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온 박완서 문학 37년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길어낸 진솔한 이야기의 감동
박완서 작가가 문단에 데뷔한 지 올해로 37년이다. 불혹의 나이에 등단하여 올해로 일흔 일곱을 맞기까지, 누구보다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온 그가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펴냈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이후 9년 만에 낸 소설집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가 그랬듯이, 『친절한 복희씨』의 복희씨 역시 알고 보면 친절한 사람은 못 된다. 하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화자인 복희씨는 열 아홉 꽃다운 나이에 애 딸린 홀아비와 결혼해 전처소생 아이까지 오남매를 길렀다. 오남매를 모두 결혼시켜 손자손녀까지 보았지만, 자유는커녕 중풍 걸린 남편을 돌봐야 하는 처지. 중풍 걸려 흐느적대는 남편, 여전한 것은 왕성한 성욕뿐이다. 일을 보고 뒤처리를 해줄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가 하면, 약사에게 비아그라를 달라고 떼 쓰는 남편을 보며 복희씨는 치욕감과 소름을 동시에 느낀다.
표제작인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해 9편의 단편들은 대부분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의 신산한 삶을 그린다. 곰삭은 한이나 상처를 연상시키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 있고, 스멀스멀 육체에 기어든 병까지 감수해야 하는 그들. 그러나 이토록 보잘것없는 삶을, 작가는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한다.
환갑진갑 다 지난 여덟 살 아래의 사촌동생이 홀아비 선주를 만나 다 늙어 재혼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그리움을 위하여』, 노인성 치매로 고통받는 시아버지를 모시는 며느리의 이야기 『마흔 아홉 살』 등 인간적인 삶, 아름다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궁구를 이끌어내는 단편들은 새로운 노년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의 나이가 노년이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노인이라는 것은 표피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노인이기에 가능한 원숙한 세계 인식, 삶에 대한 중후한 감수성, 이에 따르는 지혜와 관용과 이해의 정서가 이 책에 잘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목차
그리움을 위하여 (『현대문학』, 2001년 2월) 제1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그 남자네 집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
마흔아홉 살 (『문학동네』, 2003년 봄호)
후남아, 밥 먹어라 (『창작과비평』, 2003년 여름호)
거저나 마찬가지 (『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
촛불 밝힌 식탁 (『촛불 밝힌 식탁』, 동아일보사, 2005)
대범한 밥상 (『현대문학』, 2006년 1월호)
친절한 복희씨 (『창작과비평』 , 2006년 봄호) 문인 100인 선정 ‘2006 가장 좋은 소설’
그래도 해피 엔드 (『문학관』 통권32호, 한국현대문학관, 2006)
저자
박완서 (지은이)
출판사리뷰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온 박완서 문학 37년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길어낸 진솔한 이야기의 감동
우리네 삶을 ‘가장 밀도 있게 형상화’하는 데 천부적인 작가 박완서가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이후 무려 9년 만에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 2007)로 우리 곁에 왔다. 올해로 일흔일곱을 맞은 작가는 알다시피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그 누구보다도 왕성한 창작의 열정을 발산해왔다. 이는 그간 펴낸 9권의 소설집과 15권의 장편소설 외에도 다수의 문학전집과 산문집, 그리고 그의 문학세계를 분석해놓은 각종 연구서들이 잘 뒷받침하고 있다. 더군다나 박완서의 빛나는 문학적 성과는 특정 시기에 집중해 있지 않고 40여 년에 가까운 작품 활동 기간에 두루 걸쳐져 있는 데다, 고희로 접어든 2000년을 기점으로 1권의 소설집과 2권의 장편소설을 거푸 쏟아냈다는 사실에서 더욱 주목하게 된다.
이미 다수의 평론가들이 말해주었듯,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과 겹치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글로 형상화하는 작업(역사의 기억, 개인사의 복원: 『나목』 「엄마의 말뚝」연작), 중산층의 속물화된 일상과 극단적인 물신 숭배로 치닫는 사회를 신랄하게 꼬집는 작품(세태 비판: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 혹은 모성이 겪는 불합리함과 그들이 자아를 발견해가는 신산한 삶의 전경들을 핍진하게 그린 작품(여성 문제: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들까지, 박완서 문학이 그러안고 있는 세계는 그 소재와 주제 면에서 넓고 다채롭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도 첨예한 작가의 동시대적 관심사는, 노련한 필력에 세월에 빚진 원숙한 삶의 지혜가 더해져 우리에게 “제 태어난 본래 자리에 돌아온 듯한 안도감”은 물론이요, 삶의 세목에 주목하고 내면을 되돌아보게 하는 겸손함마저 일깨운다.
