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환희처럼 슬픔처럼’ 다시 찾아온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
11년의 침묵을 깬 신작 시집
황지우,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김승희 등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온 최승자. 90년대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녀가 등단한 지 꼬박 서른 해를 맞게 된 2010년, 지난 11년간 쓰고 일부는 발표했던 총 70편의 시를 묶은 여섯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으로 돌아왔다.
길고 질긴 희망과 깊고 넓은 절망을 독하게 품었던 ‘우리들의 시인’의 새로운 귀환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번 시집에서 최승자는, 시간이라는 과거의 예속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그의 시는 문명과 시간, 역사와 제도가 부여한 질서 너머로 부상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와 황홀한 미지의 세계로 활짝 열린 초시간적, 우주적 사유로 넘실댄다.
『쓸쓸해서 머니먼』은 우리 곁을 떠나 있는 11년의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을 비운 채로 역사의 물리적 시간과 궤를 달리하는 또 다른 상징적, 초현실적, 초자연적 세계에 눈뜸과 동시에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탐문해가는 오랜 사유의 궤적이다. 처절한 고통의 끝에서 정작 그 고통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혹은 끝 모를 절망의 늪에서 그 절망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는 것처럼, 시인은 잿빛으로 삭아가는 텅 빈 시간의 하늘 아래 마침내 자신의 삶과 시가 깃들 새로운 거처를 발견한 듯 보인다.
목차
시인의 말
쓸쓸해서 머나먼
보따리 장수의 달
하얀 낮달
하루 종일 매달리다
먼 방 빈 방
세월의 학교에서
새들은 모두가
사람들은 잠든 적도 없이
구름 한 점 쓰다 가겠습니다
하늘 3 한 잔
시간이 사각사각
..(중략)..
흐린 날
또다시 병실
담배 한 대의 길이의 시간 속을
참 우습다
바가지 이야기
해설 한 세월이 있었다_ 박혜경
저자
최승자
출판사리뷰
‘환희처럼 슬픔처럼’ 다시 찾아온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
―11년의 침묵을 깬 최승자 신작 시집
저 격동의 80년대를 청춘의 이름으로 관통해온 이들에게 시인 최승자는 하나의 뜨거운 상징이자 처절한 분노였고 치명적인 중독이었다. 사물과 삶, 시대와 사건을 몸의 언어로 치환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최승자의 거침없는 의식의 뿌리는 자기 부정과 자기혐오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자멸과 자폭으로 치닿는 최승자의 자기 모멸적 시언어는 오염된 세계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적의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의 몸이 그 한 이유였고 한편에는 70년대의 유신정권과 80년대의 군부 독재가 명확한 현실로 자리하고 있었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 최승자는 시대가 부숴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캐묻기 위해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고, 뛰고, 날고, 깨부수고, 울부짖고, 비명을 내지르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절망적으로 호소한다. 이어지는 시집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내 무덤, 푸르고』(1993)를 거치면서, 시간의 냉혹함 앞에서 당면한 세계에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부정으로 응수했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번뜩이는 시 속에서 최승자의 화자들은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자기 방기와 자기 파괴의 경계를 서성였다. 그러나 “이 극도의 의기소침은 최승자 특유의 지적이고 활달한 언어의 부력에 들려 시집 전체를 착잡한 생기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종석).
