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새로운 언어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작가, 나탈리 사로트의 문제작!
『어린 시절』은 산문과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이한 형식 안에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수작이다. 작가의 첫 기억이 위치하는 5세 전후로부터 12세에 파리 페늘롱 고등학교 중등부에 입학하기까지의 시기를 70편의 길고 짧은 단편fragment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가족들과의 관계, 학교생활, 친구, 놀이 등 20세기 초 파리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다. 인간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을 새로운 언어형식으로 창조한 작품으로 독자를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이 작품은 상처를 주는 어머니의 말로부터,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기대로부터, 고통스러운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차츰 독립하여 서서히 자아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나’라고 지칭하는 1인칭 화자와 그의 분신(分身)이 대화를 하며 이끌어가는 독특한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다각적인 면모를 통해 기존의 문학들이 표현해왔던 순진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의 신화를 탈피하여 보다 진실되고 복합적인 얼굴 아래 풍부하게 나타나는 ‘어린 시절’을 마주할 수 있다.
목차
어린시절
옮긴이 해설· 말의 바깥에서 희미하게 박도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저자
나탈리 사로트
출판사리뷰
인간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을 좇아, 이제껏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작가, 나탈리 사로트의 문제작!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1900~1999)의 문학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 『어린 시절Enfance』이 대산세계문학총서 93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나탈리 사로트는 정통 서술방식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언어 영역을 구축한 점에서 누보로망 계열로 분류되면서도, 누보로망의 분류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고유의 자기 세계를 구축한 거장으로 손꼽힌다. 특히 이번에 소개되는 『어린 시절』은 산문과 소설과 자서전의 경계를 넘나드는 특이한 형식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대표작으로, 프랑스 중?고등학교 교과의 정식 커리큘럼에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2005년 프랑스 대학입학시험에도 출제되는 등 점점 더 가치를 인정받으며 연구되는 수작이다.
‘말의 바깥’에서 희미하게 박동하는 ‘그것’을 찾아
작가와 독자가 함께 움직이며 탄생시키는 문학
사로트에게 문학이란, “미지의 현실을 드러내고 존재하게 하려는 탐구”다. 사로트는 누구도 존재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인간 내면의 미세한 움직임,’ 이른바 그녀가 ‘트로피슴tropism(향성·굴성)’이라고 명명한 생물학적 반응을 좇아 그것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그녀의 이런 시도는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못했으나, 소설?희곡?평론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폭넓은 작품활동을 할수록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해갔고 이제는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서 진지하게 접근되고 있다.
이 작품 『어린 시절』은 1983년, ‘소설’ ‘희곡’ ‘산문’과 같은 장르 구분을 하지 않은 채 출간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5년 문고판이 나올 때, 앞표지에는 여섯 살 무렵의 작가 사진이, 뒤표지에는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만이 수록되었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노장 사로트가 여든을 넘긴 나이에 ‘어린 시절’이란 제목으로 자전적인 작품을 출간하니, 독자들은 때론 난해하고 수수께끼 같아 보이는 사로트의 문학 전반을 이해할 중요한 열쇠를 발견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소설이나 여타 희곡 장르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사로트는 자서전이라는 또 다른 장르를 공략하여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자서전을 창조해내 우리 앞에 선보였다.
『어린 시절』은 작가의 첫 기억이 위치하는 5세 전후로부터 12세에 파리 페늘롱 고등학교 중등부에 입학까지의 시기를 70편의 길고 짧은 단편fragment을 통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최대한 정확한 기억을 찾으면서도, 기억의 공백이 발견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결코 논리적 추론으로 메우려 하지 않는다. 단편들 사이의 여백, 두 배로 넓은 행간, 문장 혹은 단어들 사이의 말줄임표 등, 텍스트에는 많은 여백들이 있는데, 이는 고스란히 독자들이 울림을 받을 몫으로 남겨져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스스로를 ‘나’라고 지칭하는 1인칭 화자와 그의 분신(分身)이 대화를 하며 이끌어가는 독특한 서술형식을 들 수 있는데, 작품은, 분신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럼 너 정말 그걸 할 거니?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 말이야……” 분신은 작업의 성격을 ‘추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자서전 장르에 대한 거북함과 의혹을 제기한다. 화자는 이야기를 이끌고, 분신은 중간 중간 개입하여 ‘비평의식’을 자처하며, 이야기의 진실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전통적 자서전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로트의 어린 시절은 고정된 것이 아닌, 아직 가물거리며 말의 바깥에서 ‘희미하게 박동’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화자와 분신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현재의 탐색과 작품의 생성을 동시에 이뤄내는데,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획득되며 작가와 독자는 함께 ‘트로피슴’을 만들어나간다.
순진하고 행복하기만 한 ‘유년 신화’의 베일을 벗어던지고
다각적인 얼굴 아래 드러나는 ‘어린 시절’을 목도하다
『어린 시절』에는 가족들과의 관계, 학교생활, 친구, 놀이 등 20세기 초 파리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화자가 회상하는 추억 가운데에는 행복한 추억도 있지만 아프고 쓰린 추억이 더 많다. 이혼한 가정의 외동딸인 나타샤는 어머니의 집과 아버지의 집을 오가며 생활하는데, 한편에 자상한 아버지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너무나 자주 부재하며 같이 있을 때마다 생각과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에 대해 아이가 느끼는 매혹, 그리고 애착과 섭섭함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 그리고 그것이 아이의 마음속에 남기는 미묘한 움직임이 작품의 중요 축을 이룬다.
작가는 『어린 시절』을 통해 “신성모독의 느낌을 동반하는 고통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그리고자 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 ‘신성모독의 느낌’은 바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봇대를 만지면 죽는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고 전봇대에 손을 대면서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라든가, “수프만큼 묽게” 되기 전에는 음식물을 삼킬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을 지키는 장면 또한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신성한 금기의 위반에의 유혹을 나타낸다. 그녀에게 ‘어린 시절’은 상처를 주는 어머니의 말로부터,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기대로부터, 고통스러운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차츰 독립하여 서서히 자아를 찾아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이러한 작품의 다각적인 면모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문학들이 표현해왔던 순진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의 신화를 탈피하여 보다 진실되고 복합적인 얼굴 아래 풍부하게 나타나는 ‘어린 시절’을 목도한다. ‘어린 시절’은 여전히 문학의 영원한 테마이자 영감의 원천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것은 보다 깊고 예리하며 솔직한 시선을 통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다 풍부한 얼굴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여 이 책은, ‘문학’이라 부르는 본연에 이르는 길목으로, 우리의 깊은 내면을 이끌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