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생을 지탱하고 변화시키며 소멸의 시간을 살아내는 ‘흙의 존재론’
1988년 등단한 이래, 삶과 죽음, 실존에 대한 집요하고도 진실한 탐문과 성찰을 이어온 시인 조은의 신작 시집. 직전 시집 『따뜻한 흙』을 펴낸 지 꼬박 7년 만에 묶어 낸 『생의 빛살』에서, 풍경 너머, 장면 너머에 뿌리 내리고 있는 생의 근원적인 시간성을 응시하는 관찰자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고, 개체의 아픔과 세계의 아픔을 통감각적으로 묶는 환상적인 언어 조탁은 더욱 섬세해졌으며, 그리하여 흙의 속성을 통해 생의 ‘사건성’을 구체화하고 자기 존재 안에 깃들인 ‘암흑’과 대면하는 “무섭고도 고요한 시적 순간”을 포착해내는 시적 미학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생의 빛살』에서 시인이 ‘내 몱이 아닌 흙’에 대해 말했을 때, 그것은 생의 시간에 대해 자신이 소유권을 가질 수 없음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다. 그 자각은 ‘흙’으로 표상되는 존재의 근원적인 변이의 차원, 생을 지탱하면서 생을 변화시키고 소멸을 받아들이는 사건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렇게 시인이 대면하는 시적 순간은 죽음의 예감과 삶의 간절한 의지가 서로에게 등을 맞댄 아이러니의 시간이며, 동시에 일인칭의 자기 응시가 마침내 도달한 깊고 정직한 공간이다. 절제된 서정이 취할 수 있는 깊고 차가운 전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모순 1
방 안의 거미줄
흙의 고독
뇌 속이 기왓골처럼 밟힌다
모순 2
안개의 날들
모순 3
독서대
마른 흙은 떨어지고
언젠가도 여기서
향기를 얻는 법
생의 빛살
기억의 심층
어느 한때
한번도 그처럼
가을 은행나무 밑을
경직
위험한 날
제2부
지붕 위에는 흙
깨끗하고 우아하게
등 뒤
꽃 피는 법
고양이
한마디
야윈 길
밤마다
아퀴
연주가 끝난 아코디언처럼
골목길
아침 골목 1
아침 골목 2
날마다 해가 뜬다
벽 너머
제3부
흙의 절망
일찍 피는 꽃들
해바라기
터널 같은 그림자를
소용돌이
남의 삶을 꺾으려면
그 꽃들
밤새 무슨 일이
꽃이 지는 길
물방울들
새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어떻게 알았을까
눈, 눈빛
음지에서
결혼 축하
아픈 날
언젠가는
꽃과 꽃 사이
근황
제4부
멀리서 오는 편지
우산 속 남녀
재탕되는 시간들
머무는 심경(心境)
바늘만 한 틈으로
동질(同質)
허공이 풍요롭다
그의 별
덩굴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한 분류법
불쑥 들어간 세계
먹물을 마신다
분화구
촉수
한 무덤 앞에서
해설 내 몫이 아닌 생, 혹은 흙의 존재론_이광호
저자
조은
출판사리뷰
‘삶의 집요한 의지와 행복한 소멸의 공존,
그 아름답고도 뼈아픈 생의 아이러니’
일인칭의 자기 응시가 도달해보인 더없이 깊고 정직한 공간