“삶이란 거, 여전히 살아볼 만하다”
―신산한 삶을 ‘감칠맛 나게’ 메마른 현실을 ‘따뜻하게’ 끌어안기
2001년 벽두에 발표하여 그해 제1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그리움을 위하여」와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의 제목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2006년 ‘문인 100명이 선정한 가장 좋은 소설’로 뽑힌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하여, 총 9편의 길고 짧은 단편이 이번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 묶였다.
대부분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작품 속 화자들은 ‘그리움’이란 말과 통어하는 회고에 젖어 있다. 본디 그리움이란 오랫동안 곰삭은 한(恨)이나 상처와 별개일 수 없는 법. 더구나 스멀스멀 육체에 기어든 병까지 감수해야 하는 노년의 그들이다. 여기서 박완서의 치밀한 서사적 구성력과 거침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문장, 균형감을 잃지 않은 반듯한 도덕적 성찰은 평범하고 보잘것없을 수 있는 그들의 일상을 재조명한다. 퇴색한 기억을 반질반질 윤을 내어 활력을 불어넣고, 이야기의 소재와 향유의 대상을 실버세대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대로 확장시켜 절실한 공감을 형성하는 한편, 인간적인 삶,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모두의 철학적 궁구를 억지스럽지 않게 이끌어낸다.
마술처럼, 읽는 이가 미처 눈치 챌 틈을 주지 않고 한달음에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아차 싶은 깨달음을 안겨주는 것, 한결같은 박완서 문학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그이들을 괴롭히는 암(「대범한 밥상』), 중풍(「친절한 복희씨」), 노인성 치매(「후남아, 밥 먹어라」 「그 남자네 집」), 관절염(「그리움을 위하여」), 잦은 건망증(「거저나 마찬가지」) 등은 척박했던 전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온 데 따른 화인(火印)일 뿐, 현재 그들의 정신을 잠식하는 바이러스도 아니고, 무력하고 불행한 파국으로 이끄는 패스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단단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 노년의 덕성―지혜와 관용과 이해―과 삶에 대한 진한 감수성─사람다운 삶에 대한 갈망, 열패감에 젖어 있는 속인을 바라보는 연민―을 농익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따름이다.
중년의 여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거저나 마찬가지」나 「마흔아홉 살」에서 부각되는 인간의 위선과 갈등도 그 흔한 풍자와 야유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톱니바퀴들을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만드는 필요악으로 해석된다. 인간의 내밀한 속사정―은밀하고도 편협한 이기심, 세속적 탐욕, 허위의식―을 가차 없이 까발리고, 복잡 미묘하게 뒤얽힌 인간사의 미세한 갈등들을 명쾌하고도 시원스러운 어조로 풀어나가는 박완서, 그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고개 숙일 수밖에 없게 한다. 여기에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를 적나라하게 묘파(「거저나 마찬가지」 「촛불 밝힌 식탁」)하는 가운데서도 특유의 반전(「대범한 밥상」)을 꾀하게 하는 적재적소의 유머와 재치(「그래도 해피 엔드」)는 물길처럼 자연스럽게, 억지스럽지 않은 인생을 향한 예찬이며 동시에 매끄러운 서사의 표면을 닦는 윤활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냉철한 사실주의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평범한 일상의 파편에서 재발견해낸 수다한 이야기와 경쾌한 재미, 속악한 인간사에 대한 씁쓸한 비애, 그리고 생과 죽음의 섭리에 대한 겸허하고 평온한 각성. 이 모두가 허울뿐인 관념의 더께를 거부하고, 복잡하고 진한 살내로 가득한 ‘육체의 문학’을 좇아온 박완서 소설이 갖춘 미덕이며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다. 그야말로 삶의 무게로 빚은 우리 소설 문학의 높고 깊은 경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