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식물학을 전공해 책 짓는 일을 하는 이갑수의 산문집 『나무와 돌과 어떤 것』이 출간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에 걸친 저자의 기록 중에는 친숙한 이름과 낯선 이름이 공존한다. 벚나무나 목련, 개나리, 살구나무, 대나무같이 익숙한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말오줌때, 귀룽나무, 덜꿩나무, 물박달나무, 까마귀쪽나무같이 흔히 알려지지 않은 나무들도 있다. 책에는 사계절을 테마로 하는 13편의 긴 산문과 사계절을 이십사절기로 들여다보는 79편의 짧은 산문이 실려 있다. 짧은 산문들은 저마다 한 그루씩 모두 79가지 나무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다. 긴 산문은 식물을 우회하여 저자의 삶의 곡절을 이야기하고, 짧은 산문은 제목으로 삼은 나무와 관련된 관찰 기록을 전한다.
목차
봄, 산문
나뭇잎 한 장에서 알 수 있는 것들
솔방울의 활연대오
매화마을의 더디고 느린 시간들
양양 매운탕집 처마 밑 제비집
입춘(立春)에서 곡우(穀雨)까지
작살나무 / 육박나무 / 벚나무 / 목련 / 오동나무 / 생강나무 / 사스레피나무 / 진달래 / 올괴불나무 / 야광나무 / 말오줌때 / 대팻집나무 / 개나리 / 복사나무 / 바위말발도리 / 수양버들 / 천선과나무
여름, 산문
완도 터미널에서 만난 수박
나의, 나의 『논어』
해변의 메뚜기를 기억함
입하(立夏)에서 대서(大暑)까지
매화말발도리 / 느티나무 / 양버즘나무 / 말채나무 / 모감주나무 / 귀룽나무 / 물참대 / 신나무 / 시로미 / 칡 / 돌가시나무 / 살구나무 / 백리향 / 나무수국 / 모새나무 / 덜꿩나무 / 산딸나무 / 영산홍 / 당단풍나무 / 장구밥나무
가을, 산문
지리산 꼭대기의 물맛
마라도 끝 창문
어머니의 보자기
입추(立秋)에서 상강(霜降)까지
물푸레나무 / 상수리나무 / 마가목 / 초피나무 / 등칡 / 전나무 / 청미래덩굴 / 담쟁이덩굴 / 참회나무 / 겨우살이 / 갈매나무 / 물박달나무 / 참나무겨우살이 / 계수나무 / 노각나무 / 멀구슬나무 / 개암나무 / 잣나무 / 사철나무
겨울, 산문
북한산에서 눈을 밟으며
곡(哭),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무덤가의 할미꽃
입동(立冬)에서 대한(大寒)까지
아까시나무 / 수양버들 / 회화나무 / 물오리나무 / 무환자나무 / 나도밤나무 / 소사나무 / 먼나무 / 백서향 / 비목나무 / 으름덩굴 / 산개벚지나무 / 대나무 / 노간주나무 / 호두나무 / 황벽나무 / 사위질빵 / 주목 / 화살나무 / 거제수나무 / 측백나무 / 까마귀쪽나무 / 참식나무
책 끝에 - 파주(坡州)에서
저자
이갑수 지음
출판사리뷰
“봄이다. 신록의 계절이다. 오래전이라면 녹색의 물결을 그저 녹색으로만 여겨 이 녹색의 잔치에 초대받아도 무덤덤하게 나무 아래를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식물의 나라에 입장한 뒤부터는 연두에서 초록까지, 그 절정의 나뭇잎 세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 「나뭇잎 한 장에서 알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식물학을 전공해 책 짓는 일을 하는 이갑수의 산문집 『나무와 돌과 어떤 것』이 출간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에 걸친 저자의 기록 중에는 친숙한 이름과 낯선 이름이 공존한다. 벚나무나 목련, 개나리, 살구나무, 대나무같이 익숙한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말오줌때, 귀룽나무, 덜꿩나무, 물박달나무, 까마귀쪽나무같이 흔히 알려지지 않은 나무들도 있다. 책에는 사계절을 테마로 하는 13편의 긴 산문과 사계절을 이십사절기로 들여다보는 79편의 짧은 산문이 실려 있다. 짧은 산문들은 저마다 한 그루씩 모두 79가지 나무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다. 긴 산문은 식물을 우회하여 저자의 삶의 곡절을 이야기하고, 짧은 산문은 제목으로 삼은 나무와 관련된 관찰 기록을 전한다.
