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998년 『문학과사회』에 시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기성 시인의 신작 시집. 객관세계에 대한 풍경 묘사이든 개인적 서사가 개입된 주관적 진술이든 간에, 이기성 특유의 (반)풍경이 그 고유의 자리를 획득하는 순간은 적절한 원근법이 확보되는 순간이다. 이기성에게서 이 원근법은 늘 ‘잿빛’의 현실을 대면하는 불편한 열정에 의지하면서도, 그 현실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길을 ‘찾는’ 용기의 유일한 형식이었다.
이 ‘무모한’ 용기는 그러므로 거짓 희망에 자신을 걸지도 않지만, 예기치 않게 쏟아질 수도 있는,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말해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얼굴 없는 희망의 (불)가능성 역시 예단하지 않는 자의 것이다. 『타일의 모든 것』은 이 시인의 용기가 더 잔인한 시험대에 서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반풍경’의 시집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타일의 마을
개구리들
타일의 모든 것
비누
외투
청춘
회합
1호선
즐거운 세탁부
폭소
내부순환로
언더그라운드
스냅
실루엣
빈 페이지
자장가
나비
제2부
선물
줄넘기
언더그라운드
밤의 책
춤
말 없는 아이
트라이앵글
후일담
폭소
자장가
택시 드라이버
중앙공원
배관공
어느 날
초대
저녁의 식탁
제3부
밤의 피크닉
생일
솜사탕 얘기
질투
핑크
조용한 방
회색
오래된 소풍
독신자
고독
럭키의 시간
달
목이 긴 이야기
슬픔
혁명
해설/ 표면의 몰락, 반 풍경의 구상화, 함돈균
저자
이기성
출판사리뷰
부서지는 타일,
비로소 드러나는 세계의 이면
시인 이기성의 두번째 시집 『타일의 모든 것』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8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문단에 나온 이기성은 그 후 6년 만인 2004년에 첫 시집 『불쑥 내민 손』을 펴냈고, 그로부터 다시 6년 만인 2010년 세번째 시집을 내게 된 것이다.
규정될 수 없는 고통을 머금고 한없이 떠도는 여자의 풍경을 묘사했던 첫번째 시집은 “재래적인 서정시의 정서적 기율을 따라가지도 않고 현실을 재현하겠다는 관념도 비껴간다. 그 자리에서 시는 관념이 아니라, 균열의 감각을 체험하는 자리가 된다. 풍경의 구상성은 파괴되며, 서정적 원근법을 대체한 자리에는 어두운 신체가 분열된 배경과 뒤섞여 있다. 이를 통해 이미지의 분화와 공간의 분열이라는 미학적 사건이 벌어지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가 생성될 수 있다”(이광호)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타일의 모든 것』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우리가 ‘불쑥’ 마주했던 것은 안온한 도시적 일상이 자신의 내부에 숨기고 있던 ‘검은 이빨’이”며 “이 일상은 노동과 향유를 통해 단단하게 구성되고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듯하)지만, 시인의 시선은 일상의 이면에 도사린 폐허와 악몽을 포착함으로써 이 삶의 지속성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질문한다”고 전제하고, “인간과 자연의 일체화된 공감 속에서 서정의 우주, 다름 아닌 풍경의 아날로지가 완성된다고 할 때, 이기성의 풍경은 이 풍경의 프레임을 일그러뜨려 풍경에 내재한 ‘검은 이빨’과 녹슨 바닥을 드러내고, 그 공포와 폐허를 황량한 감각으로 환기한다는 점에서, 반풍경, 반서정, 반아날로지라는 ‘현대 시’의 본질에 전적으로 충실할 만하다”고 설파한다.
두번째 시집을 소개하는 데 앞서 이렇듯 첫 시집에 대한 언급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이번 시집이 첫 시집의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번 시집이 갖는 첫 시집과의 친연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만큼 차이점 역시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표면을 감싸는 깨끗하고 견고한 것들이 무너지고 쏟아지고 녹아 흘러내리고 거품을 드러내고 흩어지면서, 허약하고 낡고 메마르고 지저분하고 황량한 이면을 드러내는 이번 시집의 이미지들은 첫 시집과 이번 시집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세계관에 근거해 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반복되는 “타일”이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일상적 풍경의 안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라 할 수 있는 타일은 세계를 단단히 가리는 자기기만의 표면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일단 그 표면이 붕괴되고 세계의 오염된 육체가 바깥으로 드러나는 순간, 세계에 알리바이를 제공해왔던 그 모든 단단한 구성물들은 오히려 그 오염을 지금까지 생생히 목격해왔던 진실의 불가항력적인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 첫 시집과 달리 이번 시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시적 화자가 1인칭 주체가 된 것이다. 이 1인칭은 더 이상 풍경의 외부에서 그 풍경을 비평적으로 ‘왜곡’함으로써 풍경의 프레임을 일그러뜨려 풍경을 (반)풍경으로 구부리는 전지적 시선의 관장자가 아니다. 여전히 이 (반)풍경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으나, 이 (반)풍경의 온도는 이제 차갑지 않고 뜨겁다. 왜냐하면 이 (반)풍경이 비평하는 관찰자의 것이 아니라, 몸소 그것을 앓고 있는 1인칭 시적 주체의 정념을 표현하는 자기 실존적 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함돈균)
그것을 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고 타일이라고 부른다, 타일은 흰 접시를 두들기고
침을 흘리고 양탄자에 오줌을 싼다, 아파트에 들일 수 없는 더러운 짐승
타일은 쿵쿵 고요한 이웃을 깨우고, 발을 구르고 비상벨을 울리고
좁은 계단으로 도망친다, 우리는 모두 타일을 사랑해
그러나 지붕으로 달아난 타일은 커다랗게 부풀고
삑삑 사방에서 경적이 울고, 타일들이 모두 깨어나 노래를 부르는 밤
벌어진 입속에서 푸른 타일 쏟아지는 밤
검은 자루를 질질 끌고
한밤의 피크닉을 떠나는 가족들, 타일을 안고
돌아가는 창백한 독신자들
타일 속에 숨어 헐떡거리는 공원의 소년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화가 난 여자들
자, 타일을 마구 두드리는 밤이다
우르르우르르
뜨거운 침과 함께
푸르고 총총한 타일 조각들
머리 위로 쏟아진다
_「타일의 모든 것」 전문
“나”는 “사랑하고 타일이라 부”르는 그것을 “안다.” 그것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일상의 표면을 완성하는 오브제이지만 동시에 더럽고 황폐한 이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침을 흘리고 양탄자에 오줌을” 싸는 “아파트에 들일 수 없는 더러운 짐승”과 “헐떡거리는 공원의 소년들”이 그 타일의 뒤편에 숨어 있다. 시인은 어쩌면 타일을 깨고 부수어 그것을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타일을 마구 두드리는 밤”에 초대되었다. 그의 시에서 “우르르우르르/뜨거운 침과 함께/푸르고 총총한 타일 조각들/머리 위로 쏟아”지는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 아닌 부서진 타일 조각들에서 우리는 비로소 “타일의 모든 것” 즉 “세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