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 『구토』
“사르트르의 철학 저작 중 단연 가장 중요한 책!” _한나 아렌트
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가 역자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매끄러운 번역으로 20세기 걸작 『구토』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해 출간하는 국내 완역본이다.
『구토』는 사르트르가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체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고독한 사람의 전형이다. 연금생활자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지만 섬겨야 할 상관도, 아내도, 자식도 없는 ‘낙오자’다. 그는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 놀이를 하려고 돌멩이를 집어 던지려는 순간에 모종의 불쾌감을 느끼고 후일 그때의 느낌을 ‘구토’로 명명한다. 삶에서 그 어떤 존재 의미도 찾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아도는’ 존재로서의 실존을 자각하는 순간 구토를 시작한 로캉탱은 철학교사로 생활하며 작가적 명성을 열망하던 사르트르의 분신이다. 사르트르는 주인공 로캉탱의 예리한 관찰을 통해 과거에 축적한 지식과 영광에 안주하는 지식인의 자기기만, 소시민적 권태와 부르주아의 위선, 나아가 무의미한 대화들만 주고받는 모든 인간의 비진정성을 드러낸다.
인류 역사상 가장 낙관적인 세기로 규정되는 19세기를 뒤로하고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을 경험했던 인간들의 위기의식을 사르트르는 ‘구토’ 현상으로 포착해낸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방황하는 현대인의 고뇌를 그린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과 체념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용기의 지평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구토』가 오늘날까지도 유의미한 보편성을 갖고 20세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목차
▶편집자의 일러두기
▶날짜를 적지 않은 페이지
▶일기
?작품 해설
?장 폴 사르트르 연보
저자
장 폴 사르트르 (지은이), 임호경 (옮긴이)
출판사리뷰
“사르트르의 모든 사유는 『구토』에서 흘러나왔고, 『구토』로 흘러든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
-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한 국내 완역본
-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는 『구토』
전쟁과 경제공황 이후 ‘신’이 부재한 세계,
인간 실존의 조건은 무엇인가
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가 역자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매끄러운 번역으로 20세기 걸작 『구토』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해 출간하는 국내 완역본이다. 『구토』는 마치 탐정소설처럼 시작된다. 소설 첫 부분 「편집자의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가운데에서 발견”된 노트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발행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 노트들은 로캉탱의 일기이며 1932년 1월 초 무렵부터 쓰였다는 것, 로캉탱은 중부 유럽, 북아프리카, 극동지역을 여행한 후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마치기 위해 3년 전부터 부빌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 추가 단서로 주어진다. 이후 독자는 앙투안 로캉탱의 일기를 은밀히 들여다보며 자연스레 그의 탐험에 동행한다. 그리고 곧 로캉탱과 우리의 공동 탐사 대상이 로캉탱이 체험한 구토 현상임을 알게 된다.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34쪽)
이렇게 시작된 로캉탱의 구토 체험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보면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면서, 나이프 손잡이를 잡으면서…… 또한 로캉탱 자신, 그가 자주 들르던 카페, 부빌 시의 공원, 급기야 이 세계 전체가 구토로 체험된다. 이렇게 로캉탱의 삶 전체가 되어버린 ‘구토’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캉탱은 철학교사로 일하며 작가를 꿈꾸던 사르트르의 분신이며 『구토』는 사르트르가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체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곧 작품 속 구토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 실존의 조건을 묻는 사르트르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르트르의 철학 체계에서는 ‘신’이 부재한다는 가정하에 이 세계의 존재들은 신의 섭리, 즉 필연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우연성의 지배 아래 놓인다. 어떤 필연성의 논리에 의해서도 포획되지 않은 채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거기에 있는, 쓸데없는, 남아도는, 잉여적 존재들의 모습. 그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낯설고 부조리한 감정이 바로 ‘구토’다. 인류 역사상 가장 낙관적인 세기로 규정되는 19세기를 뒤로하고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을 경험했던 인간들의 위기의식, 특히 ‘신’의 부재로 인해 직면한 이런 위기의식을 사르트르 역시 고스란히 공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그 위기의식과 무력감을 ‘구토’ 현상으로 포착해낸다.
