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권혁웅이 전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이후 3년 만에 펴낸 네 번째 시집. 표제인 「소문들」 연작을 비롯해서 「가정요리대백과」 「야생동물 보호구역」 「드라마」 「멜랑콜리아」 「기록 보관소」 등, 총 68편의 시가 4부에 나뉘어 실린 이 시집에서 적게는 두 편, 많게는 열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가 40여 편에 달한다.
기호 체계들의 삼투막, 거기서 모든 사태가 비롯된다. 생활 세계와 기호계 사이의 상호 침투, 비동기적 기호 체계들 간의 시적 동기화, 그리고 기호의 베일 사이로 배어나는 멜랑콜리 등이 모두, 막 착상된 의미를 수태한 시적 이미지의 자장 안에서 세계는 발생한다. 권혁웅이 보여주는 독특한 시도는 언어에 입체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소문들
군입
소문들 - 짐승
소문들 - 유파(流派)
소문들 - 권법(拳法)
소문들 - 진법(陣法)
소문들 - 전술(戰術)
소문들 - 성좌(星座)
언제 새어 나갔는지 혹은 새어 들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알 리도 없으니
소파의 기하학
심장은 통통배처럼
오늘의 운세 1
오늘의 운세 2
집으로 가는 길
사생활의 역사
네거리의 불가지론
가정요리대백과 - 숟가락
가정요리대백과 - 그릇
가정요리대백과 - 밥상
제2부. 야생동물 보호구역
적어도 한번은 우리가 만났다 - 야생동물 보호구역 1
첫사랑 - 야생동물 보호구역 2
노인들 - 야생동물 보호구역 3
입맞춤 - 야생동물 보호구역 4
질투 - 야생동물 보호구역 5
나무인간 1
나무인간 2
사춘기 - 야생동물 보호구역 6
마다가스카르가 떠다닌다
밀월(蜜月)
기다림 - 야생동물 보호구역 7
고백 - 야생동물 보호구역 8
버려짐 - 야생동물 보호구역 9
바이칼 - 야생동물 보호구역 10
외전 십이지(外傳 十二支)
제3부. 드라마
별사(別辭)
귓속의 알리바이
또 다른 고백
나는 전설이다 - 드라마 1
순수의 시대 - 드라마 2
개와 늑대의 시간 - 드라마 3
예고된 죽음의 기록 - 드라마 4
그의 심장은 목덜미 어디쯤에 있었다
강변 여인숙 1
강변 여인숙 2
에덴의 동쪽 - 드라마 5
분노의 포도 - 드라마 6
소호강호 - 드라마 7
슬픈 일
반죽 이야기
와중(渦中)
우로보로스를 생각함
숙맥(菽麥)
제4부. 불멸의 오랑우탄
허기
불멸의 오랑우탄
필멸의 고릴라
독순술 하는 밤
노모 1
노모 2
트렁크처럼 너는 혼자였다
흘수선(吃水線) 앞에서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멜랑콜리아 1
회전문에 두고 온 손가락 하나 - 멜랑콜리아 2
잎은 소수(素數)로도 돋는다 - 멜랑콜리아 3
물로 된 사람 - 멜랑콜리아 4, 고 박찬 시인께
환희라는 이름의 별자리
기록보관소 - A구역
기록보관소 - B구역
기록보관소 - C구역
기록보관소 - D구역
해설 : 생활 세계와 기호계의 시적 동기화 / 조강석
저자
권혁웅
출판사리뷰
기호와 의미의 울창한 숲에서의 숨은그림찾기
익숙한 어휘로 다가오는 낯선 ‘소문들’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권혁웅이 전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이후 3년 만에 펴낸 신작 시집. 사물의 안팎을 두루 살펴 미적으로 투시하고 조형했던 첫 시집, 소시민층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던 만화적 코드와 성인물 코드 등 7,80년대 문화적 코드를 통해 우리가 지나쳐온 시절의 아픔을 애잔하게 전달한 두번째 시집, 그리고 켄타우로스, 늑대인간, 유니콘, 강시 등 국적과 종을 구분할 수 없는 다양한 신화적 소재들로 연애시에 이야기와 상상력을 불어넣어 풍부하고 깊은 세계관을 보여준 세번째 시집까지, 매 시집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권혁웅이기에 독자들은 더욱 큰 기대와 궁금증으로 그의 네 번째 시집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익숙한 어휘 ‘낯설게 하기’
