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정병근 시인의 두번째 시집. 이번 시집은 무심히 지나가버린 일상에 대한 애처로움과 연민의 정서가 그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 무관심할 수 없는 사연들이 남긴 흔적들은 강한 연민의 감정을 시인에게 환기시킨다. 철저한 고독의 공간에서 너무나 깊이 상처 받은 존재들이 사는 지점, 그곳에서 사람들은 미래와 과거를 응시한다.
시인은 불확실한 미래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과거, 삶의 흔적들이 엇갈리는 지점에서 불꽃 같은 지혜와 영감을 떠올린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러한 지점으로 ‘머나먼 옛집’을 그린다. ‘옛집’은 죽은 자들의 집이고 또 사라져버린 것들이 마술처럼 생명력을 꽃피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집은 현재의 무기력과 권태를 초월하려는 신성함이 깃든 공간인 동시에 현재의 비루함이 역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흔적
붉은 숲
덩굴의 노선
코스모스
할미꽃
여뀌들
엉겅퀴
벌거숭이 플라타너스
도토리 사냥
업
흔적
비닐
폐도축장
집행
유리의 기술
나팔꽃 씨
욕조의 항해
무서운 장난감
고독한 냉장고
번개를 치다
풀을 인 대문이 있는 집
추억
제2부 얼굴
지하철
노숙 1
그의 가족
노숙 2 - 그의 재림
그녀의 리어카
목포홍탁, 그 여자
기발한 인생
그 나사 아저씨
내 친구 박원택
그을림에 대하여
튀밥 아저씨의 가계
무서운 여자
사자후를 듣다
겁 없는 골목
그 안마방
평상
그의 얼굴
명상 센터를 나오며
넝마
나는, 그가
제3부 나무
나무
달과 노인
빗속의 젓갈
골목의 캐비닛
달밤
어머니를 버리다
깊고 푸른 기억
꽃
핸드폰
눈
고속도로 옆, 그 느티나무
오동나무, 생을 다하다
저 단풍나무
목련
석류
빙하기의 추억
침묵의 이면
어둠행
뒤안을 나오며
머나먼 옛집
해설 : 붉은 부적, 땡볕, 유리의 연금술 - 김춘식
저자
정병근
출판사리뷰
땡볕 속을 천 리쯤 걸어가면
돋보기 초점 같은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을 백 년쯤 걸어가야 당도하는 집
붉은 부적이 문설주에 붙어 있는 집
남자들이 우물가에서 낫을 벼리고
여자들이 불을 때고 밥을 짓는 동안
살구나무 밑 평상엔 햇빛의 송사리 떼
뒷간 똥통 속으로 감꽃이 툭툭 떨어졌다
바지랑대 높이 흰 빨래들 펄럭이고
담 밑에 채송화 맨드라미 함부로 자라
골목길 들어서면 쉽사리 허기가 찾아오는 집
젊은 삼촌들이 병풍처럼 둘러앉아 식사하는 집
지금부터 가면 백 년도 더 걸리는 집
내 걸음으로는 다시 못 가는,
갈 수 없는, 가고 싶은
―「머나먼 옛집」 전문
현실의 비루함에 대한 시인의 통렬한 자각은 과거에 대한 그의 시선에서뿐만 아니라 이 시집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미화와 집착이 시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하나의 강한 욕망이라면 다른 한편에는 과거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현실에 대한 강한 의심이나 거부가 시 속에 존재한다. 시인은 내면을 지배하는 비속함과 의심, 부끄러움, 통속을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서 발견한다. 이 존재들은 모두가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분열, 순수에 대한 갈망, 성찰적 자아와 분리된 현실적 자아의 비속함 속에서 대해 불안을 느끼며 이 불안에는 세상의 평가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과 결국 말해지지 못한 진실에 대한 항변이 담겨 있다. 이러한 불신과 불안은 현실에 대한 ‘단절’과 ‘고립 의식’으로 드러나며 초월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유리의 技術」 전문
시인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인 이 시는 순수와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 ‘유리의 안쪽’과 흔적과 온갖 불순물로 가득 찬 ‘바깥 풍경’을 가르면서 시인이 지향하는 절대의 경지를 보여준다. 모둔 불순물을 제거한 채 사물의 세계를 자신의 몸 안으로 들이는 유리야말로 시인이 지향하는 경지이다. 시인은 현실의 여러 잡다한 불순물과 과잉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시적 경지의 세계를 추출하고자 한다. 연민과 반항, 단절과 고립의 이면에는 유리의 놀라운 기술처럼 시계를 자신만의 세계로 재단하고 싶은 시인의 시적 열망 혹은 집착이 존재한다.
시인이 바라본 현재의 풍경과 과거의 그것과의 대조는 시인의 현재에 대한 부정정신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아픔이나 고통을 말끔하게 잘라내는 단절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재현하는 ‘유리의 연금술’은 과거의 기억과 흔적을 다루는 시적 기술의 한 극치를 상징한다.
시인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절대성의 세계, 즉 위에 언급한 유리의 기술로 이루어진 공간과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조화되기 어려운 공간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갈등과 불균형의 지점에 그의 시 세계가 존재한다. 갈등과 모순 속에서 싸우지 못하는 자의식이 거짓이듯 정병근 시인의 시 세계는 쉽게 화해될 수 없는 두 지점에 걸쳐 있다. 그러나 갈등과 모순 속에서 싸우지 못하는 자의식이 거짓이듯이 『번개를 치다』는 일상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넘어 삶에 대한 진정성을 이 지난한 화해의 여정 속에서 찾으려 하고 있으며 시인은 그 가운데서 시적 활력을 얻으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