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족이라는 우아한 알리바이
세련되지만 담담한 문체로 일상을 그려온 소설가 서하진의 소설집이다. 작가는 모든 관계의 발생처이면서 동시에 가장 소통의 중심인 ‘가족’을 작가 특유의 치밀한 렌즈 속에서 파헤치고 있다. 감정 없이 암에 걸린 엄마-아내를, 신출내기 소설가를, 바람피우는 아빠의 딸을, 병에 걸린 한의사의 궤적을 따라감으로서 그들이 맺고 있는 사회 속의 관계와 소통의 의미를 드러낸다.
표제작인 「착한 가족」은 이같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아내-엄마인 여자의 하루를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익숙한 엄마의 가족을 위한 착한 희생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조차 우리는 갖가지 가면을 쓰고 피곤한 역할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써 내려 간다. 그리고 절대적 가치인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역할을 맡은 아내-엄마들에게 가족은 행복뿐만 아니라 고통의 진원지이기도 한 것이다.
목차
슬픔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
아빠의 사생활
착한 가족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터뷰
슈거, 혹은 솔트
너는 누구인가
사소한 일
해설: 가면 뒤의 진실은 없다_정여울
작가의 말
저자
서하진
출판사리뷰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아빠와 엄마의 이미지가 붕괴되는 그 순간, 터지는
가족이라는 우아한 알리바이
9회말 투 아웃, 임계점에 다다른 사람들 그 견딤의 클라이맥스!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세련되지만 담담한 문체로 일상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온 중견 소설가 서하진. 그녀의 새 소설집 『착한 가족』(문학과지성사, 2008년)이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발간되었다. 햇수로 등단 십 년차인 작가의 역량과 미문을 느낄 수 있는 이번 소설집은 냉철한 객관적 거리와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안아주는 따스함으로 이전 저작을 통해 천착해왔던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착한 가족에 대해
서하진은 ‘거리두기’를 통해 사건으로부터의 객관적 태도를 유지한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등장인물들에게 떨어져 그들을 관찰하게 된다. 자칫 건조하기 쉬워지는 이러한 방법은 그의 세련되고 유려한 문체로 극복된다. 독자들은 그들로부터 떨어지지만, 그들의 처지를 공감하게 되고 이로써 그녀의 소설은 독창적 지위를 확보한다.
이번 소설집 역시, 소설가 서하진은 ‘여기-지금’을 보여줄 뿐, 주장을 하지도, 의미를 부과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그리하여, ‘여기-지금’의 문제 제기로 직결된다. 감정 없이 암에 걸린 엄마-아내를, 신출내기 소설가를, 바람피우는 아빠의 딸을, 병에 걸린 한의사의 궤적을 따라감으로서 그들이 맺고 있는 사회 속의 관계와 소통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들, 주인공들은 일상을 영위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며 비정상적인 인물은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고, 그 사연 속에서 사건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이번 소설집에서는 남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없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이번 소설집에는 담겨져 있다.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무수히 다뤄진, 암에 걸린 여자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슬픔이 자라면 무엇이 될까」)도, 자상한 아빠가 바람피우는 이야기(「아빠의 사생활」)도 서하진 만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이 소설의 매력은 의외의 곳에서 빛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놀라운 가면바꾸기가 그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한 가지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이러한 가면바꾸기에 대해서 평론가 정여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하루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는 오늘도 이루지 못한 욕망의 그늘이,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그림자가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견디는 것입니다. 9회말 2아웃 상황까지 자신의 욕망을 유예시키다가 마침내 임계점에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그 견딤의 클라이맥스를 그리는 것이 이 작가의 특장이지요. 이런 견딤의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알고 보니 모든 일이 소리 없이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빅뱅의 시간입니다. 그들의 알리바이는 여전히 가족입니다. 상대의 몸짓 언어와 옷차림에서 내면의 동작까지 읽어내는 기술에 도가 튼 우리 시대의 사모님들은 서하진 소설의 단골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패를 결코 들키지 않는 도박사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인. 그 핑계를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로 돌리는 그녀들에게 가족은 고통과 행복의 진원지이기도 하면서 타락의 진원지이기도 합니다.
─해설 「가면뒤의 진실은 없다」 중에서
이렇듯 가면바꾸기는 현대 사회인의 모습이다. 물론 서하진은 이러한 모습을 병리적 증상으로, 병폐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냥 지금의 모습을, 그렇게 했듯,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담담한 필치로. 그렇게 우리의 실제는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지금의 관계와 소통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의 소설가 서하진은 그 핵심을 가족으로부터 발견한다.
서하진 소설에서 가족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다. 모든 관계의 발생처이면서 동시에 가장 소통의 중심인 ‘가족’은 서하진의 치밀한 렌즈 속에서 파헤쳐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등장인물들의 평범하고도 범상치 않은 이야기들은 시작된다. 그런데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이 어떻게 구체화되어 어떤 가면놀이로 ‘좋은 소설’이 되어 탄생할 수 있는가
표제작인 착한 가족을 보자. 한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아내-엄마인 여자의 하루를 그려낸 이 소설은 일견 너무 착하기만한 가족을 위한 ‘슈퍼 엄마’의 희생으로 읽힌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아내-엄마로서의 역할은 아내|엄마의 역할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과 시각은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음이 당연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것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엄마에도 좋은 아내에도 여자는 있으며, 있지 않다. 좋은 아내는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남편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훌륭한 엄마는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아들이 모르는 속셈, 속사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남편과 자식들은 그 사실을 끝내 모른 체 영원한 비밀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밀인지 비밀이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상을 유지시키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이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들켜서는 안 되며,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속고 속이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서하진은 여기에 도덕이나 객관적 기준의 잣대마저 들이대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며 특장이 된다. 가장 냉철한 시선이 그 자체로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다. 모든 판단에 제거되어 버린 듯한 시선이 낯설고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이는 오히려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공범의식과 비슷한 이 즐거움은 사회 속 나를 바라보는 즐거움이자, 미처 발현되지 못한 자아의 또 다른 ‘가면’을 대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팔색조 같은 주인공들 혹은 그 변신에 정답이란 없다. 우리 삶이 그러하듯이.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답이고 우리의 삶일지 모른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삶의 쓸모는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변신’이 누구의 뜻이 아닌 나의 의지라는 점이다. 나와 타인의 차이는 의지에서 발현된다. 우리는 무수한 나의 가면으로 또 다른 무수한 나를 대변하고, 대면하고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진실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삶의 교묘한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작가 서하진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나’로 시작되어 ‘나’로 끝나는 결국 쓸쓸해야 마땅한 이야기들은 그러나, 쓸쓸하지 않다. 주인공들은 임계점을 지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느끼고 안도한다. 그러한 감정은 점점 몰입하게 되는 독자들에게 알 수 없는 따뜻함으로 전달된다. 자신이 어느새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죽는다는 사실이,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무서운 현실이고 쓸쓸한 일이면서도 그사이로 밀려드는 따뜻한 안도감. 이는 자신의 정체가 들키지 않았다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혼자라는 것에 대한 기묘한 동질감 그 너머 무엇인가가 서하진의 이번 소설의 끝들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고 혼자이다. 이 따뜻함은 연말, ‘지금’의 작가 서하진에게 우리가 선물로 받는 아주 소중한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