이른바 황지우,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김승희 등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온 최승자의 시는 이전의 시에 대한 그리고 당대 사회에 대한 ‘전복’ 그 자체랄 수밖에 없었다. 기존 여성시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강렬한 개성, 고정된 이미지의 틀을 뛰어넘는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언어 구사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의 세계를 향해 내뱉는 저주와 치욕, 자기 부정, 자기 모멸감으로 가득 찬 위악의 몸부림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한동안 시인 최승자를 볼 수 없게 된다. 정확하게 말해 최승자가 시와 멀어진다.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에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최승자는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어떤 아침에는」, 『기억의 집』) 그만 길을 잃고 기나긴 잠의 나락으로 침잠해간다. 1999년에 시 40편을 엮은 『연인들』을 발표하며 “아주 긴 긴 시간 체험, 먼 공간 체험, 깊은 의식의 체험”을 통해 지독하리만치 ‘죽음’에 붙들려 왔던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긴 여행의 끝의 한 출발점”에 서 있다는 자신의 안부를 전해왔던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시인은 다시 시간과 공간, 의식의 체험 속으로 떠나는 더 멀고 먼 여행길에 오른다. “한 여자가 제 삶의/가로수 길을 다 걸어가/소실점 바깥으로”(「둥그런 거미줄」, 『연인들』) 사라지듯 그렇게 최승자는 우리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2010년, 등단한 지 꼬박 서른 해를 맞게 된 최승자가 지난 11년간 쓰고 일부는 발표했던 총 70편의 시를 묶은 여섯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길고 질긴 희망과 깊고 넓은 절망을 독하게 품었던 ‘우리들의 시인’의 새로운 귀환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번 시집에서 최승자는, 시간이라는 과거의 예속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문명과 시간, 역사와 제도가 부여한 질서 너머로 부상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와 황홀한 미지의 세계로 활짝 열린 초시간적, 우주적 사유로 넘실대고 있다.
평론가 박혜경의 지적처럼, 처절한 고통의 끝에서 정작 그 고통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혹은 끝 모를 절망의 늪에서 그 절망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는 것처럼, 시인은 잿빛으로 삭아가는 텅 빈 시간의 하늘 아래 마침내 자신의 삶과 시가 깃들 새로운 거처를 발견한 듯 보인다.
“오랫동안 아팠다 이제 비로소 깨어나는 기분이다”
―존재의 본질을 캐묻는 상징체계를 통해 거듭나는 의식의 확장, 언어의 현현
『쓸쓸해서 머나먼』(2010)은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 있는 11년의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을 비운 채로 역사의 물리적 시간과 궤를 달리하는 또 다른 상징적, 초현실적, 초자연적 세계에 눈뜸과 동시에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탐문해가는 오랜 사유의 궤적이다.
전작 『연인들』(1999)의 후기에서 밝혀놓았듯 최승자는, 90년대에 들어와 분열된 자의식과 극심한 자기 폐쇄적 고통으로 지쳐가던 중 여러 가지 동궼양의 상징체계를 발견하며 다른 모색의 길에 이른다. 끈질긴 ?음의 고통에서 “끝 모를 고요와 가벼움을 원하는/어떤 것이 내 안에 있다/한없이 가라앉았다/부풀어오르고,// [……] 이름할 수 없이 환한 덩어리,/ 몸속의 몸, 빛의 몸”(「연인들 3」, 『연인들』)을 희구했던 최승자에게 이른바 무의식, 형이상학, 초자연, 초현실 등 비감각적인 영역을 다루며 세계의 비의에 가치를 부여하는 신비로운 상징체계는 지난한 과거의 동굴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열린, 존재의 본질을 여는 새로운 빛의 열쇠로 다가왔을 것이다. 음양오행론, 서양의 점성학,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타로 카드 등에 몰입하면서 비록 시인의 몸은 요양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지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선만은 더없이 맑고 간명하고 평화롭게 안정되어 갔다.
11년 만에 내놓는 이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은 『연인들』에서 시작된 신비주의와 상징체계에 대한 심취가 시인의 몸과 언어로 육화되어 최승자 시의 또 한 세기를 열어 보이고 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융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문학, 심리학, 인류학 등에 두루 걸친 도저한 사유와 절제된 언어, 세계의 여러 겹을 통찰하는 깊고 고요한 시선은 얼핏 한 세계 너머의 우주적 사고에 닿았다가 다시금 맑고 간명하게 정화되고 치유된 시인 자신의 내면을 향한다. 절망과 죽음의 심연만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시인의 시선이 비로소 바깥과 미래를 향해 열리는 국면, 그 감각적 총체의 순간이 이번 시집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지극한 고통의 심연 속에서 접어든 깊고 긴 시간의 잠은 어쩌면 상처와 파괴로 점철된 역사의 시간을 잠재우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과거라는 시간의 감옥과 죽음과 그것들에 붙들려 있던 자기 자신마저 죽이고 “인류를 초월해 있는/영원성으로서의 시간”(「그런데 여기는」) 속에 새롭게 태어난 최승자의 시언어는 이렇게 적막하고도 처연한 슬픔을 내재한 채로 다시 우리에게 왔다.