왜,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문학을 통한 구토의 극복,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르트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토』에 대해 언급하며 이 작품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가장 잘 쓰인 작품으로 꼽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참여문학론’을 주창한 사르트르는 문학비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어째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세 가지 물음에 자문자답하며 문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통찰한 바 있다. 『구토』는 사르트르가 주장해온 “문학은 이웃의 구원, 특히 억압과 폭력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의 구원을 겨냥해야 한다”는 것에는 부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구토』는 작가 사르트르 자신의 구원 문제를 다룬 작품이며 나아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방황하는 현대인의 고뇌에 공명하는, 오늘날까지 유의미한 보편성을 띠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되고자 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실존에 대한 고뇌, 불안을 다룬 이 작품에서 사르트르는 자신을 투사한 주인공 로캉탱이 다름 아닌 문학을 통해 ‘구토’를 극복하고 진정한 삶으로 ‘구원’받는 모습을 그려낸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410쪽)
『구토』는 인간의 극복 불가능한 삶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절망과 체념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용기의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토』가 20세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프레보, 스탕달과 플로베르, 지드와 프루스트, 포크너와 헤밍웨이까지
18, 19, 20세기를 잇는 ‘문학 창작의 교차로’에 놓인 작품
21세기에도 여전히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사르트르의 ‘글쓰기의 모험’
평범한 철학자이자 풋내기 작가에 불과했던 사르트르를 단번에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로 급부상시킨 『구토』는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망라한 작품이다. 사르트르는 1931년부터 약 7년에 걸쳐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18, 19, 20세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섭렵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원용했다. 18세기 작가로는 프레보 등을, 19세기 작가로는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을, 20세기 작가로는 지드, 프루스트, 말로, 셀린 등과 같은 프랑스 작가들과 카프카, 더스패서스, 포크너, 헤밍웨이 등과 같은 외국 작가들을 섭렵했다.
앙투안 로캉탱이 쓴 일기 형식을 취하는 『구토』에는 내적 독백,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환상소설 기법, 상호텍스트성, 패스티시, 패러디, 콜라주, 대화체와 구어체의 활용, 신체감각에 관련된 어휘의 확대 등 사르트르가 익히고 응용한 수많은 기법이 녹아 있다. 특히 신문 기사, 재즈곡 가사, 역사책, 식당 메뉴판, 백과사전, 포스터 등에 쓰인 글귀 또한 이 작품의 한 부분을 이루는데, 이러한 ‘콜라주’ 기법은 『구토』에 나타난 서술기법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듯 『구토』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는 사르트르에게 그 자체로 ‘글쓰기의 모험’이었으며 18, 19, 20세기를 잇는 ‘문학 창작의 교차로’에 놓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구토』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1960년대에 등장한 ‘누보로망(Nouveau roman, 새로운 소설)’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진다. 기존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anti-roman, 앙티로망)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누보로망의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 인물의 해체, 이야기의 분절화, 전통적 시간관의 파괴, 일인칭 시점과 주관적 사실주의 효과의 극대화, 이야기의 논리성 파괴 등의 장치들이 『구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토』가 과거 문학 전통에 대해서 ‘도전적인 작품’이자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구토』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서술기법과 실험적인 문체로 신선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적이고 탐구적인, 혹은 작가를 꿈꾸는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사르트르의 ‘글쓰기의 모험’에 동행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편집자 미니 인터뷰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 지성, 작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 그러나 사르트르의 명성과 인기에 비해 그의 저작, 특히 그의 문학작품은 대중들에게 의외로 낯설다. 사르트르를 작가로서 세상에 알리고 자리매김하게 해준 그의 첫 장편소설 『구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계문학선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며, 고교생 필독서로, “20세기를 만든 책”으로, 현대고전으로 늘 손꼽히는 작품이지만 주변에서 『구토』를 읽어봤다고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구토』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근저를 이루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 그래서 난해하고 ‘비의적이다’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점이 무관하지 않을 터. 사르트르의 『구토』는 누가,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구토』 잘알’, 사르트르 전문가 변광배(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에게 물었다.
Q. 편집자의 욕심으론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뗀 모든 분이 『구토(에디터스 컬렉션)』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지만, 고전임에도 의외로 이 작품을 읽어본 이가 적어서 놀랐습니다. 『구토』는 사르트르의 분신이라 일컬어지는 주인공 로캉탱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삶과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외따로 떨어지기를 자처하는 고독한 지식인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는데요. 자연스레 로캉탱처럼 자신의 삶과 존재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작품을 어떤 독자에게 권하고 싶으신지요?