1988년 등단한 이래, 삶과 죽음, 실존에 대한 집요하고도 진실한 탐문과 성찰을 이어온 시인 조은이 신작 시집 『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2010)을 펴냈다. 이번 시집은 연약하고 상처 입은 것들에 대한 연민, 피치 못할 삶의 그늘과 결핍을 끌어안으며 절망과 고통에서 길어낸 생의 의지와 특유의 ‘흙의 존재론’을 담았던 직전 시집 『따뜻한 흙』(2003)을 펴낸 지 꼬박 7년 만에 묶어 내는 시인의 네번째 시집이다. 시집 『생의 빛살』에서 풍경 너머, 장면 너머에 뿌리 내리고 있는 생의 근원적인 시간성을 응시하는 관찰자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고, 개체의 아픔과 세계의 아픔을 통감각적으로 묶는 환상적인 언어 조탁은 더욱 섬세해졌으며, 그리하여 흙의 속성을 통해 생의 ‘사건성’을 구체화하고 자기 존재 안에 깃들인 ‘암흑’과 대면하는 “무섭고도 고요한 시적 순간”을 포착해내는 시적 미학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생을 지탱하고 변화시키며 소멸의 시간을 살아내는 ‘흙의 존재론’
시집 『생의 빛살』에서 독자가 가장 빈번하게 접하는 단어가 바로 ‘흙’이다. 삶과 죽음의 은밀한 길항에 긴장하면서 시인 조은이 오래전부터 탐문의 대상으로 삼아온 형태이자 물질(대상)이다. 이번 시집의 서시 「모순 1」에서 이미 “내 몫이 아닌 흙이여”라는 의미심장한 감탄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 흙은 이어지는 시들에서 “뜨겁던 피가 삭은 것”이기도 하고, “담즙의 세월도 삭이지 못한 모래”이기도 하면서 “몇 번의 부식 과정을/온몸으로 견뎌냈던 정신은/문득 내 것이 아닌 듯하다”(「마른 흙은 떨어지고」)라는 화자의 내적 변화를 낳는 동시에 “나의 내면이 식어”가는 계기를 추동한다(이광호). 또한 “흉하게 드러난 집들의 늑골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흙은 “집의 완고함”(「지붕 위에는 흙」)이 풀리는 사건을 이끌면서 우리를 둘러싼 제법 그럴싸한 외부의 견고함을 비웃고, 그 “외형적인 질서의 심층에 도사린 것”에 대한 의문과 함께 존재의 다른 차원을 그려보게 만든다. 때로 이 흙은 인간의 얼굴과 기억을 대신하며 “일인칭의 심층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시간의 존재”(이광호)를 발견하게도 한다: “젖은 흙더미 같은 몸을 지탱한 남편의/ 손톱 밑에는 검은 흙이 끼어 있다/거친 손의 주름살을 메우고/손톱의 하얀 반달을 덮고/두 눈에 질척하게 매달려 있는 흙/그의 체온에 익었을 흙은/강인해 보인다”(「흙의 고독」); “나뭇가지와 정면으로 서자/내 몸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흙의 미립자가 느껴진다”(「야윈 길」); “사람들의 발길에 씨앗이 뭉개져도/흙으로 완성될 잎들은 화사하다”(「가을 은행나무 밑을」); “죽음만이 늙은 여자의 단호한 표정을/흙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한번도 그처럼」). 이러한 자각은 필경 시인의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을 다음의 시에서 병 든 노모의 모습에 투영되며 그 절정을 이룬다. 비에 젖어 물렁했던 흙이 그늘 없는 폭염 속에 메말라가듯, 아직은 삶을 움켜쥔 자의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고 뻣뻣해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심정은 그저 통절하고 또 참담하다.
어머니는 바다를 보고 앉아 꼼짝도 않는다
깊게 주름진 몸이
연주가 끝난 아코디언처럼
모래톱에 얹혀 있다
[......]
어머니의 몸속으로 자식들은
두 손을 들이밀며
평생을 아우성쳤다
부드러운 흙 속에 들어 있다가
치명적인 흠집을 내고 마는 모래들
상처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들
핏줄에 엉겨붙는 모래들......
