. 사보텐 하나. 사보타주 하나. 매미에서 귀뚜라미까지. 그가 말했다. 실솔. 그가 말한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나. 그대는 어디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나. 금작화. 엉겅퀴. 수국. 개밀. 쐐기풀. 그가 말했다. 당신. 노래하는 당신. 당신은 어디에. 아무르 강 넘어 문지방 넘어 흐릿하게 선 그. 그를 보고 그가 말한다. 그가 뮸한다. ─「문」(『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문학과지성사 2010)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궁금증을 얻게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누구인가, 그가 들어간 문 안쪽은 어디인가. 과연 이 문은 단절인가 우선 ‘그’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그’를 보고 ‘그’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존재다. 잠시 후 ‘그’는 곧 ‘나’가 될 것이고, ‘여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 사실 그들은 모두 동일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인 자신은 아니다. “문을 연다.” 문을 연 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전부이며 아무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준규에게는 시적 화자란 없다. 시인은 시집 도처에 있다. 그렇다면 문은 어디인가. 문은 내부이다. 시의 내부이고, 시인의 내부이다. 여기서의 문은 경계이고 단절이 아니다. 가능성이며 공개이고 동시에 고요이다. 우리는 시인의 몸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시인의 몸은 한 세계가 된다. 우리는 세계로 들어간다. 그곳은 시인의 꿈이다. 본 적이 없는 황홀경이다. “문을 연다”란 말은 우리를 초대하는 아니 초대받은지도 모르게 초대되는 세계로의 흡입이다.
“너를 너를 너를 너를”
시집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의 특징 중 하나는 반복이다. 그는 시 도중 새 이름이나 나무 이름을 반복하거나(「문」) 같은 구절을 반복한다(「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이 리듬은 언어를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정황을 읽는 이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반복은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자주, 많이 진행된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허윤진 씨는 이러한 반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째서 이준규는 반복하고 변주하는가? 혹은, 어째서 동일성과 차이를 반복하는가? 반복의 문제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또 다른 이율배반과 맞물려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바 있는 사건, 과거에 있었던 상태를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재생(再生)하는 것이다. 기억을 통해 인간의 시간이 서사화될 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반복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준규는 자신이 ‘했던’ 것을 기억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반복의 구조에 편입된다. 동시에 그는 현대의 시인으로서 전통을 갱신하겠다는 의지 또한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문학사를 망각하고 자신의 시를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파탄날 수밖에 없는 계획이라 할지라도.─해설 「체스」(허윤진,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같은 책)
허윤진 씨의 이야기처럼 이준규의 시는 동일성과 차이, 즉 “반복의 문제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제에 닿아 있다. 재생은 반복이지만, 그것이 재구성이라는 점에 주목할 때 그것은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반복 혹은 한편 더듬거림 혹은 애씀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시적 구조에의 편입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어떤 단어에 문장에 정황에 매혹된 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한다. 이때 그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또 다른 장시(혹은 연작시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시의 일부를 나누어 발표했다)이자 표제작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은 그 이유를 분명히 드러낸다. 삶은 무수히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남다른 사건들은 매혹과 유혹 앞에 반복되고 무한하게 재생된다. 비록 그 간극 사이 어마어마한 시공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내가 너를 부정하는 계절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난바다의 오징어배가 돌아오는 계절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내가 너의 엉덩이 살을 엿보는 계절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청주를 마시고 울다가 체하는 계절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너를 잃는 계절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위의 책)
일견 몽환적이기까지 한 한 구절의 반복은 우리의 아득한 시공간을 단숨에 압축한다. 인류는 단 한 번도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을 건너 뛰어본 적이 없다. 혹시 잊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때 우리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은 그러므로 “너를 잃는 계절”이고, “청주를 마시고 울다 체하는 계절”이며 “내가 나를 부정”하는, 그런 계절이다. ‘이 결정적 언어(구절)’는 초월적이다. 압축적이고 함축적이다. 시에 실리고 무한하게 반복됨으로서 ‘우주적 언어’의 생명을 갖는다. 동시에 그것은 끝없는 재생이고, 차이이다. 이 구절은 (백일흔아홉 번이나) 무수히 같고 동시에 (백일흔아홉 번이나!) 끝없이 다르다.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이 구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하여, 허윤진 씨가 말하듯 반복되는(망각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이는 시간이 그러하듯, 정말 광활·아득하다. 또 이는 이준풱의 시의 농익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어떤 것이든 흡수하고 ‘시’로 바꿀 수 있는 시인이다.
서정(抒情)
한편 이준규는 이번 시집의 앞뒤에 자신의 서정을 맘껏 풀어놓기도 한다. 너와 나 그러니까 우리에 대한 슬픈 시선이 담긴 「그러나 너는 나비」 이준규가 저 모던한 시인 김춘수나 오규원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휘파람새」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서 죽었다”라는 슬픈 문장으로 끝나는 「검은머리방울새」 등 그가 이 시집에 다 실어내지 못한 그만의 슬픔의 정수들이 모여 있다. 특히 첫 시집에 포함되려 했다가 이번 시집의 말미를 장식하게 된 절창 「새앙각시」 그리고 결국 시집의 닫는 문이 된 시 「그는」은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여운을 우리에게 남긴다.
시인 이준규
시인 이준규는 술을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상상 그리고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망라한 농담을 즐기고, 친구들을 사랑한다. 첫 시집에 이어 새 시집에도 자신의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를 보낸다. 소설가 김태용, 한유주 등과 루 동인을 결성하고 끊임없는 모의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런 그는 문단 내에서도 ‘천상 시인’이라는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불린다. 그는 언어를 고민하고 허투루 쓰지 않는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시를 사랑하고 이 사랑에 대해 열정적이다.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은 그런 천상 시인 이준규의 두번째 시집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그런 그가 자신의 몸을 던져 쓴 역작임에 분명하다. 이 역작을 통해 그는 치열한 과정에 뒤따르는 모든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환원하고 있다. 이제, 다시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려는 시인 이준규. 그가 자신의 은밀한 아름다움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