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5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펴내며 2000년대 한국 시단에 반가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던져주었던 시인 김민정이 4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여기저기 날아든 담뱃불로 지져진” 채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쏘여”져, 저 끔찍한 악몽을 지나 도착한 여기는, 한 여자가 발목과 발목 사이에 팬티를 걸치고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서 우뚝 서 있는 곳이다. 삐죽삐죽한 가시는 불이 붙어 악몽 속 주인공들에게 발사되었고, 가시에 감춰졌던 그녀의 여린 속살이 드러났다. 이제, 민감한 그 속살의 감각들이 시가 되어 찾아온다.
김민정의 시는 선과 악, 진리와 허위의 구분을 초월하여 조각난 이미지들의 자기운동을 보여준다. 이미지들은 강렬한 공격력을 통해서 비루하나 어딘가 유쾌한 면이 없지 않은 이 시대의 풍경을 포착하고 있다. 우리는 시에 부재하는 것들을 찾아서 폭력이 없는 교실, 변비가 없는 몸에 대한 그녀의 희망을 읽어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시에서 종결될 수 없는 개방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작은 사건들
김정미도 아닌데 시방 이건 너무하잖아요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미혼과 마흔
소녀닷컴
민정엄마 학이엄마
참견쟁이 명수들
별의별
화두냐 화투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비라는 이름의 고비
철두철미한 질문
쪽파
음모라는 이름의 음모
결국, 에는 애
아내라는 이름의 아, 네
제 이름은 야한입니다
제2부 우물우물
마치......처럼
오빠라는 이름의 오바
빨강에 고하다
솔직해집시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삼차원의 커플 女
삼차원의 커플 男
페니스라는 이름의 페이스
나비중독자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의 편
뜻하는 돌
벙어리......장갑
피날레
숲에서 일어난 일
카드 쓸 때는 방해하지 마세요
제3부 신은 각주에
늘 그런 공식
복수라는 이름의 악수
그림과 그림자
강박은 광박처럼,
그녀의 동물은 질겨
나미가 나비를 부를 때
할머니, 사내들,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딸
똥꼬 베이비
언니라는 이름의 언짢음
선우일란, 빵의 비밀
일요일은 참으세요
흔해빠진 레퍼토리
왕십리, 그 밤
끝이라는 이름의 끗
제4부 뛰는 여자 위에 나는 시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어느 날 가리노래방을 지날 때
정현종탁구교실
뛰는 여자 위에 나는 시
예상 밖의 효과
한밤의 숨바꼭질
콜!
시라는 이름의 시답지 않음
시는 그래, 그렇게나 기똥찬 것
시, 시, 비, 비
시가 밥 먹여주다
어떤 절망
이상은 김유정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해설 / 공백의 안무-김인환
저자
김민정 저자(글)
출판사리뷰
언어유희로 빚어낸 감각의 깊이,
그 속에서 흐르는 그녀의 위풍당당 행진곡
악몽 속을 날아온 고슴도치 아가씨
예컨대 그녀는 “미친년 널 뛰듯이”라는 말로 표현된 시인이다. 그녀의 첫 시집을 “상처를 무대에 올려 집요하게 반추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독하게 극복한다”라고 평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그녀가 한국 여성시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선배들이 간혹 매달렸던 원한과 신파가 없는, 힘이 센 변종이라고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2005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펴내며 2000년대 한국 시단에 반가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던져주었던 김민정.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많은 기대와 궁금증 속에, 두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여기저기 날아든 담뱃불로 지져진” 채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쏘여”져, 저 끔찍한 악몽을 지나 도착한 여기는, 한 여자가 발목과 발목 사이에 팬티를 걸치고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서 우뚝 서 있는 곳이다. 삐죽삐죽한 가시는 불이 붙어 악몽 속 주인공들에게 발사되었고, 가시에 감춰졌던 그녀의 여린 속살이 드러났다. 이제, 민감한 그 속살의 감각들이 시가 되어 찾아온다.
원한과 신파도 끼어들 틈이 없는 김민정 시인의 힘은, 누군가에게는 거북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짜릿하고 통쾌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솔직한 언어에서 나오는 듯하다. “많은 경우 구어체를 이루고 있으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비어와 속어와 육두문자를 제 것으로 감싸 안는”(이장욱) 그녀의 언어는 이번 시집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또한 “기표와 기의의 간극을 최대한 확장해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표 놀이와 “흡사 아이의 그것처럼, 지독하리만치 철저하게 유희를 수행”(강계숙)하는 언어도 이번 시집에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런데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고.