말라가는 흙의 뒷모습에
모두 목이 멘다
-「연주가 끝난 아코디언처럼」 부분
의식과 감각의 심층에 대한 치열한 응시의 기록
철학자나 성직자의 관찰과 성찰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지독한 응시는 시인의 몫이자 특권이며 벅찬 업이기도 하다. “생래적으로 아픈 것들에 연민과 연대”를 갖고 있는 듯한(고종석) 조은은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가령, “슬픔을 견디는 미소” “빛이 예감되는 어둠” “행동을 늦추는 생각들”(「한 분류법」)에 기대어 손가락 마디마디 새겨진 지문을 더듬듯 생의 ‘갈래’를 더듬는다. 그의 시선은 “봄꽃들 탈골한 길”(「모순 1)과 ‘재개발을 앞둔 텅 빈 골목’(「골목길」)을 쫓고, ‘깊은 밤 지붕 위 고통에 끌려 다니는 몸’(「뇌 속이 기왓골처럼 밟힌다」)과 ‘허공의 거미줄에 걸린 섬뜩한 내 눈’(「방 안의 거미줄」)을 거쳐 “거울 속/나를 보는 눈빛”(「기억의 심층」)에 다다른다. “나는 저 눈과 마주친 적이 없는데/저 눈도 나도/서로를 기억”하는 기억의 심층을 헤집는 시인의 눈은 비로소 “내가 내 안에 갇혔음을 일깨”우는 뼈욾픈 자기 응시나 다름없다. 동시에 “‘내’가 다른 존재를 대면하여 ‘나’의 외부와 만나는 계기,” 다시 말해 허물고 싶었던 “속박 이후의 생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또한 죽음의 예감과 삶의 간절한 의지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시간이야말로 ‘의식과 감각의 심층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응시가 낳은 시적 순간’(이광호)이라 불러 마땅하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생의 빛살」 부분
일상에서 맞닥뜨린 응시의 충격, 그 신선하고도 씁쓸한 순간,
삶과 소멸의 공존, 일상적 감각의 충돌로 빚은 뼈아픈 생의 아이러니
조은의 시에서 “무디어진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는/저것이 죽음이라니/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그림자를 접었다 폈다 몸부림치는/저것이 삶이라니/삶을 바라는 간절한 순간이/저렇게 돌이킬 수 없을 때”(「뇌 속이 기왓골처럼 밟힌다」) 오는가라는 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뼈아픈 자각은 “내 암흑이 고작 이거냐며 으름장을 놓거나 울음 속까지 뿌리를 뻗어오는 절망의 덜미를 잡고 패대기”(「한 무덤 앞에서」) 치지 못한 데 대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때로는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깨닫는 순간”(「언젠가는」)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예감이 자기 생의 외부에 대한 치열한 ‘시적’ 시선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한길에양말을벗어놓았다
발의형체가그대로남아있다
만져보면체온도남아아있겠다
그는어떤세계로간걸까
햇볕이기름처럼머리에쏟아진다
바람속엔뜨어군멍울이있다
그를찾는내몸은불붙은화약처럼쉭쉭댄다
숨이찬나는목단추를풀며
신발이라도벗어양말곁에놓아보고싶다
그는내가바라보는곳으로사라져갔다
양말의방향이그것을말해준다
그는차분했다
양말의형체가그것을말해준다
그는뒤에남긴세계에예의를표했다
얌전히놓인양말이말해준다
걸음을멈추고한쪽양말을벗기까지
벗은발로중심을잡고
다른쪽발의양말을벗기까지몇미터거리에
뒤도돌아보지않았을
사라진삶의암시가있다
―「불쑥 들어간 세계」 전문
그 치열함이 자기 연민과 자기도취가 아닌 철저한 자기 응시로 향하고 있기에 조은의 시는 절제된 서정이 취할 수 있는 깊고 차가운 전율을 다음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을 맡은 이광호는 이 시를 가리켜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드럽고 고요한 이미지를 담은 시”라고 평했다.
어린 새 한 마리 둥지에서 떨어졌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떻게 알았을까
삶을 박차는 쾌감
숲은 칙칙한 그림자를 포개고 있다
그림자가 짙은 곳에는
밝디밝은 꽃들
꽃 위에서 끝나는
보풀 같은 길들
어린 새는 부리를 내려 쉼표를 찍는다
보드라운 새의 깃털이
마냥 행복한 눈꺼풀처럼
떨다 멈춘다
- 「어떻게 알았을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