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섹시한 은유와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몸을 경쾌하게 시로 다루었던 첫 시집 이후, 더욱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인이 2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우리 의식의 한 꺼풀 속살을 열어, 순간순간 의식을 낳는 여러 가지 욕망들을 시인은 자의식으로 다독거리고 갈무리한다. 또한 아주 구체적이면서 일상에서 감히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자연스러운 육체의 호흡으로 끌어올리는 그녀의 시어들은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의 연장선을 이어가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세이렌의 노래
레일 없는 기차
서머타임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
유니폼은 싫어요
나무 위의 식사
헬렐레할래
지정석
여드름투성이 안장
이바지
인도차이나
쿠마리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
망한 정신병원 자리에 마리 수선점을 개업하기 전날 밤
드러머와 나
침묵의 복원
제2부
일요일의 세이렌
부속 건물 실험실에서
커다란 눈동자
자화상은 지겨워
나무나 나나
태양 아래 헐벗고
부치지 않은 편지
바바야가의 오두막
왼손잡이
안나 오의 진료실
오토릭샤맨
항상 엔진을 켜둘게
레터 나이프
혼돈
바싹 마른 태아를 해금으로 연주할까요
투견
합창합시다
보시니 좋더라
실종자
은행나무 여인숙
서울 퍼포먼스
녹색 광선
제3부
이제 불이 필요하지 않은 시각
추억은 파리
안녕
타블라
화장실에 고양이를 가두지 마세요
막
사우나 잡념
달리는 집
병자가 병원에 와서 죽듯이
어제의 만나manna
안드로메다 이수자
명암
일주일
평균율
유일하지 않은 하나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지 말고
엔딩 크레디트
저자
김이듬
출판사리뷰
고통을 다른 쾌락으로 만드는 시적 체위
그 한없는 몽유, 혼몽의 시간 속에서 명랑하라!
섹시한 은유와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몸을 경쾌하게 시로 다루었던 첫 시집 이후, 더욱 도발적인 제목으로 2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펴낸 김이듬 시인의 『명랑하라 팜 파탈』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감정이입이라는 여성적 원리가 시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던 김이듬 시인의 감성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였다. 가장 정직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지식도 지성도 아닌, 감각의 총화로서 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이듬 시인은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내 이름은 ‘이듬’입니다. ‘언제’라고 말하려 해도 규정하기 어려운 ‘그때’이지요. ‘지금’이라고 발음하는 동시에 ‘과거’가 되는, 닿지 못할 미래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불확정적인 것들을 사랑해요.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제까지나 ‘오해’를 남기는 것 같아요. 나에 관해 말하는 것도 그렇겠지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들은 변해가고 죽어간다는 것이지요.”
어떤 인터뷰에서 김이듬 시인이 자신의 필명(김이듬은 필명이다)에 대해 한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이듬’이란 이름을 붙인 것처럼, 그녀가 쓰는 시들은 규정하기 어려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불확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녀의 시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것의 새로움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 뒤에는 그녀의 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울림이 있다.
따로 창작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대학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지만 늘 데모 대열에 끼어 대자보와 문건 작성에만 필력을 쏟았던 시인은 그래서 오히려 틀에 박히지 않은, 제멋대로의 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좋은 시, 잘 읽혀지는 시를 따라 가지 않고 자신의 화법대로 쓰다 보니까 나름대로의 시 세계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고려대 황현산 교수는 그녀의 첫 시집 해설에서 “김이듬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의 시적 감수성이 개척하고 답사해온 지도 한 장을 얻게 된다. 그가 숨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는 독자에게는 김이듬의 어지러운 말만큼 잘 정돈된 말도 드물다. 이 어지러운 상태와 정돈 상태의 겹치기는 김이듬에게서 자주 시 쓰기에 비유되는 섹스의 체험과도 같다”고 평한 바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날선 감각들이 피를 흘리며 쏟아질 때, 또 다른 언어가 절제시키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이듬 시인은 첫 시집 발표 이후 “어지럽고 난해한 감수성 저변에 현실 인식이 미묘하게 깔려 있다”는 주변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쓸데없이 자의식이 강하고,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와 통제에 익숙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사랑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비틀어버리는 것, 한 편의 시를 쓰다가 갑자기 또 다른 화자가 등장해서 훼방을 놓는 거죠. 믹싱과 스크레치가 일어나요.”
규정되지 않고 불확정적인 것들을 노래한 김이듬 시인의 시는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에 공들이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시적 담론을 추구하며 시단의 한 그룹을 형성했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몽유의 마녀가 부르는 노래
김혜영 시인은 최근의 여성 시인들 중에서 비범한 시적 역량을 보여주는 인물로 김이듬 시인을 꼽으며, “성적인 모티프를 풀어내면서 상징계와 실재계의 벽을 허무는 시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이번 시집의 수록 작품인 「푸른 수염의 마지막 여자」는 “성적인 담론과 억압에 저항하는 시어들이 팔딱팔딱 살아 있”으며, 동성애에 관한 사회적 담론을 "나의 눈에서 물이 흐릅니다 한쪽 눈알은 말라빠졌습니다 두 다리의 무릎까지만 털이 수북합니다 음부의 반쪽에선 생리가 나오고 오른쪽 사타구니엔 정액이 흘러내립니다 백 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으로 토로하는 것처럼, 김이듬 시인이 선택하는 시어의 세계는 아주 구체적이면서 일상에서 감히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자연스러운 육체의 호흡으로 끌어들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지난 첫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육체의 감각 밑에서 발굴한 시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광호 씨는 시집의 제1부와 제2부의 처음을 장식하는 ‘세이렌’에 주목한다. 세이렌은 감미로운 노래로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을 섬으로 유혹하는 신화 속의 존재이다.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의 어원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위험을 알리는 소리가 유혹의 소리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김이듬의 시에서도 그 위험한 음악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광호 씨는 김이듬의 시에서 본 세이렌은 추한 바다 괴물도, 천상의 목소리와 지혜를 가진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몽유의 마녀’로서의 시적 주체로서, 이미 꿈에 취한 자, 혹은 몽유를 앓는 자, 가사(假死) 상태로서의 세이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상한 나라의 세이렌이 자신의 강박증을 상징질서를 위반하는 에너지로 동력화하는 분열된 발화를 들려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없던 불길한 세이렌의 시간 속으로 듣는 자를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