“소문(所聞)이란 숨기면서 풀이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숨은그림찾기 식의 글쓰기가 필요했다”라고 시인이 밝히고 있는바, 이번 시집에서 접하게 되는 “소문들”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익숙한 그림(기호) 속에 전혀 낯선 모습으로 숨어 있다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창피” “낭패” “질투” “시기” “외설” “청승” 등의 익숙한 단어들이 낯선 “짐승”이라거나, “삼성” “워커힐” “하얏트” “자금성” “대성” “롯데” “육사” “금성” 등의 특정 기업 혹은 집단을 지칭하는 명사가 “성좌”라는 식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한쪽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행태가 또 다른 한쪽에는 주로 한자의 독음을 통해 익숙한 어휘를 음차한 기표들이 자리”하는 이 「소문들」 연작이 단순한 말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어휘에 한자 독음을 붙여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수행함으로써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여러 행태들을 일종의 관습적 규약으로 받아들이는 행태에 대해 (독음 차원에서) 익숙하면서도 (한자의 의미와 시각적 효과 차원에서) 생경한 기호 체계를 적용해봄으로써 일종의 관습적 의사소통의 재의미화 작업을 꾀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특히 앞서 언급한 「소문들-성좌」의 양상은 “말놀이가 주는 재미 이외에도 기호의 지시 대상과 기의의 실정성 사이의 표리부동을 시의 전면에 노정함으로써 삶의 운행이 별자리의 진행처럼 자명하고 이치에 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기호들과 의미들의 울창한 숲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은 연작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표제인 「소문들」 연작을 비롯해서 「가정요리대백과」 「야생동물 보호구역」 「드라마」 「멜랑콜리아」 「기록 보관소」 등, 총 68편의 시가 4부에 나뉘어 실린 이 시집에서 적게는 두 편, 많게는 열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가 40여 편에 달한다. 이렇게 권혁웅이 이번 시집에서 여러 형태의 연작시를 선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조강석은 “시작(詩作)이 상식과 자명함의 베일이 덮어둔 토양 속으로 의미의 파종을 하는 행위라면 그렇게 탄생된 시편들은 기호와 의미의 나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시편들로 묶인 연작시들은 기호들의 숲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여러 형태의 연작시들은 바로 이 기호들과 의미들의 울창한 숲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가정요리대백과」는 실제 요리 과정과는 상관없는 ‘숟가락’ ‘그릇’ ‘밥상’을 부제로 하고 있는데, 불행한 가정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 그 도구들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모종삽이 되거나 영혼을 담을 수 없거나 엎어버려질 위기에 처하는 등 해체된 가정의 모습을 담고 있고, 「야생동물 보호구역」 연작에서는 ‘첫사랑’ ‘노인들’ ‘입맞춤’ 등의 어휘들이 ‘풍선개구리’ ‘바늘방석아귀’ ‘미라빌리스’ 등의 낯선 야생동물로 고유명사가 되며, 「드라마」 연작에서는 제목과 상반되는 내용을 통해 표리부동한 상황에서 생기는 의미의 낙차를 보여주는 식이다.
권혁웅이 보여주는 이러한 시도는 언어에 입체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자명한 기호들의 베일, 어쩌면 이 세계를 덮고 있는 베일을 벗기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소문들”은 그렇게 왔다가 간다.
이 “소문들”은 “악전고투, 악다구니, 악무한, 악바리 악돌이 악쓴다는 말”을 좋아하는 시인이 개똥밭인 이 세계를 “악머구리처럼” “즐겁게 구르”면서 들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문이란 것이 으레 그러하듯 한바탕 휩쓸고 나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에 대한 의심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각도의 시선만은 그 “소문들”에 귀를 기울인 자들에게 깊숙이 남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권혁웅이 전하는 “소문들”은 “없으면서 있고, 없지만 있고, 없어짐으로써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네번째 시집이 힘을 갖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