가벼움과 천진함에 담긴 감각적 깊이
전작에 수록된 작품들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악몽 자체를 현현하는 문장들”(이장욱)로 “희극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유희가 아니라 그러한 웃음을 거세하고 차단하는 ‘검은 유희’”(강계숙)를 담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꿈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김인환)을 농담과 익살을 더해 펼쳐놓는다.
이번 시집에 수록되기도 한 2007년 제8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어느 날 가리 노래방을 지날 때」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농담”이라고, “장난도 인생”이라고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상의 심사를 맡은 최승호 시인은 “희망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는 농담, 넉살, 패러디, 난센스, 해학, 언어의 유희, 동화적인 환상 같은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끌어다가 시 속에 집어넣으면서 비빔밥처럼 맛깔스러운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는 평으로 그녀의 변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그는 “입심이 좋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제멋대로인 시인이다. 그만큼 자유롭고 개성이 있다. 시 속의 장난기는 의식의 가벼움이자 천진성이기도 하다”는 말로 김민정 시인에 대한 인상을 밝히기도 했다. “제멋대로인 시인”이라는 혐의는 우리가 흔히 시에서 기대하는 질서와 형식을 거부하는 데에서 연유된 것일 테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분방한 시인의 개성이 가진 힘은, 그녀의 시가 결코 가벼운 농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 힘은 바로 ‘깊이’이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김민정의 시에는 질서가 없는 대신에 깊이가 있다. 그녀는 심연을 보고도 용기가 헌앙한 탐험가이다”라고 이번 시집의 해설에 적고 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의 글이 2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김민정의 시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고 하더라도, 더러움이, 추함이, 짐승스러움이 세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면, 우선,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다, 우선, 세상은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
세상이 깨끗하고 맑고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깨끗함이, 맑음이, 고귀함이 세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깨끗하고 맑고 고귀하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다, 우선, 세상은 깨끗하고 맑고 고귀하다.
그러나 시는 세상이 아니다. 시는 언어가 매개한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언어가 매개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들어가 보면 언어도 세상도 없고, 거북함, 불편함, 편안함, 즐거움의 감각적 깊이만이 있다. 그것들을 논리화하게 되면, 우리는 때로 시의 세계에 있고, 때로 세상에 있다.
-김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 『앵무새의 혀』
김현이 위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 시의 모습은, 이번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김민정 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녀의 언어가 매개가 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언어도 세상도 사라지고 불편함, 씁쓸함 등의 감각만이 남는다. 그 감각의 깊이가 이번 시집이 갖는 가장 큰 힘인 것이다.
始作이라는 이름의 詩作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로 돌아가보자. 그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는 「陰毛 한 터럭 속에 세상 모든 陰謀가 다 숨어 있듯이」이다.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단추’를 위하여”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이 시는 마치 시인의 다음 시집을 향한 예언처럼 보인다.
“벙어리의 합창 속에서 유일한 목소리가 되어” “꿋꿋이 버”틴 “외투와 제복에 붙어 있던 그 단추”(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단추들」)처럼 “미처 다 안 뽑혀버린” “陰毛”에 숨은 “陰謀”(「陰毛 한 터럭 속에 세상 모든 陰謀가 다 숨어 있듯이」)를 드러내기 위한 유일한 목소리로 그녀는 또, 태어난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에 이르러, “陰毛”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세상이 규정한 아름다움의 결격사유가 될 수밖에 없는, 마르크스도 미처 예상치 못했을 불평등이 바로 그 “陰謀”였음(「陰毛라는 이름의 陰謀」)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번 시집 마지막에 놓인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에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에게 그 여자 육상 선수는 단순한 세계 신기록 보유자가 아니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그녀의 기록은 시인에게 “죽어서도 살아 있는” 詩다. 그녀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 1998년. 다음 해인 1999년에 김민정은 시단에 데뷔했다. “초콜릿색 피부에 컬러풀한 경기복, 마른 미역단 같은 머리칼에 짙은 색조 화장, 길게 이어 붙인 색색의 이미테이션 손톱”을 하고 출발선에 선 플로렌스 그린피스 조이너의 모습에 시인 김민정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 둘은 소실점이 되어 하나로 만난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자의 역사”는 죽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김민정 시인은 늘 시집의 마지막에 다시, 태어나거나 출발선에 선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詩作은 늘 始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