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자유낙하-규정되지 않는 움직임
스미스의 작품이 변천되어 온 과정은 시기별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착각할 만큼 다채롭다. 전시를 기획한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보배는, 도달할 곳을 모른 채 끝없이 하강하는 움직임이나 주변을 크고 작은 시선으로 살피며 천천히 배회하는 움직임 등은 모두 스미스가 언어와 문법, 표현과 매체, 주제와 도상을 달리하면서 실험해 온 ‘자유낙하’의 정신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시 제목으로서의 ‘자유낙하’는 키키 스미스 작품에 내재된 분출하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함의하며, 이는 작가의 지난 사십여 년에 걸친 방대한 매체와 작품 활동을 한데 묶는 연결점으로 기능한다.”
책과 전시가 공유하는 지점은 키키 스미스를 수식해 온 ‘여성’이나 ‘신체’ 등의 규정적 접근이 두드러지지 않게 한 데 있다. 이같은 수식어들이 유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새로운 해석으로의 접근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업 재료로 내장기관을 제작한 〈소화계(Digestive System)〉(1988)부터 남녀 한 쌍이 스탠드에 매달려 축 늘어진 채 체액을 흘리는 〈무제(Untitled)〉(1990), 엉덩이에 꼬리(tail)처럼 긴 배설물을 달고 있는 여성을 표현한 〈테일(Tale)〉(1992), 한 여성이 늑대의 찢어진 듯 열린 복부에서 걸어 나오는 〈황홀(Rapture)〉(2001) 같은 대표작들도 수록되어 있지만, 신체탐구적이거나 여성주의적으로 대표되는 면모만을 부각하지는 않는다.
스미스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 의미의 페미니즘 예술로 해석되는 데는 반대하는데, 여성으로서의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들이 교훈적으로 읽힐 위험을 피하려는 의도다. 신체에 대한 관심 또한 여성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형태이자 각자의 경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 신체를 바라본다. 그가 자신의 작품이 교훈적으로 비춰지지 않고 보는 이의 경험에 따라 이야기가 생성되어 가기를 희망한 것처럼, 다층적인 해석에 닿을 수 있는 여러 층위를 열어 두고자 했다.
목차
책머리에 / 이보배
Preface / Lee Bo Bae
키키 스미스와 함께 거닐기 / 이진숙
Walking Around with Kiki Smith / Lee Jinsuk
작품
Works
확장하는 물질의 경계에 부치는 다섯 가지 주석 / 신해경
Five Notes on the Boundary of Expanding Matter / Shin Hyekyeong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신의 내러티브 / 최영건
The Narrative of Gods, Born, Then Born Again / Choi YeongKeon
작품 목록 List of Works
작가 약력 Biography
저자
키키 스미스 (지은이), 서울시립미술관, 열화당 편집부 (엮은이), 이진숙, 신해경, 최영건 (글)
출판사리뷰
키키 스미스(Kiki Smith, 1954- )는 미국의 미술가로, 흔히 미술계에서 애브젝트 아트(abject art)로 분류되는, 신체에 대한 해체적 표현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1980-1990년대에 개성과 다양성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이래 스미스는 현재까지도 판화, 설치, 드로잉, 사진, 공예와 종이, 유리, 테라코타, 청동, 밀랍 등 여러 매체와 재료를 아우르며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다. 1980년대부터 파편화된 몸, 내장기관, 생리혈이나 소변 같은 배설물 등을 작품으로 다뤄 충격을 주었고, 1990년대에는 이상화나 대상화를 거부한 ‘아름답지 않은’ 여성의 몸을 재현함으로써 페미니즘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주제의 범위를 동물, 자연, 우주라는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십세기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진 독보적인 위상에 비해, 소규모 갤러리 전시나 단체전 외에는 국내에서 키키 스미스와 그의 작품을 제대로 다룬 기회는 없었다. 이번에 열화당에서 출간된 『키키 스미스-자유낙하(Kiki Smith-Free Fall)』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으로 개최되는 동명의 전시와 연계된 단행본이다. 스미스를 처음 소개하는 장을 여는 만큼 다양한 시기와 매체의 작품 141점을 고르게 담고, 미술사, 미학, 문학 분야 국내 필진이 새롭게 쓴 에세이를 수록함으로써, 작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했다. 여전히 활발한 작업을 이어 가는 작가의 방대한 예술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지난 사십여 년의 궤적을 따라 거닐면서 그가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작품 속에서 배회하기
전시는 작가의 시각 어법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서사 구조’, ‘반복적 요소’, ‘에너지’와 같은 특징에 주목해 ‘이야기의 조건: 너머의 내러티브’, ‘배회하는 자아’, ‘자유낙하: 생동하는 에너지’라는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전시와 연계되어 있지만 일반적인 도록과 달리 단행본으로서 독립성을 갖도록 했고, 작품의 흐름도 전시 구성을 참고하되 책에 맞는 호흡으로 재구성했다. 책은 크게 작품과 세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지며, 작품들은 그 안에서 다시 느슨한 얼개로 나뉜다. 1983년부터 2019년까지를 아우르는 작품들은 매체나 주제, 시기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종이에 여성과 동물을 각각 표현한 작품들에서 시작해 그들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청동이나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인물 전신상에서 비슷한 재료로 별, 혜성 등이나 새를 표현한 설치 작품으로 흘러간다. 이는 이전 시기 작품에 등장한 요소가 최근 작품의 주요 모티프가 되거나 여러 모티프의 작품들이 같은 시기에 제작되는 등, 단선적이지 않은 스미스 작품의 특징과도 연결된다.
