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섬세한 묘사와 감각적인 문체, 영상적인 표현력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안정된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온 작가 이신조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기억과 언어, 그리고 삶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보여주는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언어의 다름이 타자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기억으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는 사랑의 모습을 글쓰기를 통해 극복하는 모습을 그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최선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뿌리 찾기 과정을 그린 「베로니크의 이중생활」 등의 작품이 담겨져 있다.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와 진정한 소통에 대한 갈망을, 때로는 영화처럼 때로는 음악처럼 감각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는 여덟 편의 작품을 통해 더욱 깊고 섬세한 이신조의 감각적인 소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목차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
베로니크의 이중생활
흩어지는 아이들의 도시
엄마와 빅토리아
하우스메이트
클라라라라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앨리스, 이상한 섬에 가다
해설│마음의 구름다리 놓기 / 권오룡
작가의 말
저자
이신조
출판사리뷰
“모든 것을, 낱낱이, 생생히,
온전히 기억한다는 명백한 거짓말”
기억과 언어, 그리고 삶에 대한 섬세한 감각
섬세한 묘사와 감각적인 문체, 영상적인 표현력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안정된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온 작가 이신조가 세번째 소설집을 출간했다. 1998년 『현대문학』 신인공모에 단편 「오징어」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다음 해인 1999년 장편 『기대어 앉은 오후』로 제4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소외된 존재들 간의 소통 가능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신인다운 문제의식이 돋보였던 그 작품은 당시 심사위원들로부터 삶의 다의적 진실을 꿰뚫어보는 섬세한 감성, 연민과 관용, 정밀한 심리 묘사 등과 같은 여성적 미학으로 현대 사회에서 훼손된 영혼들 사이의 교신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90년대 여성주의 문학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지나치게 사적이고 독백적이며, 특히 소통 가능성에 관한 한 부정적인 기존의 여성소설들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의식을 높이 평가받았다.
등단 12년을 맞은 이신조는 지금까지 두 권의 장편소설과 두 권의 소설집을 펴내며, 이처럼 데뷔 초기에 보여주었던 그만의 강점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신조만의 소설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일구어가고 있는 것이다. 2005년 『새로운 천사』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번 소설집에서 더욱 깊고 섬세한 이신조만의 감각적인 소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신조의 소설들은 한 마리 고양이가 쓴 것이다. 콘크리트의 숲에서 살아가는, 이 작고 예민한 짐승은 부드러운 앞발 속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채 도시의 어딘가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상을 건설하고 소외를 지양하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믿는 소설. 그것은 분명 고양이의 것이다"라는 말로 그의 첫 소설집을 추천했다. 그리고 두번째 소설집의 해설을 쓴 시인 박상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판 위에 세밀한 판화를 그리듯 단어와 문장을 새겨나간다. 이 도시에는 비밀의 화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세계는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세계다. [……] 이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은 그녀의 소설 곳곳에서 아포리즘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피폐한 도시의 모습은 이신조의 작품의 주된 배경이었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 “부드러운 앞발 속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작고 예민한 짐승”의 시선으로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판 위에 세밀한 판화를 그리듯 단어와 문장을 새겨나”가는 작가 이신조. 이러한 연장선상에 씌어진 그의 세번째 소설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소설적 진화이다. “작품 활동의 초기에서부터 이신조의 글쓰기를 견인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말할 수 없는 자들에게 말할 수 있게 해주기, 말이 박탈된 존재들에게 말을 되돌려주기라는 것이”라고 지적한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권오룡은 “세계로부터의 소외, 인간으로부터의 격리, 이런 사태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신조가 파악하고 있는 것은 말, 즉 언어”라고 설파하고, “이러한 인식과 더불어 이신조의 시선의 지평은 개인의 존재에서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 전환되고 확대된다”고 역설한다. “이제 이신조는 절대적 타자로 삶의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개인에 대한 동정적 기록에서 벗어나 말을 공유하는, 혹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접(離接)의 양상에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럼 진화된 그녀의 이번 작품들은 어떤 모습일까?
사랑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층위로 서술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은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언어의 다름이 타자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기억으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는 사랑의 모습을 글쓰기를 통해 극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베로니크의 이중생활」은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인 최선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뿌리 찾기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베로니크, 혹은 최선경 이라는 언어적 명명법에 의해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에 대해 탐색한다.
이 소설집의 수록 작품 중에서 작가 이신조의 성숙성을 확연히 드러내 보여준다는 평을 받은 「흩어지는 아이들의 도시」는 16세 미혼모 미하를 주인공으로 하여 ‘출혈성 호흡기 면역 증후군’이라는 괴질로 인해 종말을 맞이한 도시에서 이 소녀가 세상의 어머니, 대지의 경작자로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섬세한 묘사를 통해 그려낸다.
서울 외곽의 한 작은 도시에 사는 중년 부인이 낯선 나라 남아공에서 온 흑인 가족을 만나 정을 키워나가는 내용의 「엄마와 빅토리아」는, 소통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이라는 의미 차원의 목적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기표들 사이의 구름다리라는 것을 소박한 이야기 안에 담고 있다.
「하우스메이트」는 제목 그대로 한집에 살게 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희수의 집으로 친구 동생의 친구인 상은이 세 들어 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은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어느 날 새벽, 공원에 놓인 벤치를 집으로 옮기자는 다소 황당한 희수의 제안으로 힘을 합해 벤치를 옮기는 과정에서 진정한 소통을 이루게 된다.
클라라 코헨이라는 한 영국 여가수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 「클라라라라라」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클라라와 살아서도 죽어서도 침묵을 강요당하는 ‘잉카 얼음 소녀’가 서로 맞닿아 지점을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하게 서술한다.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누이의 영혼이 유령이 되어, 3월의 셋째 주부터 다음 해 소한이 될 때까지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생을 찾는 이야기이다. 입양 후 파양되어 처음 함께 맡겨졌던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온 동생을 결국 찾게 되지만 한마디 말도 해줄 수 없고 쓰다듬어 줄 수도 없는 누이의 모습이, 담담한 문체 속에 먹먹하게 다가온다.
「앨리스, 이상한 섬에 가다」는 동화의 모티프를 사용하여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난 소설가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 속 화자는 어린 시절의 두 가지 기억으로 인해 글쓰기의 어려움을 겪는다. 거짓으로 지어낸 일기로 교내 일기왕이 되었던 것과 설암으로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공책에 써내려간 폭폭하다라는 말에서 받은 울림. 이것은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진실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작가 이신조의 자기 다짐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와 진정한 소통에 대한 갈망을, 때로는 영화처럼 때로는 음악처럼 감각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는 여덟 편의 작품은 작가 이신조의 더욱 깊고 넓어진 세계를 확인하게 해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