A. 고전을 읽는 데 그 대상을 ‘누구’로 한정하는 것이 가능한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모두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존의 문제는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멀리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보통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에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까요. 그런데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위기를 맞게 되지 않나요? 그것이 청년 시절에 올 수도 있고, 더 나중의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실존의 위기 상태가 바로 ‘구토’의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집단의 위기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 위기의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사회에 나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청년 시절에 삶과 존재의미에 대해 한번 고찰해보는 차원에서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청년 시절에 『구토』를 읽어보셨군요. 그때와 지금의 감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A. 저는 과거에 『구토』를 읽었을 때 작품에 더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어서 민주화 등의 사회적인 문제와 제 개인의 미래를 계획하는 문제가 맞물려 있었거든요.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읽었다면 아마 저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네요.(웃음) 문학을 전공하거나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둔 일반적인 대학생, 청년이었다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지만 포기했다면 삶과 실존의 참다운 의미를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몸에 좋지만 입에 쓴 약을 피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짜’에 대해서, 진정한 삶과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는 측면에서 살면서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Q. 교수님께서도 읽다가 포기했을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니 위로가 되면서 어쩐지 다시 한번 『구토』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정독하고 싶은 의지가 솟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구토』(에디터스 컬렉션)은 故 방곤 교수님의 번역으로 1983년 출간된 이후 약 40년 만에 문학 전문번역가 임호경 선생님의 유려한 번역으로 새롭게 선보이게 되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작품,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A. 저는 문학을 ‘그것만이 다가 아닌 것(pas-toute)’로 이해합니다. 라캉의 의미에서 ‘상징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아니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인간의 욕망은 현실 세계의 ‘법’, ‘체계’, ‘언어’, ‘상징’ 등으로 다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그 너머의 의미를 포획하는 것, 부조리한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며 문학의 부정성이라 이해합니다.
또 『구토』는 느리게, 더디게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특징 중 하나가 ‘느림’이지요? 그건 ‘자기’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삶, 실존의 과정은 길고 순탄하지 않기에 그런 만큼 인내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문학에 대해 흔히 말하는 ‘무용(無用)의 용(用)’, 무용한 것의 쓸모입니다.
Q. 삶, 실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대해 줄곧 강조해주셨는데요. 한국의 청년들은 취업이나 생계문제에 내몰리거나 경쟁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소비’나 ‘취향’에서 찾는 모습도 흔히 보입니다. SNS를 통해 자신의 ‘소비행태’나 ‘취향’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공유하는 활동 자체가 마치 자신의 오리지널리티 표현, 하나의 창작활동처럼 여겨지며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비되기도 하지요. 이런 현대인의 정체성 표현을 사르트르가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요?
A.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모든 선택을 각자에게 맡길 겁니다. 자유와 더불어 책임을 강조하는 전략인 셈이지요. 저는 요새 젊은이들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지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더 영리하고 명민하죠. ‘자기실현’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저 바쁜 것이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더 빨리 소유하고 이루고 싶어 해요. 해서 편리한 방식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적인 방식을 생각하다보니 소비, 취향도 자기실현의 한 방법이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자기 인격을 투사합니다. 『구토』에서 개념을 빌려오자면 그것이 소비이든, 취향이든 진지함, 성실함, 진정성을 담으면 되는 것이지요. ‘라테 타령’인지는 모르겠으나 ‘독 짓는 늙은이’의 입장에서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은, 진정성을 담기엔 요즘 세태가 너무 바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죠.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성찰할 여유도 없고요. 참다운 의미에서 ‘멋지게’ 조탁할 시간이 없습니다. SNS에 올라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 중심의 글쓰기 행태를 보면 자기 ‘분신’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자신’, ‘인격’, ‘주체성’이겠지요.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 분신을 자꾸 조급하게 꾸미고, 가짜로,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구토』에서 말하는 ‘개자식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진정하지 못한 삶임은 분명하죠. 사르트르는 한 인간을 그 사람이 한 행동의 총합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하는 행동에 온전히 자신의 인격과 주체성을 실어야겠지요. 한마디로 살아 있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뜨겁게, 치열하게, 많은 것을 해보고, 많은 것을 남기고 죽으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사르트르의 사유에서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지만 그 욕망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실패의 역사요, 인간은 무용한 정열 그 자체이지요. 사르트르는 그걸 알지만 그럼에도 더 열심히 살자, 뭔가를 만들어내고 남기자고 합니다. 그것도 최대한 자신을 투사해서요. 비극적인 삶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야 이 지구상에 왔다가 간 흔적이라도 남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먼지’로 되돌아갈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