에세이 또한 전시 구성과 직접적으로 조응하지는 않는데, 기본적인 방향은 공유하면서 작가와 작품에 깊이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작품을 만나기에 앞서 가장 먼저 배치된 에세이 「키키 스미스와 함께 거닐기」에서 미술사학자 이진숙은, 작가가 다뤄 온 방대한 장르와 매체를 바탕으로 미술사적 맥락에서 그의 작업을 짚어 본다. 스미스 예술의 시작은 유한성을 가진 취약한 몸이었다. 고대부터 르네상스, 모더니즘으로 이어진 장구한 예술의 역사 속에서 작품들은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정신을 대변해 왔고, 인간은 마치 액체나 분비물이 없는 존재처럼 묘사되었다. 반면에 스미스는 도저히 예술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절단된 사지나 내장기관을, 무르고 내구성이 떨어지는 재료를 사용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겉보기엔 공포와 혐오를 유발하는 이 작품들은 결코 죽음의 전시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확인으로, 필자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모든 취약한 존재를 향한 사랑과 연민의 시선을 포착한다. 또한 작가가 자신의 작업 과정을 비유했던 표현 중 하나인 ‘배회하기(wandering)’를 관람 및 독서 방법으로 제시하는데,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연결된 여러 작품들을 두루 찾아 살펴보다 보면, 그 과정에서 충격, 슬픔, 연민뿐 아니라 치유나 회복의 힘까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과 이야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세계
작품 뒤에 배치된 두 편의 에세이 중 「확장하는 물질의 경계에 부치는 다섯 가지 주석」에서 미학 연구자 신해경은, 신체 중심의 초기작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모든 생명’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에코페미니즘적 시선에서 살펴본다. 스미스는 끊임없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예술의 범주를 구성하는 데 배제되었던 ‘여성’과 ‘여성적’인 것들을 작품 속으로 소환한다. 필자는 스미스가 공예와 예술의 구분에 도전하고 순수예술의 전통을 전복시키는 방식이 그의 작업에 자주 사용되는 공예적인 재료와 장식적인 기법에 맞닿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작업이 집에서 이루어진 것도, 가정과 분리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신성시하는 남성중심적인 관행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로도 해석된다. 스미스의 예술세계는 사람의 몸에서 나아가 동물, 자연, 우주가 품는 몸까지, 몸의 물질성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며 확장하고 있다. 그 예술 활동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1960-1970년대에 본격화된 히피 운동과 페미니즘 예술 등을 예시하면서, 스미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당시 미국의 사회정치적 문제도 함께 들여다본다.
소설가 최영건은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신의 내러티브」에서 스미스의 작품이 사적 체험에 머물지 않고 신화, 설화, 종교적 도상과 같은, ‘서로 닮았으나 같지 않은’ 곳곳의 이야기를 거쳐 확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신화는 서로 다르게 해석되는 불분명하고 모호한 지점들을 통해 완결된 해석에 저항하면서 상징의 영역으로 도약한다. 상징으로부터 무수한 이야기를 자아내고 무수한 이야기로부터 상징을 자아내는 이 반복을 ‘신’이라 할 수 있다면, 필자가 스미스의 작품에서 보는 것은 신이 되는 여자다. 이들은 모든 “경계를 의혹하며 태어나는 존재이자, 그들을 가둔 것 너머로 날 수 있는 날개를 지닌 새이고 나방이며, 메타모르포시스의 몸이다.” 이러한 시선에 따라 그의 작품을 온갖 이야기들로 재탄생하고 변신하는 순환적 내러티브로서 풀어 나간다. 그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인 ‘빨간 망토’ 우화는 두 방향의 변신을 교차시키며 늑대와 사람 간의 경계를 허무는 서사로서 이해된다. 식물과 인간을 겹쳐 놓은 〈무제(여자와 나뭇잎)〔Untitled(woman with leaves)〕〉(2009)에서는 작가가 무엇이 무엇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혹은 그들이 정말 결합되어 있는지 단언하지 않는다고 분석하는데, 이로써 필자는 “관객의 시선은 손으로부터 나뭇가지로, 삶에서 비극으로, 폐허에서 창조로, 어느 쪽으로든 나아갈 자유를 지닌다”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책 끝에 수록된 작가 약력은 정보 위주의 연보 형식이 아닌 일대기 형식으로 씌어져, 작가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글 전문은 영문을 함께 수록하여 온전한 영문판으로서의 기능도 동시에 하도록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22년 12월 15일부터 2023년 3월 12일까지 이어지며, 북토크 등의 연계 프로그램이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