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80년대 이후 한국 시에서 강력한 미학적 동력으로 역할해온 김혜순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멈추지 않는 상상적 에너지로 자신을 비우고, 자기 몸으로부터 다른 몸들을 끊임없이 꺼내오는 시인의 시학은 독창적인 상상적 언술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며, 언제나 자기 반복의 자리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다.
때로는 무한히 확장되어가는 자아, 혹은 자아의 몸 이미지가 물결처럼 음악처럼, 세계로 우주로 퍼져나가는가 하면 그 반대로 세계는 한 사람, 하나의 몸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이는 시인의 상상 세계가 출발이 애초에 나와 타자, 나와 사물, 나와 세계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미 구분 지어진 것의 통합이 시인의 도착점이자 출발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목차
시인의 말
지평선
모래 여자
불가살
서울,코라
붉은 가위 여자
별을 굽다
양파
풍경의 눈빛
첫
봉숭아
lady phantom
수미산 아래
메아리나라
비단길
미쳐서 썩지 않아
전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딸기
성탄절 아침의 트럼펫
칼과 칼
웅웅
혼령혼례
감기
마음
트레인스포팅
꽃잎이 피고 질 때면
당신 눈동자 속의 물
산들 감옥이 산들 부네
은밀한 익사체
인어는 왜 다 여자일까
엄마는 왜 짤까?
Delicatessen
회오리를 삼키다
하늘강아지
나이 든 여자
쌍비읍 징그러워
따귀새
당신의 눈물
노래주스
눈물농사
붉은 노을
lady cine
히말라야 가라사대
연금술
고양이
누란
에미에비
장마
모두 밥
가슴을 에는 손길처럼
바다 젤리
비명생명
신데렐라
환한 방들
달
핑크박스
돌이 '하다'
뱃속의 어항은 정말 처치 곤란이야
세상의 모든 이야기
목구멍이 촛대가 되었네요
화장실
해설 | 나,그녀,당신,그리고 첫 · 이광호
저자
김혜순 (지은이)
출판사리뷰
제도와 문법의 두께를 꿰뚫고,
피 흘리는 붉은 몸의 소리를 다시 호출하는 ‘첫 시’들
치열한 이미지의 시인, 김혜순의 아홉번째 시집 『당신의 첫』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번으로 출간되었다.
김혜순 시인은 80년대 이후 한국 시에서 강력한 미학적 동력으로 역할해왔다. 한국의 여성시를 대표한다는 말도 그에겐 과언이 아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이광호가 “김혜순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시학이며, 김혜순 시학은 하나의 공화국”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광호는 여기에, “동시대의 여성 시인들이 김혜순 공화국의 시민이었으며, 특히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언술 방식과 김혜순 시학의 상관성은 더욱 긴밀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시집에 실린 「모래 여자」는 한 여자의 미라를 통해 여성의 삶을 되짚은 작품으로 평가되면서 제6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것은 미당문학상 최초의 여성 수상자의 탄생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멈추지 않는 상상적 에너지로 자신을 비우고, 자기 몸으로부터 다른 몸들을 끊임없이 꺼내온 김혜순의 시학은 독창적인 상상적 언술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며, 언제나 자기 반복의 자리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같은 도형은 절대로 그리지 않는” 김혜순의 시는 그래서 어쩌면 늘 ‘첫 시’처럼 느껴진다. 그곳의 ‘첫 말들’의 내용은 새로운 이미지의 탄생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의 발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은 ‘당신의 첫’ 김혜순 시집이 될수도 있으리라.
‘사이’에서 만나는 ‘모래 여자’ 이야기
이번 시집에서 김혜순의 시와 만나는 지점은 ‘사이’이다. 이런 점에서 「지평선」이 시집의 처음에 놓인 이유는 명확해진다.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으로서의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몸이 갈라진 흔적”으로 남은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흰낮과 검은밤”의 사이에 김혜순의 시가 있다. 이것은 “핏물 번져 나오는 저녁,”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에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는 이야기이다. 그녀가 매가 되는 낮과 그가 늑대가 되는 밤,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그 “만남의 저녁”으로 들어가본다.
그 ‘사이’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김혜순 시의 화자이자, 동시에 시인 김혜순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두번째 시에서 나타난 「모래 여자」이다. 상한 곳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모래 속에서 들어 올려진 여자는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자를 보존하기 위한 외부의 폭력으로 인해 신체가 훼손된다.
이제 그 ‘모래 여자’가 번쩍 눈 뜬다. 그리고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넒”은 “여자의 눈꺼풀 속”에 담긴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모래 여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갈갈이 찢어 세계의 곳곳, 광활하고 자유로운 자연에 두고, 현실에서 “밥하고 강의하고 이렇게 늙어”가는 존재이다. 때문에 현실의 시궁창 속에 살면서 그녀의 발은 “저 먼 산으로/늑대처럼 가버린다.”(「불가살」) 또한 이 여자는 출산과 절단의 상징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가위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한다. 특히 자기 몸의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쏟아내는 거침없이 들끓는 에너지(이광호)로 표현된 붉은색 이미지는 김혜순의 앞선 시집 『한 잔에 붉은 거울』에서 전면화된 것으로, 이전 시집의 해설에서 이인성이 한 말처럼 “새로운 상상을 여는 색감으로 솟아오르고 있다.”(「붉은 가위 여자」)
‘첫’에 대한 질투에서 시는 다시 시작된다
표제작 「첫」에서 ‘나’는 “당신의 첫”을 질투한다. 무언가의 앞에 붙어서야 그것의 처음으로서의 성격을 만들어주는 관형사 ‘첫’은 죽은 명사들을 처음의 상태로 활성화하는 에너지 자체이다. 그래서 ‘첫’은 실체를 알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다. 때문에 ‘첫’은 지독한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첫’의 이름 안에는 ‘첫’이 살고 있지 않다. ‘첫’은 언제나 ‘첫’의 자리로부터 도주한다. 그래서 영원히 만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첫’은 ‘끝’과 같다.
죽음과 탄생이 맞물리며, 처음과 끝이 흔적도 없이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김혜순의 시는 지배적 상징질서들이 만들어놓은 시적인 것들과 결별하고, 다시 그것을 게워내는 ‘첫’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