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계의 이면을 파고드는 치열한 삶의 물음,
입탈(入脫)의 경지에 이른 해방의 노래
종종 삶에 대한 물음이 찾아오곤 하지만, 삶을 살아갈수록 그 답은 더 멀어지곤 한다. 199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하고 첫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를 펴낸 지 꼬박 9년 만에 다시 묶어낸 김점용의 두번째 시집『메롱메롱 은주』는 자기 마음의 주인공, 주체적 자아를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삶의 방향성이 어디인가를 치열하게 묻고 있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삶의 실체,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과정 전체를 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시인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실패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새로운 세계로 다가가는 그만의 답을 찾아낸다. 김점용은 시의 언어를 통해 눈을 감고 귀로 여는 소리의 세상, 관음의 세계로의 전환을 꾀한다. 그러자 이제 세상이 그를 담는 대신 그가 세상을 담는 그릇이 된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빈 화분
배후
빈 화분
그릇
메롱메롱 은주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무엇을 훔쳤는지
간밤엔 모두들
어항에게 생긴 일
사고 다발 지역
우수리
섭동
뱀이 나오는 가게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어떤 자리
햇볕이 지나간 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그는 숨는다
제2부. 그 옷이 내게
부산 갈매기
그림자들의 야유회
비보호 좌회전
그 옷이 내게
그 옷이 내게 또
출렁거리는 와불
건너다니는 우물
타워팰리스의 공중 부양
자가 분석가
복개천
정신병원 지나며
개구리
허깨비들
새만금
눈을 감으면
관음증
아흔아홉 마리의 여우
어디쯤 가고 있느냐고
제3부. 여섯 개 안에 일곱 개
아버지, 죽은 아버지
너도바람꽃
나팔꽃
한 소년이 지나갔다
뒤뜰의 오후
사라지는 연분홍 가방을 톡톡
여섯 개 안에 일곱 개
모자를 찾으러 간 사람
도리사 법문
천축사
하루살이
어떤 데이지꽃
立脫
거대한 홑몸
생명이 밉다
제4부. 자동차가 지나간다
사잇길에선 언제나
통영 다찌집
자동차가 지나간다
감자꽃 피는 길
광어회를 기다리며
타워 크레인
먼 저 달
해설 : 눈을 감고 소리로 여는 관음의 세상 / 김동원
저자
김점용
출판사리뷰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삶의 이면에서 삶을 묻기
김점용의 두번째 시집 『메롱메롱 은주』가 출간되었다. 표층보다는 심층, 양지보다는 음지의 영역을 시적 언어로 번역해 보여주고자 하는 시인의 내적 지향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보는 오늘은 내 마음의 주인이 사라진 시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시대이고, 신(神)이 사라진 시대이다. 시인이 아무리 실체를 찾아가고자 해도 결국 마주치는 것은 “헛것”과 “허깨비들” “그림자들”뿐이며, 이 실패의 흔적들이 환각, 환청, 귀신 등의 환상적 이미지들에서 발견된다.
죽은 아버지를 꺼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어떤 중년 사내가 끼어들어 같이 찍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폼만 잡았다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부분
내 마음의 주인이 사라진 시대, 그러니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시대는, 곧 전체성의 윤리로서 신(神)이 사라진 시대이며, 법(아버지) 자체가 법을 어기며 향락을 즐기는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이다.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분명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사진관 주인인지 배다른 형인지 알 수 없는 중년 사내(「외설적 아버지의 시대」)도, 교차로 2층에 있다는 오토바이 가게(「비보호 좌회전」)도, 심지어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년 계산(「우수리」)도 명확하지 않다. 시인은 이 흐릿하고 불명확성으로 가득 찬 세계의 이면을 파고들며, 죽음과 그림자의 세계를 드러내고 끈질기게 죽은 "아버지"를 찾아다닌다.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그는 꿈쩍도 않고 대신 문둥이가 뭉개진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쉿거렸다
등을 보인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버지 친구일 터
상심하여 돌아서는데 그가 이번 판만 두고 보내마, 그랬다
덜컥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으니
문둥이가 사라진 입술로 뭐라고 뭐라고 웅얼거렸다
원문고개 호떡집 아줌마한테 물어봐라,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 집은 없어진 지 오래인데
―「검은 가지에 물방울 사라지면」 부분
그는 번번이 아버지를 찾는 데 실패한다. "힘이 장사인 아버지는 점점 더 젊어져서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고, 하릴없이 돌아온 그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옷을 입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실체를, 본질을,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생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시인이 연속된 좌절로 인해 느끼는 실망과 혼란의 흔적들이 그의 시들에 군데군데 번져 있다. 이 끝없는 실패는 왜 계속 되는 것일까. 시인은 그 왜를 물어간다.
그림자들의 야유회
인식의 왜곡으로 비대해진 허상의 세계
김점용은 그의 시 세계를 통해 섣불리 구조적인 비판이나, 혹은 개인에 대한 윤리론적 비난을 전언하지 않으면서도 그만의 시대관을 정립한다. 실상을 알아볼 수조차 없는 비극의 시대. 이는 사람들의 왜곡된 인식, 굴절된 시선의 문제다. 시인이 보는 이 세계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거대한 어항과 같았다.
투명한 어항은 무엇이든 다 지나간다
그 어떤 루머도 어항을 지나면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
사방이 캄캄하였다
대낮처럼 어둡고 명징하였다
―「어항에게 생긴 일」 부분
루머도 지나가고 나면 사실이 되는 왜곡과 은폐의 공간이 바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어항이다. 시인은 이 공간 자체를 폭로하려 하기보다는 이 안에 담긴 우리 자신들의 시선에 주목한다. 대낮에도 어둡고 명징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삶의 실재에 가 닿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래서 늘 헛것을 찾아 나서고 만나고 유희하는 일 자체가 김점용 시의 일부가 된다.
메롱메롱 은주
눈을 감고 다다른 소리의 세계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에 새겨진 글자 은주. 그 은주는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그 나무의 이름인지[隱柱], 혹은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隱舟] 모를 일이다. 인간 본연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자기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것을 시인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는 그에게, "숨은 주인[隱主]"이라는 의미로까지 변주 가능한 이 "은주"는 "메롱메롱 은주" 하고 놀리듯 그의 귓전에 들려온다. 주인을 잃고 떠돌기 때문에 "메롱메롱" 하고 들리는 것이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다"고 고백한다.
눈을 감으면
귀 하나가 한 없이 커져
어느 깊은 산속 떡갈나무 이파리
그 여린 숨소리를 듣네
―「눈을 감으면」 부분
김점용은 이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그만의 답을 찾아낸다. 그것은 격한 탈주나 방관, 외면이 아니다. 눈을 감고 소리로 세상을 여는 것이다. 그러자 헛것이 덮고 있던 값진 것들이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황홀한 나무들 사이에서 떠밀리는 금빛 나비 한 마리(「立脫」), 검은 보자기돃럼 둥글게 떠오른 산새 울음(「관음증」)과 같은 자연 그 자체다. 그의 고요한 입탈은, 시적 언어로 다시 구현된 소리의 세계를 세상에 쥐여주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