입춘(立春)부터 대한(大寒)까지
이갑수는 1월부터 12월로 나뉘는 월의 표기 방식 대신, 입춘을 한 해의 첫 관문으로 삼는 이십사절기로 시간의 흐름을 제시한다. 1월과 2월 사이에 자리하는 것은 1에 1을 더해 2가 된다는 수학적인 계산법이다. 반면 이십사절기는 서로 누가 더 크거나 작지 않은 관계를 맺으며 스물네 번의 관문에 저마다의 가치를 부여한다. 한해의 첫 절기인 입춘은 ‘立春’으로, 입춘이란 이름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일상 속 온갖 존재의 이름을 풀이해 들여다보며 그 뜻을 곰곰이 살피는 그의 자세를 담아낸다.
“입춘이다. 이십사절기에는 입하, 입추, 입동도 있지만 입춘은 어쩐지 그들과 격을 달리하는 것 같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것보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변화는 체감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입춘은 세상이라는 꽃이 제대로 확 벌어지는 변곡점이다. 입춘을 그저 ‘入春’이겠거니 했다가 ‘立春’임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봄이 있어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겼던 얄팍한 생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표기, ‘立春’이다.” - 「작살나무」 중에서
‘入春’이 봄을 나의 밖에 두고 내가 봄으로 들어서는 듯한 개념이라면, ‘立春’은 봄과 자기가 하나 되어 함께 세상에 서는 개념이다. 봄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식물을 비롯한 다른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나와 식물, 나와 자연, 나아가 나와 타자 사이에는 틀림없는 거리가 있지만, ‘立春’이 함께 서는 봄에 대해 말하듯 이갑수에게 살아가는 일이란 수시로 그 거리를 허무는 일이다. 저자는 사람이 식물의 한 종이라면 어떻게 동정(同定)될 수 있을지 상상해 보고, “물리학자들에겐 참으로 허무맹랑해 보일지도 모를 그런 상상”(p.83)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파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입자의 성질을 가진다는”(p.83) 빛의 이중성과 자기의 삶 사이에 유비적인 관계를 그려 본다. 책 속에서 이갑수가 스스로 ‘허무맹랑’하다고 말하는 이 상상들은 거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과학’의 층위에서 사람은 식물이 아니고, 빛의 성질과 삶의 성질은 서로 상상적으로만 유비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갑수는 ‘허무맹랑’이라는 범박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곁들이며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식물로 되살아나는 한 방편
길고 짧은 글을 거치며 책 속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것은 비단 식물에 대한 탐사 기록만이 아니다. “시쳇말로 이름이 좀 거시기하고 가지를 꺾으면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p.38) 말오줌때 같은 나무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삶의 여러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진다. 책은 이갑수가 처음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날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의 시간까지를 두루 살피며 그가 지닌 삶과 식물에의 태도를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식물에서 출발해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일은 사람과 식물, 빛과 삶을 유비시키는 도약을 무릅쓴다.
저자가 이런 도약과 비약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처음으로 식물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던 과거의 한 순간이다. 저자는 「곡(哭),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에서 출판사를 차리고 사무실을 수차례 이전하며 주위로부터 번번이 축하 화분을 받던 일을 회상한다. 헌책방과 호프집을 오가며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 살았던 그때, 그는 사무실에 우두커니 선 화분 속 식물들에 변변한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무실 입구에 풀 죽은 행운목을 본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간만에 물을 주고 화분들을 돌본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하니 그간 시들시들했던 식물들이 생생하게 반짝거리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것은 한 공간에 같이 있어도 나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던 식물들의 사생활에 내가 구체적으로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그때 문득 목석같던 마음 한구석에서 식물과 내가 서로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는 게 아닌가. 꺼칠꺼칠한 나무의 줄기와 띵띵한 내 다리가 근본적으로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하는 과감한 관점의 확장으로까지 치달았다. 둘 다 태우면 재만 남기 마련이다.” - 「곡(哭),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중에서
식물과 내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전제된 것은, 그 모두가 언젠가 죽음에 이르러 소멸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갑수의 식물 관찰이 언제나 한편으로는 죽음을 떠올려 보는 일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갑수에게 죽음이란 ‘나무 밑’, ‘나무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는 “사람이란 언젠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나무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p.68)고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동물로 살아가다가 식물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식물과 동물은 자연 속에서 서로 형태를 넘나들며 순환한다. “동물의 모든 몸부림은 결국 뿌리 근처에 몸을 뉘어 식물로 되살아나려는 한 방편이다”라는 책 첫머리의 문장은 저자의 그러한 관점을 함축한다.