신비주의적 시간 바다 위의 풍경. 무한 잿빛으로 발하는 한 세월이 있었다
―생에의 욕망, 불가능을 향한 꿈
이번 시집 전편에 걸쳐 쉼 없이 등장하는 ‘시간’과 ‘무한 잿빛’의 개념은 그간 “점점 어두워지는 세계/그 안으로 급하게” 빨려들어가 “그간의 나와/저간의 나와/혹은 저 너머의 나”(「문이 닫혔었다」)에 대해 숙고해온 시인의 절대 명제로 자리매김해 있다(“시간은 국가들이었고/제도들이었고 도덕들이었고/한마디로 가치관들이었는데,/가치관들이 세계라는 이 세상에 범람했었는데/시간은 武力일까 理性일까”). 시집 여기저기에 영원과 찰나가 겹치는 아득한 시간의 소실점, ‘인류를 초월해 있는/영원성으로서의 시간’의 잿빛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멀고 먼 잿빛의 시간, 시인은 자신이 살아낸 그 ‘시간의 잿빛 그림자’ 속에서 잿빛으로 삭아간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흔들리고 흔들리는/이 세계 속에서 왜 시간은/늘 괴어 있는 것일까?//영원으로서 흔들리는 이 세계 안에서//흔적도 없이 괴어 있는/시간의 잿빛 그림자”). 시간 속을 아득히 달려 세상과 세월의 잠 속에서 오래도록 꿈을 꾸었다는 시인의 이야기는 어쩌면 “아무도 모르리라./그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아무도 말하지 않으리라./그 세월의 내막을”(「未忘 혹은 備忘 1」 부분, 『내 무덤, 푸르고』). 여기에 잠시, “詩도 담배도 맛이 없다/세월이 하 짧아/詩 한 편, 담배 한 대에/한 인생이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잠시 빛났던」). 때로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흐린 날」). 그러고 나서 시인은 깨어나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중요한 것은」)라고 고백한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시인은 고요가 피어오르는 詩의 행간들 속에 담겨 있는 시간의 무상함을 읽어내고 다시 쓰려 한다. 어쩌면 시인이 꿈꾸는 머나먼 시간의 길, 시간의 모든 흔적을 비워낸 ‘아무 일도 없이 하염없는’ 삶이란 실현 불가능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평론가 박혜경은 해설에서 시인이 “영원히 운동 중인 정지”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운동 중인 부재”로서의 삶을, 또한 부재의 힘으로 영원히 운동 중인 욕망을 얘기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어 “불가능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위에서 간절한 외침으로 끌어안으려는 그 생생한 ‘지금’의 순간이야말로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너무나 충만한 생의 순간들”이라고 덧붙인다.
“천만억 년”을 졸고 하품하며,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온 시인은 이제 “了긋이 웃고 있는 나무 한 그루, 그 위에서/이 의식에서 ? 의식으로/깡총거리며 놀고 있는”(「새 한 마리가」) 한 마리 새로 가벼워지려 한다. 아침마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문 채로 머리 위 회색 하늘을 공책 삼아 쓰고, 그 텅 빈 하늘 한 잔을 커피 삼아 마셔온 시인은 몹시 담담하고 또 쓸쓸하게 말한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전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 『이 時代의 사랑』, 1981)고 순식간에 우리들의 서른을 잠식했던 한 시인이 있었다. 또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마흔」, 『내 무덤 푸르고』, 1993)으로 나이 사십을 뚫어져라 응시했던 한 시인이 있었다. 그가 이제 또 한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서 있다. 오래전,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워드 프로세서」, 『내 무덤 푸르고』)고 털어놓았던 그는 이번 시집의 말미에 또 이렇게 고백하며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의 눈물겨운 귀환을 실감케 한다. “황홀합니다/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참 우습다」(『쓸쓸해서 머나먼』,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