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중국 당나라 시대 불세출의 문장가 한유의 산문모음집
당송(唐宋)의 여덟 작가를 추려 ‘당송팔대가’라 칭한 이들 중에서도 수장으로 여겨지는 당나라의 대문호 한유의 명문장을 모았다. 이 책은 바로 모곤이 편찬한 『당송팔대가문초』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한유의 산문선집 『창려문초』 16권을 완역한 것이다. 한유가 황제께 올린 표문(表文), 지인들과 주고받은 글, 벗을 떠나보내는 글, 제문, 묘지명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쓴 산문이 실려 있다. 문학적 구상을 통해 탄생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일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인 만큼 지은이 한유의 삶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글들이다.
한유는 그의 글을 통해 인습(因襲)을 거부한 참신한 문장을 보여준다. 지체 높은 사람의 일대기만을 기록하던 전기 장르에서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의인법을 사용하는 등 파격과 창신(創新)에 주저함이 없는 과감한 문장을 사용하여 후대 사람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천 오백 여년 전, 명문장가의 글을 통해 당시의 삶과 문장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권10
권11
권12
권13
권14
권15
권16
옮긴이 해설·불세출의 문장가 한유의 삶과 작품 세계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저자
한유 저자(글),이주해 번역
출판사리뷰
중국 당나라 시대 불세출의 문장가 한유
대가의 신산한 삶이 담긴 산문 모음집
한유는 당나라의 문장가·정치가·사상가로,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諡)는 한문공(韓文公)이다. 송나라 진덕수(陳德秀)가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당송(唐宋)의 여덟 작가를 추려 ‘당송팔대가’라 칭한 이래 한유는 그들의 수장으로 여겨지는 당나라의 대문호이다.
진덕수가 팔대가, 즉 여덟 명의 대가를 추릴 때 기준으로 삼은 것은 시(詩)가 아니라 산문이었다. 이후 명나라의 당순지(唐順之)가 이들의 작품을 묶어 『문편(文編)』이라는 산문선집을 간행했고, 다시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 160권을 편집해 보급하였다. 이 책은 바로 모곤이 편찬한 『당송팔대가문초』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한유의 산문선집 『창려문초』 16권을 완역한 것이다. 선집이지만 한유가 남긴 산문 중 대략 70%가량이 수록되어 있어서 주요 작품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산문은 현대의 산문과는 달리 실용성이 매우 강조된 장르였다. 상소문, 편지글, 책에 붙이는 서문, 제문(祭文), 묘지명 등 그야말로 ‘쓸 데’가 있어야만 지었던 것이 산문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도 한유가 황제께 올린 표문(表文), 지인들과 주고받은 글, 벗을 떠나보내는 글, 제문, 묘지명 등 실용적인 글이 수록되어 있다. 문학적 구상을 통해 탄생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일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글인 만큼 지은이 한유의 삶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의 난세를 살았던 한유는 유가의 전통을 살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의 교화에 힘써 치세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헌종(憲宗)이 부처의 사리를 궁궐로 맞아들이려는 일에 대해 끝까지 간(諫)하다 멀리 남녘땅으로 유배되기도 하고, 「도의 근원을 밝힘(原道)」이라는 글을 지어 절을 불사르고 중들을 환속시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던 유교주의자였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하고, 『맹자』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의 경전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강조하는 고문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게 사상적인 면에서는 고집스러울 만큼 철저함을 보였지만, 그의 문학 세계는 실로 다양했다.
사실 그가 주창한 고문 운동은 복고주의가 아니었다. 복고의 대상은 옛날의 정신이지 옛 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유의 문장에는 인습(因襲)을 거부한 참신한 작품이 많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모영전(毛穎傳)」 같은 작품은 붓을 의인화하여 그 일생을 그린 작품인데, 지금은 의인화 수법이 흔하지만, 지체 높은 사람의 일대기만을 기록하던 전기 장르에 이러한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은 당시에는 파격(破格)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한유는 파격과 창신(創新)에 주저함이 없는 과감한 문장으로 문명(文名)을 날렸다. 이와 동시에 그의 산문에는 인생의 아픔과 좌절,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긍심과 연민이 흘러넘쳐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함께 자란 조카 십이랑(十二郞)이 죽었을 때, 자기를 길러준 형수가 죽었을 때, 절친한 벗 유종원이 죽었을 때, 어린 딸을 땅에 묻고서, 한유는 가슴속 회한을 조금의 문식(文飾)도 가하지 않고 절절하게 읊었다.
한유 작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한유보다 약간 뒤 세대의 문인인 두목(杜牧)은 한유의 문장을 두보(杜甫)의 시와 병칭하여 두시한필(杜詩韓筆)이라 하였고, 소식(蘇軾)은 한유의 문장이 “8대 동안의 쇠미함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모두 한유가 고문의 작법과 정신을 주창하여 쇠미해진 문풍을 진작시키고, 다채로운 문체의 개발과 천편일률적인 실용문에 변주를 가함으로써 새롭게 문학 작품으로 탄생시켜, 한 시대의 문단을 호령하는 종사로서 우뚝 섰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식은 또한 한유를 기리며 “필부로서 백 대의 스승이 되고, 한마디로 천하의 법이 되었으니, 이는 천지의 교화에 참여하는 것이요, 성쇠의 운명에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순(蘇洵)은 한유의 문장을 두고 “장강 큰 물결처럼 질펀히 돌아 흐른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