그의 글 속에서 죽음은 결국 서로 달라 보이는 것들의 경계를 허무는 힘이다. 죽음은 그가 처음 식물에게 마음을 주던 날부터 꾸준히, 식물과 내가 서로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동력으로 자리한다. 죽음과 어우러지는 식물의 존재 역시 그러하다. 식물을 우회해 삶에 대해 말하는 13편의 긴 산문에서는 이런 저자의 관점이 한층 뚜렷하게 제시된다. 예컨대 가야금 명인 무송(舞松) 박병천의 타계 10주년 무대에서 대나무는 음악과 더불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표가 된다. 이승에서 펼쳐지는 박병천 명인의 추모 공연, 무대 위 차려진 제사상의 병풍 옆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갑수는 대나무를 보며 “실내에 우뚝 솟아 있는 대나무를 보니 저승에 뿌리를 두고 이승으로 건너온 나무 같아서 신령스럽다”(p.170)고 말한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나무는, 나와 타자의 구분을 흐리고자 하는 이갑수의 시도가 화분 속 식물과 나로부터 이승과 저승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이갑수의 관점이 지니는 의의는, 이런 경계 가로지르기가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합리의 층위가 아닌 일상성을 전면화하며 실천된다는 점이다. 그는 “소소하다면 소소하달 수 있는 이렇고 저런 일들”(p.145) 같은 범박한 자조를 통해 합리에 종속되기를 슬그머니 거부한다. 그 대신 이 책이 들추는 것은 일상이라 불리는 사적 영역이다. 책은 객관성이라는 타자의 관점을 상정하는 대신 ‘나’의 ‘주관’에서의 일상을 고백한다.
식물과 죽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년의 기록
그는 식물에 기대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결코 타인의 시선으로 객관화될 수 없는 체험을 진술한다. 삶의 황혼기에서 체감하는 죽음의 과정은 어느 날 산에 올라 그곳이 “몇 해 전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린 산딸기를 딴 곳이 바로 이 산의 정상”(p.118)이라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는 일이자, “그때 황금산에서 딴 산딸기를 잡수시고 먼 고향 하늘을 그리워했던 어머니는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몹시 아프시다”(p.118)는 사실 또한 떠올리고 마는 일이다. 수년에 걸친 기록을 담고 있는 『나무와 돌과 어떤 것』은 이런 담담한 슬픔과 병, 기억의 시간을 거쳐, 어머니가 죽음 이후에 남기고 가신 기물들을 마주치는 장면까지를 이야기한다. 산딸기 따던 산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던 저자는, 책 속 시간의 흐름을 타고 「어머니의 보자기」에 이르러 어머니의 죽음 이후 남겨진 어머니의 방으로 이동한다. 방에 남겨진 것은 안쪽에 “서늘한 침묵”을 담은 채 이제는 내용물을 비운 흰 봉투를 닮은 기물들이다. 저자는 이제는 시간이 맞지 않게 된 시계들을 들여다보다가 어머니의 반지에 자기 손가락을 끼워 넣어 본다. 그로써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어머니의 시공에 가닿아 보기를 시도한다. 반지는 박병천 명인의 대나무와 같이 이것과 저것,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허무는 화자의 관점을 그려 보인다.
“어머니의 저 반지는 내가 사다 드린 게 확실히 맞다. 대만으로 출장 갔다가 구한 호박 반지였다. 무슨 할 말을 아끼고 있는 듯한 반지를 껴 보았더니 내 새끼손가락의 첫째 마디에 겨우 걸렸다. 반지란, 반지 자체는 물론 그 안팎의 허공을 포함하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 생시의 어머니가 꼈던 반지에 내 손가락을 넣었으니 이제 이 반지를 중심으로 시공간을 넘어 나와 어머니가 포개진 것일까.” - 「어머니의 보자기」 중에서
죽음을 동력으로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를 허물던 저자의 작업은 객관화될 수 없는 슬픔의 체험 속에서 ‘나’와 저승을 포갠다. 태우면 모두 재만 남기기 마련이라는 깨달음을 불러일으킨 식물과의 관계 맺기는, “시공간을 넘어 나와 어머니가 포개진” 듯한 순간으로 확장된다. 『나무와 돌과 어떤 것』의 제목이 나무에도, 돌에도, 어떤 것에도 한정되지 않고 그 모두를 아우르고자 하는 것은 저자의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다. 이갑수는 나무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일상적인 깨달음을 ‘돌’이라는 단단함으로, ‘어떤 것’이라 지시되는 이승과 저승의 흐린 교차점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경향신문』에 ‘이굴기(필명)의 꽃산 꽃글’이란 제목으로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연재했던 글 중 나무 산문을 고르고 새로 쓴 긴 산문을 보태 꾸민 것이다. 맞춤법에는 맞지 않지만 저자의 뜻에 따라 그가 어릴 적 쓰던 사투리를 그대로 살렸고 ‘나뭇’으로 쓰이는 나무 학명의 사이시옷을 탈락시켜 ‘나무’라는 이름을 보존했다.